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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화 Jun 17. 2020

캥거루족 인생 시작

소중한 사람, 어머니

입술이 파르르 떨렸던 1999년 2월 겨울.

내생을 함께 할 그와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행복, 희망, 봄날, 내일이라는 단어는 내 인생에 있어 먼 나라 이웃 나라 이야기였다. 불행으로 온통 뒤덮여 있던 내게 백마 탄 왕자님(나에게 있어서는)이 나타났다. 희망이 생겼고 내일이 기다려졌고 드디어 내 인생에 봄날이 찾아왔고 그것이 곧 행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와 결혼하면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안하겠다 싶었고 그 어떤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비록 대학생이었지만 나에게 찾아온 운명을 금방 알아차렸고 그 운명을 꽉 붙잡았다.


어머님은 첫아들 결혼이라고 하객 음식을 집에서 손수 만들었다. 친척들이 와서 도와줬고 시댁은 잔칫집이 되었다.


드디어 결혼식 날이다. 메이크업하고 예식장이 될 작은 교회로 이동했다. 작은 교회는 이미 하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기실에서 할머니와 아버지, 오빠, 동생과 마주했다. 가족들을 뒤로하고 결혼해야 한다는 슬픔, 한편으로는 가족에게서 벗어난다는 후련함 이 두 가지 감정 앞에서 마냥 환하게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표정에서 조금은 안정을 찾았다. 지지해주는 그 표정이 큰 힘이 되었다.


예식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신랑을 향해 입장했다. 나의 손은 신랑에게로 넘겨지고 목사님 앞에 섰다. 너무 떨려서 목사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모르는 사이 주례사가 끝이 났다.


결혼식을 빛내주는 축가 시간이 다가왔다. 신랑의 성악과 친구들이 모두 결혼식에 참석했다. 친구들이 불러주는 축가는 마치 연주회장을 방불케 했다. 피아노 치는 친구의 연주에 맞춰 테너, 바리톤 친구들이 불러주는 우람한 목소리의 축가는 작은 교회가 담기에는 너무 좁았다.

내 생애 처음으로 거대한 축가를 선물 받았다.  


독신주의자라던 남편이 친구 중 제일 먼저 결혼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24살, 내 나이 26살이었다. 그렇게 결혼식은 무사히 끝이 났다.


하객들은 어머님과 친척들이 만든 음식을 칭찬하며 만족스러워했다. 정성이 깃든 한 상 가득한 상차림은 큰아들을  위한 어머님의 마음이었으리라.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남편이 살던  대학교 근처 자췻집에서 우리들의 신혼일기가 시작되었다. 대학생이었던 남편과 결혼했기에 시부모님께 경제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곧장 한복 의상실에 취직했고 남편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학교에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부모님은 살던 곳보다 넓은 아파트를 전세로 얻어줬다. 이뿐만이 아니라 매월 생활비를 보태줬다.


학생 신분으로 시작한 결혼생활은 자동으로 캥거루족이 되어버렸다. 부모님과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으니 캥거루족인 셈이다.


대구에서의 생활은 생경하였다. 대구의 사투리와 목소리 톤은 싸우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서서히 적응할 무렵 임신을 했고 임신 7개월이 되었을 때 그만두었다. 아이를 맞이할 준비를 했고 우리는 그렇게 가정을 꾸릴 준비를 해나갔다.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물 흐르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고 있었다.


남편이 대학 졸업한 이후 시댁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1층, 부모님은 2층에 살았다. 다행스럽게도 공간이 분리되어 큰 불편함은 없었다. 그러나 아침 식사는 온 가족이 모여 같이 먹게 되었다. 아마도 어머님께서는 아침만큼은 같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듯했다.


남편은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교에 다니느라 바빠서 주로 나만 아이를 안고 2층에 올라가서 밥을 먹어야 했다. 늘 어머님 없이 아버님과 겸상이었다. 어머님은 부엌일이 바쁘시다며 늘 먼저 먹으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매일 맞이하는 그런 상황이 많이 불편했다.


아이가 어려서 어머님이 아침을 준할 때 도와주기 어려웠다. 어머님께 이제부터는 아침은 알아서 해 먹겠다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부담을 덜어주게 되어 마음이 편안했다. 하지만 어머님은 음식을 수시로 가져다줬다. 괜찮으니 이런 거 하지 말라고 해도 어머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무 죄송해서 늘 거절했지만, 어머님은 한결같았다. 시댁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완전한 캥거루족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부담 주는 것이 죄송해서 아이가 18개월 때 놀이방에 맡기고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어린아이를 맡긴 것에 죄책감이 들어서 그만두었다. 결국엔 남편이 가장이라는 책임감에 대학원을 그만두고 취직하게 되었다.


드디어 시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게 되어 마음의 부담을 조금 덜었다. 하지만 타의적 캥거루족 인생은 계속되었다.


*메인사진 https://pixabay.com/

*결혼사진 https://www.pexels.com/k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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