조각나 있는 내 어린 시절 기억에는 행복한 기억이 거의 없다. 가끔 떠오르는 몇 개의 장면들은 모두 논리적 서사가 결여된 아픈 기억들이다. 예전엔 그 기억들이 떠오를 때 며칠동안 온 몸이 마비되고 심장이 조이고 공허한 상태가 됐다. 겉으로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있었지만 내부에선 그 감정에 압도되어 뇌에 과부하가 걸리고 그 조각난 기억을 현실에서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감정이 지나가면 무기력했던 내 자신을 탓하고 스스로를 어떤 방식으로든 공격해 안그래도 상처받은 자아를 보이지 않는 지하실 방에 밀어넣고 문을 닫았다. 그것이 30년 넘게 내가 밤을 지낸 방법이다.
성인이 될 때까지 가족으로 지냈던 이들과는 더이상 만나기 어려운 곳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고 아이를 낳고 일을 하며 살았다. 삶이 충분히 안정되었을 때,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게된 후에 내 문제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되고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기 시작했다. 겹겹이 쌓인 표면의 문제를 걷어내자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해 성장이 멈춰버린 내 내면의 어린 아이가 보였다. 자꾸 쓰러지는 그 아이를 봐줄 사람은 옆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 옆에 늘 있었던 또 다른 나도 보였다. 안그래도 상처받은 내면의 어린 나를 더 무섭고 잔인하게 몰아세우던 내가.
이제는 상황을 돌릴 힘이 나에게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사랑을 담아 내 딸아이를 안듯 여리고 상처받은 내면의 아이를 안았다. 오래도록 안고 있었다. 그리고 내면의 아이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좋은 기억이 거의 없는 18세 이전의 기억들을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가는 것. 보호자로서 방치된 나를 꺼내 다시 키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새로 태어난 내면의 나는 1살, 2살일 때 핑크퐁을 사랑하고, 3살의 나는 페파피그와 더기를 제일 좋아하게 되었다. 딸아이와 같이 페파피그를 보며 행복하고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내 가족의 모습으로 가져와 본다. 이런 방식으로 앞으로 10대, 20대, 30대로 자랄 딸아이의 경험을 빌려 내면의 아이도 같이 성장할 것이다.
딸아이가 울 때는 내가 울 때 받고 싶었던 위로의 방식으로 달랜다. 그러면 내면의 아이도 위로 받는 것 같이 느껴져 편안해진다. 또 아이를 칭찬할 땐 내가 어릴 때 받고 싶었던 방법으로 칭찬해준다. 그러면 행복하고 더 자랑하고 싶은 아이의 감정이 내면의 아이에게도 전달된다. 딸이 깔깔깔 웃는 순간엔 내 안의 어린 나도 세상 편하게 마음 놓고 웃어본다. 아이와 웃고 울 때 내면의 아이가 같이 울고 웃으며 치유되는 것을 느낀다.
사랑받지 못해서 사랑하는 것이 서툴러도 상관없다.
내가 받기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아니까.
그리고 그것을 진심으로 주면 딸도 내면의 아이도 행복해 할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