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보드와 동거
내가 섭식장애에서 완치할 수 있었던 이유를 들자면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출간을 위한 원고를 쓸 시기는 완치한 후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스스로도 완치의 이유를 규정하기 어려웠다. 수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완치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34살 겨울 스노보드에 입문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운동이 아닌 스포츠를 한 것이다. 이전까지 내게 운동이라 함은 몸의 모양을 가꾸기 위한 것이었다. 옷을 입었을 때 테를 좋아 보이게 하기 위한 도구. 중요한 건 모양이지 기능이 아니었다. 미술과 패션을 전공하며 자연스럽게 생긴 심미안이거나 혹은 타고나길 예쁜 것을 좋아하는 걸 수도 있다. 물건을 선택할 때도, 사람을 선택할 때도 그랬다. 기능보다는 모양이 중요했다. 그건 스스로를 재는 잣대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내 몸은 모양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내게 있어 운동이란 몸의 형태를 가꾸기 위해 존재했다. 유산소로 부피를 줄이고 가벼운 근육 운동으로 군살이 없어 보이게끔 만들기 위한 수단. 운동 능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30분을 걸어 태우는 칼로리가 중요하지 내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싶지도,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러다 스노보드를 타게 된 것이다. 코어로 버티고 허벅지 근육으로 설면을 누른 상태에서 균형 감각으로 회전을 해야 하며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마저 이겨내야 하는 스포츠. 처음으로 몸을 썼다.
스노보드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근육의 존재 이유와 기능을 알게 됐다. 그리고 내 몸은 태어나 처음으로 보여주기 위한 몸에서 기능하는 몸으로 변했다.
스노보드는 마일리지가 쌓이듯 점진적으로 실력이 느는 스포츠다. 대부분의 스포츠가 그러하듯 타고난 감각과 운동 능력만으로 실력이 늘기에는 한계가 있다. 많이 타는 만큼 체력과 기술이 늘기에 일단은 많이 타야 했다. 나는 잘 타고 싶었다. 스노보드를 잘 탄다고 커리어에 도움이 되지도 않고 딱히 생산성이 있는 행위가 아니었음에도 나는 스노보드를 잘 타고 싶었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겁이 많아 면허증만 따놓은 채 운전은 안 하는 걸 제외하면 자전거를 타거나 배를 타는 등 직접적으로 바람을 피부에 맞으며 속도를 내는 걸 좋아했다. 속도를 더 내려면 더 잘 타야만 했다. 빠르게 속도를 즐기기 위해. 그러려면 스노보드를 많이 타야만 했다.
체력이 필요했다. 추운 겨울 설상에서 몇 시간이고 스노보드를 탈 수 있는 체력. 처음으로 체력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엔 근육. 스노보드를 탈 때마다 허벅지가 탈 듯이 아팠다. 이 정도 고통이면 누구보다 멋지게 낮은 자세로 눈을 가르며 질주해야 했다. 그러나 지인이 찍어 준 내 보드 영상을 보고선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가만히 서서 그저 보드가 흘러가는 대로 몸을 실은 채 거북이 마냥 눈 위를 엉금엉금 기어 내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더 빠르게 질주하고 싶었다. 더 강하게 보드를 누를 허벅지 근육이 필요했다.
스쿼트를 시작했다. 애플힙이나 탄탄한 허벅지 따위는 필요 없었다. 보드 위에서 나를 지탱해 줄 허벅지 근육, 더 빠르게 질주할 수 있게 해 줄 강한 다리가 필요했다. 나는 스노보드에 점점 더 빠져들었고 몸매 강박에서 점점 빠져나왔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시간만 나면 스키장으로 향했다. 집에 눌러앉아 폭식하고 토하고 있을 새가 없었다. 점점 폭토의 횟수가 줄었고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졌다.
문제는 겨울은 짧다는 거다. 시즌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가 문제였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나는 그 겨울 가또를 만나 봄부터 동거를 시작했다.
내게 식사란 풍부한 단백질과 식이섬유, 제한된 지방과 탄수화물을 섭취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었다. 다른 의미는 없었다. 하루 세끼 규칙적으로 음식물을 섭취해 극한의 공복이 오지 않도록 배가 고프든 고프지 않든 정해진 시간에 음식을 먹었다. 식사에 있어 맛있다거나 즐겁다는 개념은 없었다. 식사를 할 땐 언제나 혼자였고 매일 똑같은 걸 먹었다. 두부, 달걀, 버섯. 장을 보러 가는 건 그저 이 세 가지를 다시 채우는 가사 노동이었다.
가또와 동거를 시작한 후 요리는 가또의 몫이었다. 가또는 먹고 싶은 음식이 다양했고 맛에 민감했다. 매일 가또와 함께 가또가 차려주는 밥을 먹었다. 처음으로 먹어본 음식이 많았고 그중에는 깜짝 놀랄 만큼 맛있는 음식도 많았다. 가또가 특히 즐기는 건 제철 음식이었다. 봄에는 산나물이, 여름에는 옥수수가, 가을에는 새우, 겨울에는 과메기와 방어가 식탁 위에 올라왔다. 달력 속 숫자로 가늠하던 계절의 변화를 음식으로 알아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가또는 SNS에서 유행하는 음식들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문 앞에 높은 택배 박스 산이 쌓인 날이면 어김없이 그 안에는 와플팬이라든가 타코야끼팬이라든가 바비큐 그릴 같은 것이 필요한 모든 식자재와 함께 있었다. 그 물건들은 대체로 한 두 번 사용하고 창고에 쌓여있기 마련인데 가또에게는 물건의 필요성보다는 물건이 주는 경험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경험해 본 것으로 물건의 목적이 끝났기 때문이다.
가또는 음식에 대해 집요함마저 있다. 사람 많은 곳은 싫어하면서도 꼭 가보고 싶은 식당이 있다면 3시간까지 줄을 서 본 적도 있다. 어떤 날은 집에 청주가 세 병 왔다. 출근해 있던 가또는 청주를 바로 냉장고에 잘 넣어달라며 연락을 해왔다. 생산량이 적은 양조장의 구하기 어렵다고 소문난 청주였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겨우 주문에 성공했다고 한다.
한 번은 이 청주를 넣은 초콜릿이 있다고 해서 좀체 가지 않은 강남의 골목을 헤맨 끝에 초콜릿을 구했다. 그 먼 길의 끝이 초콜릿 한 박스였단 사실에 황망했었는데 집에 와 먹어 본 초콜릿의 맛은 태어나 처음 경험해 본 맛이었다. 달콤한 시작과 쓰디쓴 목 넘김 끝에 오는 달짝지근함
음식에 유난스러운 가또가 좋았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청주에 뜨끈한 어묵탕을 찾고 비싼 와인은 못 마시더라도 와인잔은 까다롭게 고르며 소금만 다섯 종류가 넘게 양념칸을 차지하고 있지만 먹는 것에서 어떠한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던 나는 그런 가또가 신기하면서도 좋았다.
어느덧 식사 시간이 기다려졌다. 가또에게 맛있는 걸 먹자고 자주 재촉했다. 내게 먹는 것은 나를 살찌우는 행위로써 고통일 뿐이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 그리고 공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자꾸 찾아와 나를 먹게 하는 공포스러운 감각. 그랬던 내게 가또는 먹는 즐거움을 알려줬다. 점심을 먹으며 저녁에는 뭘 먹을지 고민하고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구경하는 게 일상 속 작은 취미가 됐다. 새로운 신제품이 소식이 들리면 맛이 궁금했다. 먹어보고 싶은 게 많아졌다.
가장 중요한 건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식사 시간이었다. TV 앞이나 PC 앞이 아닌 테이블에 가또와 마주 앉아 음식을 나눠먹는 행위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공복이 오는 게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그건 그저 가또와 또 다른 식사를 할 시간이라는 신호에 불과했다.
인생의 커다란 두 가지 변화가 한 시기에 오면서 나는 섭식장애에서 완치할 수 있었다. 그 시기가 절묘하기에 둘 중 어떤 것이 더 큰 영향을 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스스로 극복한 것이 아닌 가또의 영향으로 병이 호전됐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 살아가지 않고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유기체이기에 가또와의 관계로 변한 나도 그저 나일뿐이다.
스노보드 시즌이 아닐 때는 가또와 서핑을 하고 부지런히 여행을 다녔다. 어찌 보면 병원에서 권장하는 여러 치료 방법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야외 활동을 많이 하는 것, 햇빛을 많이 보는 것, 운동을 하고 취미를 같는 것, 음식의 성분이 아닌 음식을 먹으며 느끼는 내 감정에 집중하는 것. 물론 이런 것들이 누구의 섭식장애에나 적용되는 절대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변화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환경에서 나만 나아지길 바랄 수는 없다. 한 번 준 변화에도 호전이 안된다면 또다시 변화를 주면 된다. 그렇게 변화에 변화에 변화가 쌓이다 보면 내게 맞는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17년 만에 내게 나타난 변화처럼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EqW63UzQ3tM&t=323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