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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혜 Dec 14. 2023

Day 11 계획형 인간이
기차를 놓쳤을 때

오스트리아 빈에서 린츠를 거쳐 체코 체스키크룸로프로

AM 6:00

푹 자고 일어난 몸과 마음은 매우 평온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린츠를 경유해 체코 체스키크룸로프로 이동하기 위해 9시(라고 생각하고 있었음) 기차를 예매해 뒀으니까 호텔에서 8시쯤 나서면 충분하겠지. 이틀 전 기차역에서 호텔까지 올 때 30분 정도 걸렸으니 반대로만 가면 될 것이다. 살구 요거트 하나 먹고. 이젠 짐 싸는 것도 이력이 나서 거의 기계처럼 챙겨버린다.  이동 중에 필요한 물건들은 백팩에, 나머지는 캐리어에 요리조리 테트리스로 밀어붙이면 3분 컷이다.


AM 8:10

체크아웃을 하고, 괜히 아쉬운 마음에 리셉션 주변에서 사진을 후다닥 찍고 나오니 8시 10분, 얼른 버스 타러 가야지 하고 구글 지도 따라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지난 번 호텔 올 때 타고 왔던 버스정류장의 반대편이 아니라 아예 다른 곳이다. 뭐 부지런히 걸어가야지, 하고 부랴부랴 캐리어를 끌었다.


AM 8:20

정류장에 와서 구글 지도로 버스 시간을 보니 너무 빠듯했다. 게다가 기차 시간을 다시 확인해보니 9시가 아니라 8시 55분이었다! 그 때부터 두뇌 회전이 멈추고 멍..해졌다. 어쩌지? 택시 타면 될 것 같긴 한데 오스트리아 이 물가 비싼 나라에서 대중교통 30분 거리 택시비가 얼마나 나올지 겁이 났다. 내가 산 기차 티켓은 10유로, 약 14,000원 짜리다. 자칫 기차표보다 택시비가 더 많이 나올까 봐 우왕좌왕 하고 있는데 버스가 왔다!

하 몰라, 이렇게 된거 한 번 버저비터(농구 경기에서 종료 휘슬 직전에 들어가는 슛)를 노려보자. 유럽 기차 연착 많으니까 5분이라도 연착 하지 않을까? 이상하게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과연 하나님이 이 기차를 타게 해주실지 말지 내 마음대로 하나님께 미뤄놓고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AM 8:53

버스 안에서 발만 동동 구르면서 기차역 앞에 내린 시간은 8시 53분.  

거의 캐리어를 들고 나르듯이 플랫폼을 찾아 뛰었다.

저 사진 찍을 때만해도 여유로웠다 / 기차 출발 4분 전인데 아직도 버스 안...

내 기차가 있다! 그런데...문을 닫았네? 너무 당황스러워서 문 여는 버튼을 눌러봤지만 소용이 없다. 기차가 있는데...탈 수가 없다니.. 떠나고 없는 것보다 더 황망한 이 상황.. 어어어? 어떡하지? 기웃기웃 거리는 지각생을 두고 기차는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떠났다.

그리고는 OBB (오스트리아 국영 철도청)앱은 내게 메세지를 보냈다.

"우린 계획보다 1분 늦게 출발했어.1시간 11분 후 린츠 역에 도착할 거란다."

그래...1분 기다려줬구나..고맙다...

문을 안 열어주고 속절없이 떠나는 기차...

이왕 이렇게 된 거 뭐 다음 열차를 빨리 잡자. 마냥 넋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게 린츠에서 체코 체스키크룸로프로 가는 버스가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버스 시간 전에 린츠에 도착해야 했다. 그나마 넉넉하게 버스 시간을 잡아둔 과거의 나를 칭찬하고 다음 열차 예매 창을 열었는데?

여행 3주 전 예매했을 때의 가격이 아니었다. 다음 열차는 자그마치 40유로, 56,000원이었다! 게다가 이건 입석 같은 개념이고 좌석을 제대로 잡으려면 또 추가 요금을 내야 해서 거의 6만원이 넘는 돈을 울며 겨자먹기로 내야했다. 그 동안 알뜰 살뜰 여행하느라 매번 환율 계산하며 전전긍긍했던 시간들이 스쳐지나가면서 아주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이었지만, 연민에 빠져 있을 여유도 없다. 다음 열차 플랫폼으로 가야 된다.   

쓸쓸한 마음 달랠 길 없어 괜히 열차 사진이나 찍어봤다.

AM: 9:28

오스트리아 열차 처음 타는데 좌석 간 간격도 좁고 사람이 많아서 짐 보관할 곳도 적어서 고생을 좀 했다. 내 자리엔 또 입석 메뚜기 뛰는 분이 앉아 계셔서 내 자리라고 비켜달라 해야 했고...이것이 과연 6만원치를 낼만한 열차인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백팩을 끌어 안고 멍..하게 앉아 있다가 린츠역에서 내렸다.

내 맘처럼 황량한 린츠 역
내 심정처럼 비가 내리는 린츠 버스 정류장

AM 11: 00

린츠에 도착하니 비가 주룩주룩, 체스키로 가는 버스터미널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오늘이 훈련의 날인 것인지 린츠에서조차 잘 가던 시내버스가 갑자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뭔 일인가 봤더니 이 비오는 속에서 도로 정비 하며 나무를 베고 계신다... 제발..

다행히 15분 정도 만에 다시 움직여서 터미널 도착. 터미널이라고 했는데 전혀 터미널 느낌이 안 나서 우산 들고 캐리어 끌고 겨우겨우 버스를 찾아왔다. 플릭스라는 버스인데 유럽의 나라 간 이동 노선이 많고 야간 운행도 많이 한다. 빈에서 체스키로 바로 가는 노선이 너무 멀어서 이렇게 린츠를 거쳐 가는 게 가장 빨랐다.


플릭스 버스에 짐을 싣고 앉으니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상심에 잠겨 있는 나를 달랠 여유가 생겼다. 그래도 다음 열차가 있어서 좀 비싼 돈 들였지만 플릭스 버스는 안 놓친게 어디야? '오히려 좋아' 까지는 힘들지만 '그래도 괜찮아' 정도 까지라도 생각해보자 했는데 자꾸만 6만원이면 뭐도 살 수 있고 뭐도 먹을 수 있고...하는 생각이 들어서 차라리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머리를 비우기로 했다.    


여행지에 온다는 것 만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중요한 걸 도둑 맞거나, 불친절한 대접을 받거나, 빈대에 물리는 등 여행을 망쳐버릴 요소는 얼마든지 많다. 어떤 것도 거저 되는 건 아닌 것이다.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내 여행은 어떤 방해도 없이 순조로웠다.


4년 전 여행에서도 썼던 방법인데 여행 중에 기분이 나빠질 때 내가 쓰는 처방은 하나 뿐이다.

성경 말씀 아무 곳이나 펼쳐서 읽고 잠을 자는 것.

'하나님, 제가 이런 이런 일로 기분이 좋지 않지만 하나님께 제 기분도 맡겨드립니다.'

짧게 기도하고 시편을 펼쳐서 읽다가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다행히 가는 길의 탁 트인 풍경과 넓은 초원이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위로해준다.


PM 1:20

드디어 체코로 넘어와 체스키 크룸로프 도착. 체스키 크룸로프는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인데 아기자기하고 예쁘다고 해서 1박하기로 했다. 하지만 비가 오다 말다 날씨가 흐려 다들 예쁘다고 칭찬이 자자한 그 아기자기함을 잘 못 느끼겠다. 아직도 기차를 놓친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계획형 인간..


주황 지붕을 보아도 그저 심드렁했던 시간들

숙소를 찾아가 짐을 풀었다. 오늘은 주인이 숙소에 없다고 열쇠박스에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열쇠를 찾아가라고 했다. 지금은 비수기라 그런지 숙소에 아무도 없는 것 같다. 혹시 숙박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나? 셀프 체크인 후 방에 들어오니 내가 좋아하는 삼각 지붕 방이다. 깔끔하고 아늑해서 조금씩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왼쪽 분홍 건물이 오늘의 숙소
저 비밀번호를 맞추면 박스가 열린답니다.
복도 공간
따뜻하고 아늑한 방
청록색 화장실도 깔끔

PM 2:00

짐을 놓고 밖으로 나왔는데 데이터가 안 터진다. 여행오면서 유심을 갈아 끼웠는데 이 지역에서는 안 되나보다. 빈에서도 잘 되었는데 여기선 안 되는 게 좀 이상하지만 뭐 어쩌랴. 이젠 그냥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도 두렵기는 하다. 늘 구글 지도를 연결해서 길을 찾던 터라 혹시라도 길을 잃으면 어쩌지? 그나마 다행인 건 이 곳이 정말 규모가 작은 마을이라는 것이다.

중앙 광장에 있는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니 한국어로 된 지도가 있었다. 한국, 중국, 일본 관광객이 정말 많이 온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래도 종이 지도라도 있으니 비상시 이걸 사용하면 되겠군. 마음이 점점 더 편안해진다. 이제 밥을 먹으러 가자.

비수기인데다가 평일이라서 거리가 조용한 가운데 이 베트남 식당이 보이길래 그냥 들어갔다. 어디서나 실패 없는 쌀국수를 먹을까 하다가 좀 더 호화로운? 메뉴로 날 달래려고 구운 오리고기와 커리가 있는 메뉴를 골랐는데 신기하게 메뉴판 사진이랑 완전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바삭바삭 오리고기를 먹으며 문득 궁금해졌다. 프라하에서 3시간이 넘게 떨어진 이 작은 마을에 어쩌다 베트남 식당을 열게 되었을까?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지만 고봉밥을 먹다보니 배가 불러와서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베트남 + 일본 + 태국 중 그 어딘가..
구운 오리 고기와 커리. 오리 고기는 바삭바삭 하고 커리는 코코넛을 넣었는지 달달해서 맛있었다.

밥을 먹고 나니 조금 더 기분이 나아졌다. 예전에 들었던 말 중에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가장 작은 문제라고 했다. 다친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니까 괜찮다 괜찮다 되뇌이면서 마을을 산책했다. 기념품 가게와 작은 소품 가게가 참 많구나.

깜짝 놀래킨 할머니 마네킹
너희들 눈이 참 크구나
체코의 뽀로로 격인 크르텍 (두더지)
사진 찍을 땐 몰랐는데 돌아와서 보니 이 마그넷은 귀여워서 하나 사올걸 그랬네

물레방아도 보고, 다리도 건너고, 이 마을은 블타바 강에 둘러싸여 한국 하회마을과 비슷한 지형이다. 정처없이 걷고 또 걸었다. 비가 오고 나니 좀 더 날씨가 추워졌다.

중앙 광장 / 다리가 오동통한 천사
해리 포터?

PM 4:00

날씨도 춥고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서 파란만장했던 하루를 정리하며 쉬려다가 지하에 있는 작은 카페를 발견했다. 카페 안 쪽에서 번지는 불빛이 따뜻해 보여서 괜히 들어가보고 싶어졌다. 게다가 메뉴판의 PLUM PIE (자두 파이) 맛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먹어본 맛은 참아도 먹어본 맛은 참는 나란 인간...그래 오늘 특별히 자두 파이를 (나에게) 하사하도하지.  


아름다운 직원 두 분이 따뜻하게 반겨주셔서 핫 초콜릿과 자두 파이를 시켰다.

위에는 소보루의 바삭함이, 속에는 자두잼의 달콤함이 조화를 이루는 파이를 한 입,

지나치게 달지 않으면서도 진한 초콜릿을 한 모금 마시니 웃음이 나온다. 아구 맛있어.

바삭한 크럼블 아래 상큼한 자두잼이 가득 깔려 있는 자두파이
진한 핫 초콜릿. 체코어로는 Horká čokoláda (호르카 쵸콜라다) 라고 한다.

PM 5:00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다보니 대략 이제 길을 알겠다. 길을 잃어도 골목만 따라가면 중앙 광장이 나오니까 염려가 없다. 내일 더 맑은 정신으로 돌아봐야지.

보기만 해도 달달해지는 젤리가게와 야경

PM 9:00

자고 일어나면 몸과 마음이 모두 재충전 되게 해주세요.

오렌지색 불빛 속에서 끔벅 끔벅 하다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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