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북] 대만 작가 탕누어 인터뷰
[편집자 주] 2017년 5월 온라인으로 발행되었던 탕누어 인터뷰가 지금은 검색이 되지 않아 여기에 복원해 둔다.
북클럽 오리진에서 [미니북]은 손바닥 안의 책 한 권입니다. 화제의 저자 인터뷰를 비롯한 긴 호흡의 글을 전합니다. 오늘은 <마르케스의 서재에서>의 저자인 대만 작가 탕누어 인터뷰입니다. 저자이기보다 성실한 독서가임을 자처하는 탕누어의 이 책은 마르케스의 <미로 속의 장군>을 앞세우고 책 읽기에 관한 거의 모든 질문에 대답을 시도합니다. 그 치밀함은 독서에 관한 현상학적 탐구라 불릴 만합니다. 사색의 범위와 깊이가 이런 류의 책들 중에서 단연 돋보입니다. 만약 책 읽기의 세계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자신의 전령으로 이 저자를 내려보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대만에서는 2007년 출간된 책이 뒤늦게 지난 2월 국내에 번역돼 나왔습니다. 타이베이로 찾아가 인터뷰를 한 후 이메일로 한 차례 추가 문답을 주고받았습니다.
*그의 책을 번역한 김태성 번역가가 통번역 과정의 수고를 맡아 주었습니다.
탕누어(唐諾) 본명은 셰차이쥔(謝材俊). 1956년 타이완에서 태어나 국립 타이완대 역사학과를 졸업한 후 '직업 독자'를 자처하며 독서와 독서 관련 글쓰기에 몰두해왔다. 대만의 원로 작가 주시닝의 딸이자 타이완 대학 역사학과 동창이며 '타이완의 프랑수아즈 사강'으로 불리는 소설가 주톈신(朱天心)과 부부다. 국내에는 <마르케스의 서재에서>, <한자의 탄생>, <역사, 눈앞의 현실>, <명예, 부, 권력에 관한 사색> 등이 번역돼 있다.
-탕누어가 필명이라고 들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여러 가지 필명을 썼습니다. 예전에 출판 일을 할 때 추리탐정 소설 편집도 많이 했는데 애거서 크리스티(1890-1976)의 책에 나오는 탐정 이름을 따서 쓴 적도 있습니다. 여러 필명 중에서도 탕누어는 영어의 '도널드'에 가까운 음인 한자어 '당누어(唐諾)'라고 쓴 것입니다. 저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데다, 웃기면서 성실하지도 않은 캐릭터이긴 합니다만 거기서 따왔습니다. 예전에 글을 쓸 때는 미국 NBA 프로농구에 관한 글도 많이 썼습니다. 제 아내나 친구는 저에게 왜 본명을 쓰지 필명을 쓰느냐고 하는데, 저는 필명을 쓸 때 자신을 잠시 떠나서 나를 더 자세히 나타내거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 <마르케스의 서재에서>는 어떻게 쓰게 되셨지요?
저는 비교적 일찍부터 출판문화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편입니다. 대학 때부터 책을 쓰고 잡지 편집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가 했던 일은 제 인생에서 일종의 연습 단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를 진짜 출판문화계에 입문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제 작품을 쓰는 일은 늦게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진짜 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92년 이후입니다. 첫 책이 <문자 이야기>(文字的故事, 국내에는 <한자의 탄생>으로 번역됨)였고 <독서이야기>(閱讀的故事, 국내에는 <마르케스의 서재에서>로 번역됨)가 두 번째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책 제목을 모두 '~이야기'라고 붙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출판문화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인류 이야기', '종교 이야기', '예수 이야기'처럼 일련의 이야기 시리즈 기획 도서를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 무슨무슨 이야기라는 형식이 세계 출판계에서도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개념이긴 한데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는 못한 것들에 관해서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 너무 깊지는 않더라도 넓은 범위의 내용을 포괄하면서 보편적으로 무엇인지 선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헌법이나 국가, 권력 같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풀어가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 알고 지내는 대만 영화감독 허우샤우셴(侯孝賢, 대표 영화 <자객 섭은낭>)이라든가 아내인 소설가 주톈신(朱天心), 대만의 유명 입법위원 등을 각각 만나서 당신은 영화, 당신은 소설, 당신은 국가, 등등을 맡아서 쓰자고 했습니다. 처음에 이야기 프로젝트를 제안했을 때는 다들 관심을 가졌는데, 각자 일들이 바쁘다 보니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에 정말 실행에 옮긴 것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자의 탄생>과 <마르케스의 서재에서>가 나오게 됐습니다.
<한자의 탄생>은 상대적으로 간단한 책이었습니다. 허우샤우셴 감독과 다른 작가와 같이 방송국의 자문역으로 일할 때였는데, 매주 한 편씩 총 13편 방송할 계획으로 제가 글을 썼던 것입니다. 방송용이다 보니 비교적 내용도 간단히 썼습니다. (사실은 이 책도 그렇게 간단한 내용은 아니다.) 반면에 <마르케스의 서재에서>는 그런 제약이 없었기 때문에 제 생각을 다 담아서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용도 조금 무거워진 감이 있습니다. 이 책은 순전히 독자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이 책을 읽게 되는 분은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저로서는 독자의 입장에서 제가 겪고 생각한 것을 정리한 책입니다. 이미 이 책을 쓴 지는 오래됐고(올해로 10년) 지금 제 작품을 다시 읽어보면 쑥스럽습니다. 그래도 이 책의 내용은 제가 한 마디 한 마디 진심으로 생각해서 담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이 나왔을 때 반응은 어땠나요?
독자나 시장의 반응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중국과 홍콩에서도 출간이 됐고 그곳 반응도 좋았습니다. 홍콩의 경우 시사주간지인 <아주주간>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한국에서도 반응이 좋다고 들었습니다. 번역을 잘해 주셔서 그런 것 아닌가 싶습니다. (웃음) <마르케스의 서재에서>는 대만에서 책이 나왔을 때는 저의 고정 독자층이 많이 있는 편이어서 출판사가 적자를 보지 않을 정도는 됐습니다. <한자의 탄생>은 대만과 중국에서의 반응이 달랐습니다. 대만에서는 판매가 아주 좋아서 <마르케스의 서재에서>의 4배를 기록했습니다. 중국에서는 그 반대였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 중국 사람들은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대만 작가가 중국의 한자를 분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각 장마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소설 <미로 속의 장군>에서 따온 단락을 제시한 후에 주석을 달듯이 이야기를 풀어간 방식이 독특하더군요. 마치 책은 이렇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시연한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이런 형식은 어떻게 떠올리게 되셨나요?
글쓰기에서 방법은 중요합니다. 저로서는 최대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가깝게 쓰는 것, 구조와 방법에 대해 고민한 결과입니다. 어떤 사실만 이야기하다가는 그 안에 담긴 온도랄까 느낌, 디테일을 놓치기 쉽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 생각해서 취한 형식입니다. 마르케스의 소설 <미로 속의 장군>을 길잡이로 삼은 것은 어떤 시야, ‘먼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야가 나와 함께하면서 대화를 만들어 내 사유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의 단락과 함께 호응하고 대화하면서 글이 앞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마르케스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이고 아주 겸허한 작가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미로 속의 장군>을 길잡이로 삼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보르헤스나 체호프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바꿔 쓸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책에 여러 작가와 고전들이 인용되는데 주로 서양 작가들이더군요. 칼비노, 벤야민, 마르케스, 나보코프, 보르헤스, 그레이엄 그린.. 그리고 가끔 공자나 동양 작가가 나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동서양 작가들의 독서에 차이가 있다고 보시나요?
동서양의 읽기에 차이가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서양이냐 동양이냐, 어느 국적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중국 고전인 <좌전(左傳)>에 대한 책을 쓴 적도 있습니다. 저는 책을 깊이 읽을 경우에는 무정부주의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책에서 '문자 공화국의 국민'이라는 표현도 썼다.)
-원래 집필 취지가 독서를 권장하면서 덕담만 하기보다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문제를 솔직하게 해명하려는 것이었다고 쓰셨더군요.
흔히 하듯이 책 읽기의 즐거움만 강조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위험이 있습니다. 특히 독서를 막 시작하는 단계에서 책 읽는 목적을 재미에만 두고 기대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사실 책을 읽는 것은 적잖이 힘겹고 때로는 무미건조하며 어느 정도 강제성을 부여해야 하는 부분이 매우 많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책을 읽는 이유를 재미에서만 찾게 하려 들었다가는 실망이 커서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책을 던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저 재미만 찾자면 책을 읽는 것보다 컴퓨터 오락이나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시청하거나 인터넷에서 채팅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방하며 노는 것 아니면 노래방에 가는 게 훨씬 더 재미가 있겠지요. 하지만 세상에는 재미있거나 놀이의 방식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좋은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독서도 그중 하나입니다.
-독서의 '곤혹스러움'을 누차 이야기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거대한 본질적 곤경을 피할 수 없다"고도 하셨지요.
기본적으로 독서는 먼 곳을 향합니다. 밀란 쿤테라가 말한 ‘먼 곳’입니다. 책을 읽는 사람의 자태는 고개를 쳐들고 큰 세계를 바라보는 겁니다. 자신이 아직 모르고 본 적도 없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갖고 있지도 않은 것을 향하는 거지요.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곤혹은 필연적입니다. 이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종의 심리 사유의 상태이지만 통상적으로 그보다 더 나빠지지는 않습니다. 더한 고통이나 위험을 가져오진 않지요. 때문에 책 읽기의 곤혹과 함께 지내는 것은 견디기 힘들 정도의 어려움은 아닙니다. 오히려 훌륭한 독자는 그런 곤혹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뭔가 해결되지 않아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이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배가 해수면 위에서 쓰레기를 발견하면 육지가 가깝다는 것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곤혹은 대단히 믿을 만한 어떤 징후이기도 합니다. 이런 곤혹은 독서의 진행에 따라 풀릴 수 있지만 파편처럼 갈수록 더 구체적이고 명확해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완전히 새로운 사물을 표상하기도 하고요. 적어도 점점 더 올바른 질문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수많은 위대한 저자가 종종 올바른 질문이 해답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좋은 질문은 사유를 일으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와 함께 살아 있게 하고, 인간과 세계를 대단히 친밀하고 함께 걸으면서 반추할 수 있는 대화의 관계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빠른 해답은 통상적으로 문제를 소멸시키면서 사유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진통제로 편히 잠들게 하는 것과 같지요. 독서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한 차원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미 훌륭한 저자와 같은 문제를 보고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대화의 일원이 되는 거지요. 그 과정에서 곤혹은 점차 잦아들고 지극히 정교하고 세밀한 형식으로 분해됩니다. 이전보다 자신이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사유가 문제를 찾는 능력은 해답을 찾는 능력보다 영원히 강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체로 믿을 만한 해답을 주는 것과 동시에 열 개, 스무 개의 또 다른 문제를 가져다줍니다. 그런 까닭에 독서와 더불어 곤혹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파도가 밀려오는 것과 같지요. 인간의 뇌가 멈추고 감각기관이 전부 닫히지 않는 한 곤혹은 독서와 함께할 것입니다. 그래서 보르헤스는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곤혹뿐이고, 인류의 사유사는 일련의 곤혹의 역사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책이 갖는 '본질적인 결핍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읽기를 권할 수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독서는 일종의 선한 생각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예컨대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고 타자를 동정하고 싶다거나 좀 더 나은 자기가 되고 싶다는 생각 같은 것이겠지요. 저는 누구나 일생에서 (특히 마음이 비교적 넉넉한 젊은 시절에) 일정 시기를 지날 때마다 약간의 책을 읽고 깨달음을 얻고 어떤 생각들을 알게 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런 선한 생각의 불꽃도 그냥 두면 꺼지기 쉽습니다. 독서의 어려움은 시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서의 불꽃이 도중에 꺼지는 가장 현실적 이유는 결국 개인의 가치 신념에서 우선순위의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멋진 몸매를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매일 다이어트를 하면서 달리기며 근육운동도 하겠지요. 심지어 성형도 합니다. 저로서는 이런 일들이 책 한 권을 끝까지 읽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위험하며 돈도 많이 드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을 우선하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달렸습니다. 독서에 분명한 곤혹스러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이유는 그것을 견딜 만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제 책에서도 썼지만 일본의 한 여성 바둑기사가 한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바둑 기사 오다와 도모코는 자신이 바둑을 두는 즐거움에 대해 사람들이 묻자, “재미가 있긴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재미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도 독서가 즐겁기는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즐거움은 아니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책을 읽어서 얻는 행복감은 '무게가 있는' 행복감입니다. 어떤 흥분 상태나 기쁨과는 다릅니다. TV 드라마를 볼 때의 즐거움과는 다른 즐거움입니다. 책은 수십 년에 걸쳐서 작가들이 축적해온 지식을 그 값어치에 비하면 아주 싼 값으로 얻을 수 있는 통로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데는 잘 쓰는 돈을 책을 사는 데는 왜 그토록 인색한지 안타깝습니다. 삶의 방향이나 방식이 다른 누군가를 설득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저 자신은 제 생명이 실제적이고 실체적으로 대지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 느낌을 느끼면서 이를 통해 제 삶이 진실한 것처럼 느끼고, 생을 낭비하지 않았다고 느끼며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저 자신 또는 누군가의 힘으로 이 세상 전체를 바꿔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개인과 집단 간에 차이가 있거나 아주 다르거나, 심지어 역행할 수도 있다는 점이 이 시대가 우리에게 허락한 가장 좋은 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개인은 의지만 있다면 언제라도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친화적인 분위기의 작은 공간은 확보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책이나 독서에도 등급이 있다고 보시나요? 책 읽기의 방법을 이야기하면서 꼭 최고의 책이 아니어도 읽을 필요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기본적으로는 평등하다고 봅니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평등의 확장을 막을 수 없다고 했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어느 분야에서나 등급이 나뉘는 측면은 확실이 있습니다. 물리학 같은 경우 아인슈타인 한 사람의 의견이 2억 명의 의견보다는 옳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보면 독서에도 등급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30년 동안 책을 읽어온 사람과 이제 막 시작한 사람 간에도 당연히 차이가 있겠지요. 일반적으로 책을 읽을 때는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받은 ‘명작’부터 읽는 것이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꼭 성공하지 않은 책을 읽는 것은 한발 더 나아간 독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정교하고 조밀하며, 오래된 독서 방법이기도 합니다. 특히 책을 쓰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독서가 필요합니다. ‘실패’는 다양한 상황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일류 작가의 실패한 작품, 예컨대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고골리의 <죽은 혼>,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 같은 작품은 단순히 실패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책을 쓴 작가가 일부러 어떤 어려움에 도전한 것일 수도 있고, 거의 도달할 수 없는 목표에 도전하여 실패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실패는 대단히 진귀하고 웅장하며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충분히 좋은 독자들이라면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작가와 함께 새로운 경험을 할 수도 있고, 사람의 사유와 상상의 최고점에 도달하는 시도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또, 성공하지 않은 작품을 보면서 독자는 직접 문장을 다듬다가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되는 것을 시도해보며 스스로 새로운 발견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인류는 문자를 쓰고 기록을 시작하면서 책을 쓰는 단계로 갔습니다. 책은 저장과 전달의 수단이었습니다. 이제 디지털 시대로 오면서 그 역할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책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가령, 한국에서도 맛집 열풍이 있을 겁니다. 음식점에 관한 수많은 디지털 정보가 담긴 온라인 백과사전과 어떤 작가가 몇 곳을 골라 설명해준 책을 비교해 보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기계적인 저장과 기억이 아니라 기억과 망각의 중간 어디에 위치합니다. 그중에서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선택을 하는 것이고, 작품 안에는 어떤 해석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기억과 망각의 중간이면서, 거기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무작정 수많은 지식이 저장돼 있는 창고에 직면했을 때는 더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레이더스: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를 보면 십계명을 보관한 성궤를 어디에다 감췄는데 창고 안에 똑같은 성궤가 너무 많으니까 못 찾게 됩니다. 백과사전의 맹점, 디지털 기억 창고의 맹점입니다. 그 점에서 책 읽기나 글쓰기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부의 양극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못지않게 책 소비와 독서도 양극화 경향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독서가 민주화한 사회에서는 지식의 평등화가 이뤄지겠지요. 그럼에도 독서의 민주화는 민주화일 뿐이고, 사회의 고도화가 이뤄지려면 역시 그 사회의 엘리트가 더욱더 책을 읽고 지지하고 사회를 그런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전 세계에 5백만 부가 팔렸다고 하는데, 설사 5백 부가 팔렸다고 해도 효과로 보자면 사회의 운영에 대한 논의 방향을 바꿔놓은 점에서는 같은 가치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마흔 이후 독서는 인생의 반환점을 돈 이후의 독서이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했습니다. 지금 쓰고 계신 책도 나이에 따른 독서 이야기라고 하셨는데요.
그 책의 경우 약간의 장난기에서 시작된 책이었습니다. 요즘 어떤 책을 읽을 때 그 책이 씌었을 때 저자 나이가 몇 살인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그동안 읽어온 많은 훌륭한 양서들이 저자들이 지금 제 나이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쓴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중국 소설가 장아이링(張愛玲, 1920-1995) 같은 경우 훌륭한 작품은 전부 사십 대 이전에 썼고, 칼 마르크스도 30세에 <공산당 선언>을 썼으며, 그때 앵겔스는 스물여덟이었지요. 벤야민은 마흔 전에 자살했고.. 지금 제 나이에 비하면 훨씬 젊은 나이에 쓴 거지요. 지금 나이에 그런 작품들을 읽으면서 이 작가들은 어떻게 해서 그 젊은 나이에 책을 쓰게 됐는가, 생각을 하면서 책과의 대화를 나누게 됐습니다. 그랬더니 훨씬 더 면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습니다. 같은 책이라도 반복해서 읽으면 읽을 때마다 왜 이걸 못 읽었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번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읽는 시기에 따라, 내가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서도 느낌들이 달라집니다.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은 몇 번을 읽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습니다. 아내 주톈신도 그 책을 하도 많이 읽어서 줄줄 외울 정도입니다. 모든 책은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절판된 책이나 내 책만 다시 읽지 않을 뿐 다른 책은 다시 읽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백 년, 이백 년 전에 나온 책에서 정리를 다 해놓은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와서 현대의 사람들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 어떤 좌절감 같은 것도 느끼게 됩니다.
-본문 중에 대만 이야기를 하면서 '거대한 허무의 분위 속에서'라고 언급하셨더군요. 관련 표현 중에 '후발주자로서 계속 따라가면서 지금에 집착하는'이라는 표현도 있던데요, 한국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어느 사회나 얼마간 허무 현상이 있다고 봅니다. 인류는 지난 200년 동안 지식에 대해서 회의하면서 보내왔습니다. <끝(盡頭)>이라는 제 책이 출간된 다음에 중국 베이징 대학교의 초청을 받아서 '믿느냐, 안 믿느냐'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얘기한 것은 인류가 너무나 오랫동안 종교, 가정, 사랑 같은 것에 대해 너무나 쉽게 믿어 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200년 동안 인간이 만들고 익숙해진 가치들, 종교나 사랑 이런 것들에 대한 회의가 전 세계적으로 시작됐다는 거지요. 생산력은 고도로 발달했는데 개인의 삶의 질이 그만큼 올라갔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지금껏 인류의 성취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회의의 분위기에 빠져 있다는 것이고, 그걸 대만 사회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겁니다. 베이징 대학 강연 때 당시 청중의 반응은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 체제에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이른 주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더구나 중국은 한창 자신감에 차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회의나 허무 같은 주제는 수용되기 어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는 개인의 상처를 치유하거나 위로하는 책들이 많이 팔립니다. 이런 책 읽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질문의 의도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보듯 '심리적 상처'를 염두에 뒀는데, 전달되는 과정에서 '육체적 상처'로 이해된 듯했다. 그러나 중반 이후 답변은 결국 포괄적으로 이해가 된다.)
타이완도 그렇습니다. 의료는 당대 최대의 신화지요. 그리고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산업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우리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건강하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인간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건강이라고 말하지요. 과거에 우리는 정상적인 생각과 심리를 가졌었고 정상적으로 희로애락을 나타냈었습니다. 반드시 있어야 할 의혹과 풀어야 할 수수께끼들이 있었지요. 지금은 질병이 고정적인 명제가 되었습니다. 병이 있으니 당연히 의료가 필요하겠지요. 물론 대부분의 건강보조식품이나 양생식품은(이런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갈수록 많아지고 있지요.) 기본적으로 ‘무해’합니다. 그저 옥수수 전분에 비타민 등을 첨가한 것이지요. 그리고 아주 빨리 배출되기 때문에 신체에 남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남에게 관심 대상이 되고 이해되고, 남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골칫거리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마음이 놓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 문제도 없는 현상이고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독서와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심지어 저는 제가 좋아하는 책들을 약방이나 건강보조식품 상점에서 파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쩌면 곧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진정한 독서가라면 이처럼 자기 연민에는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수시로 거울에 자기 모습만 비춰보는 일도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세계가 너무 크니까요. 좀 무겁게 말하자면 진정한 독서가들에게는 남들에 대한 관심이 자신에 대한 관심을 훨씬 능가합니다. 원인은 너무 간단하지요. 인류의 역사는 영원히 더 큰 슬픔, 더 깊고 무거운 운명을 지니고 있는 데다, 정상적인 상태에도 늘 흐르고 기복하는 작은 애증의 물결보다는 더 많은 불의와 불공정함(不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 들어와 어떻게 자신의 이러한 ‘잊힐 수밖에 없는’(밀란 쿤데라의 말) 작은 일만 가지고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독서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민주 시민 육성을 위해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활동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즘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발달하면서 대중은 수동적이 돼가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마저 넘겨준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독서 인구의 감소는 포퓰리즘의 득세와도 관계가 있어 보이는데요.
토크빌은 이미 200년 전에 이런 일을 예견했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그의 신의 업적 같은 책에서 보편적인 평등의 원칙은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라고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지요.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아주 고귀하고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거기에는 역사적 대가가 있을 겁니다. 이 역사의 파도는 어떤 것들을 위협하거나 소멸시킬 수도 있지요. 자유나 독창성, 그리고 반드시 수직적인 위계로 세워졌을 때에만 위로 전달될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정교하고 깊이 있는 것들을 잃게 될 수 있는 겁니다. 토크빌은 자유보다는 평등에 훨씬 더 큰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는 인류에게 더 큰 기대를 가졌었지요. 자유와 평등, 박애를 같은 종류의 물건인 것처럼 한데 나열하던 대혁명의 시대에, 그는 미래에는 자유와 평등이 서로를 배반하고 방해하게 되리라는 점을 명철하게 간파해냈습니다. 결국, 인류의 사유 성과의 구성과 유산은 피라미드 형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평등한 것이지요. 집단 공약수의 절대적인 평등은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이 될 겁니다. 이 피라미드가 인간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려 최종적인 판단 기준이 되었을 때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평범함과 용속함(께느른한 편안함), 그리고 망각일 겁니다. 우리는 한 가지 한 가지씩 빠른 속도로 잊고 포기하게 될 겁니다. 일찍이 (개체로서의) 인간은 얼마나 좋았습니까? 보르헤스는 이런 과정을 ‘피곤한 인류 역사의 인력’이라고 표현했지요. 세상을 평이하게 만들고 날아다니는 모든 것들을 지면으로 끌어내리는 겁니다. 밀란 쿤데라의 말이 맞습니다. 인간에게는 더 이상 ‘먼 것이 없습니다.’
-읽고 쓰는 데 집중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루 일과는 어떤가요?
아침 9시에 보통 집을 나와서 커피숍에 갑니다. 책 읽기를 워낙 좋아해서 집에만 있으면 읽기만 하다가 글을 쓸 수가 없어 커피숍에 나와서 씁니다. 그래야 글 쓰기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커피숍을 이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집에만 있으면 너무 풀어지고 세상과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 수 있어서입니다. 나와서 걸어가고 하는 과정에서 세상과 내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줄곧 시내 용캉제에 있는 카페에서 글을 썼는데, 최근에 이 카페가 문을 닫아서 기분이 복잡한 심정입니다. 예전엔 그 카페를 오가면서 한국인이나 중국인 관광객이 늘어나는 것도 관찰하면서 지냈는데 아쉽습니다. 카페에 갈 때는 저와 아내, 아들, 세 명이 택시를 타고 갑니다.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서입니다. 오후에 책을 읽고 저녁에는 길고양이를 보살피기 위해 밖에 나갑니다. 한 시간 반 가량 9-10킬로미터 정도를 걷습니다. 다들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내가 걷기를 좋아해서 교토에 가서도 주로 많이 걷습니다. 차로 움직이는 것은 너무 빠르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스마트폰과 컴퓨터도 잘 쓰지 않습니다. 매주 수요일에는 방송사에 출근합니다. 자문역을 맡고 있는데, 그게 경제적으로는 고정 수입원입니다. '수요일'이라는 프로그램의 자문역입니다. 그래서 수요일 오후에는 약속을 안 잡습니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해외에 나갑니다. 중국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가지 않습니다. 중국도 한국도, 꼭 가야 할 의무가 생기면 당연히 거절하지 않고 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다 거절합니다. 대만 내에서는 인터뷰 같은 것도 다 거절하는 편입니다.
-인터넷도 안 쓰시나요?
집에 오래된 컴퓨터가 있긴 합니다. 인터넷은 필요한 자료를 찾을 때만 씁니다. 글도 손으로 종이에다 만년필로 씁니다. 아예 여러 개 갖고 다닙니다. 출판사에서 만들어준 전용 원고지에 씁니다. 하루에 보통 7천 자를 써서 5백 자 정도만 남깁니다.
-그동안 지적 편력을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대학에서는 역사를 전공했습니다. 부친은 건축학 교수였습니다. 다들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길 바랐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다닐 때 물리와 수학도 꽤 잘했습니다. 하지만 문과 이외 다른 쪽은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국립) 타이완 대학교에 입학해서 지금 제 아내인 추톈신과 학교에 다닐 때 허난청 선생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분이 저희한테 기본적으로 물리학과 경제학, 정치학을 뛰어넘도록 공부하라고 지도해주셔서 대학 내내 그렇게 공부를 했습니다. 대학 3학년이 된 다음 아내가 출산하기 전까지 10여 년 동안 매일 8시간에서 10시간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느낀 것은 제가 모르는 영역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년에서 1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내가 문자를 읽고는 있지만 뭘 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됐었습니다. 과거 경험을 보면 몇 번 그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 출간 준비 중인 책에도 정치, 경제에 관한 부분이 포함돼 있는데 경제 관련 부분을 쓰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경제는 읽을 수는 있었지만 쓰는 수준까지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년에서 1년을 거치면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러 영역과 분야를 넘나드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끝'이라는 제목의 두꺼운 책은 우리 세대의 현실에 대한 사색과 보고를 내용으로 하는데, 여러 가지를 다뤘습니다. 지금 이 시대 대만을 해석하는 책이기 때문에, 제대로 사회 현실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 분야 공부를 한다고 해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적 허영심에서 여러 분야를 공부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호기심에서 나온 겁니다. 공부는 폼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책은 어릴 때부터 무작정 좋았습니까?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20세 이전이라면 무작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는 가족이나 주변의 친구들에 비해 책을 많이 좋아하고 많이 읽은 편입니다. 이것이 성격 때문인지 부지불식간의 인연이나 기회에 따른 것인지는 분명하게 따지기 어렵습니다. 1968년 이전의 타이완의 상황은 아주 열악했습니다. 당시에는 다들 가난했지만 집집마다 너무 많은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누구나 하늘의 뜻에 따라 성장할 수밖에 없었지요. 책은 아주 적었고 진귀하게 느껴졌습니다. 모든 책이 다 빛을 발하면서 어떤 비밀스러운 세계를 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책을 한 권 펼쳐 읽기 시작할 때면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짜릿한 흥분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가장 기억나는 부분입니다. 20세가 되면서 저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삼삼집간(三三集刊)>이라는 문학잡지를 창간했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자신의 무지와 허약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진정한 독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6~8시간씩 쉬지 않고 책을 읽고 있습니다. 20세 이후 독서에는 책임감에 의해 억지로 읽는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경제학과 물리학, 수학 같은 것들은 원래 기초훈련밖에 갖추지 못했던 학문 영역이어서, 필요한데도 부족했던 부분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읽어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저는 이러한 공백을 제대로 메우지 않는다면 세상에 대한 견해가 온전하지 못해 편집증을 갖게 되거나 사물을 잘못 보고 말도 잘못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세계와 시대를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각 세대 사람들이 말을 하는 처지를 이해한 한나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저도 반드시 남겨야 할 말들을 남기려 애쓰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글 쓰는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책 읽기나 쓰기에 대해 심각한 회의나 고비에 처한 적은 없나요?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있었을 겁니다. 돌이켜보면 가장 큰 곤경은 경제학과 물리학, 수학 분야의 독서에 진입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이들 전문적인 학문은 자기 분야의 고유한 언어와 사유방식이 있는 데다 수천 년 동안 이미 너무 많은 것이 축적되어 있고 너무 많이 발전되어 있어 그 아성을 공격해 들어가는 데 반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책을 읽어봐도 부조리(absurd)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모든 글자는 다 알겠는데 합쳐 놓으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겁니다. 문자가 마치 비밀번호와 같아서 심지어 처음에는 자신의 뇌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는 걸 왜 나만 보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겠습니까? 따라서 독서의 가장 큰 곤경은 아마도 (독서에 따른 구체적인) 진전된 성과를 느끼기 어렵다는 것일 겁니다. 단기간의 목표를 세울 수 없다는 겁니다. 드넓은 우주에 그 어떤 지표도 없는 대지 위를 걷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읽는 동안 늘 자신이 전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는 못하는 겁니다. 반면에 컴퓨터를 갖고 하는 인터넷 게임은 인간의 능력을 수치로 보여주기 때문에 사흘 또는 1주일 후면 얼마든지 등급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서는 그런 식으로 수시로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목표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의기소침하게 됩니다. 저 자신의 독서 성과는 남들이 교훈으로 삼기에 부족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비교적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써낼 수 있었던 것은 45세 때였습니다. 그러니 45세는 제 글쓰기의 원년입니다. 저의 진정한 첫 번째 책이 완성된 날은 제가 진정한 독서를 시작한 때로부터 25년이 지난 시점이었지요. 꽤 오랜 세월이 지난 셈입니다. 저는 자신의 독서 성과를 수시로 가능해보는 행위는 오히려 자신을 독서의 세계로부터 더 멀어지게 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가 일종의 습관, 생활의 한 부분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식사를 하고 나면 양치질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에는 다소 강제성이나 자기기만의 요소가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바스카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평생 자신의 미신으로 도박을 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든 좋습니다. 독서가 하나의 습관적 행위가 되기만 하면 됩니다.
-책 읽기가 훈련이나 교육에 의해 계발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어느 정도 교육과 훈련이 필요할 겁니다. 각자의 개성과 자유를 강조하고 (그러는 가운데 은근히 허무와 태만을 강조하는) 오늘날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다소 시공에 적합하지 않게 들릴 수도 있겠지요. 자유주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아버지의 ‘교육’과 ‘훈련’ 덕분에 훌륭한 사상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는 인류 역사상 20세 이전에 가장 많은 책을 읽었고 기초 훈련도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무서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지요. 물론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 정신쇠약이라는 대가를 치르기도 했지요. 단지 좋은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잘 가지고 놀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책을 통해 전수되는) 인류의 사유의 성과는 놀이의 맥락이나 방식으로 볼 때, 결국 장중하고 엄숙하며 심오한 면을 갖게 됩니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이런 경향은 더합니다. 플라톤도 가장 이야기하기 좋은 것은 길의 맨 끝에만 드러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인내심 있게 따라가 봐야 한다는 뜻이다.) 독서라는 것은 늘 강제적인 요소를 동반합니다. ‘강제’라는 뜻의 중국어 ‘勉強’은 일본어에서는 ‘열심히 공부하다’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독서란 적절하게 자신을 강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책은 이미 너무나 많고 하루가 다르게 신간도 쏟아집니다. 어떻게 골라 읽는지요? 나름의 방법이 있나요? 동서양 책은 안배를 해서 읽나요?
비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독서가 그 사람을 이끌어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는 필요에 따른 것이지요. 필요가 우리에게 그때그때 시기에 맞는 책을 고르게 합니다. 또는 감상(鑑賞)에 의한 것도 있습니다. 감상은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렵고 완전하게 정리하기도 어려운 일종의 총제적인 안목, 총체적인 변별 및 판단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철학자 칸트는 만년에 줄곧 '감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표현하고 싶어 했습니다. 감상에 충분히 명징한 이성적 기초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성공하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칸트는 인간의 가장 높고, 깊고, 정교하고, 훌륭한 어떤 것들이 감상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고 굳게 믿었지요. 저 자신도 한때 "당신이 읽을 그다음 책은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책 안에 있다"고 상당히 드라마틱하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책은 같은 유형의 다른 책들을 불러 서로 호흡하고 해석합니다. 이 미세하지만 믿을 만한 목소리를 우리는 믿고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작가이기보다 독서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지요. 읽기와 쓰기는 상호 순환하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읽기에서 쓰기로 발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까요?
칼비노도 그렇게 말했고 보르헤스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작가보다 독자가 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고 좋다고 말입니다. 보르헤스는 “나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아름다운 책을 전부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작가로서는) 그저 내가 쓸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것들만 쓸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서는 결국 한쪽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수확이자 주입입니다. 독서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 어딘가가 ‘가득 차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때문에 할 말이 있게 되고 감정을 확정할 수 있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유하고 토론하면서 동반자들을 찾게 되는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서를 글쓰기로 인도하게 되지요. 이런 생각도 합니다. 나는 계속 얻기만 하고 주지는 못하는 걸까? 이건 너무 이기적인 태도가 아닐까? 인류의 총체적인 사유와 글쓰기의 성과는 커다란 연못이라고 하 수 있습니다. (저는 한때 이를 바다라고 표현한 적도 있습니다만 점차 줄여서 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계속해서 축소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임의로 가져갈 수 있지요. 모든 글쓰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먼저, 그리고 반드시 독자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글쓰기는 사실 '상환(되갚음)'일 뿐입니다. (글을 쓴 후) 여러 해가 지나 자신이 가난해질 때 도로 가져갈 수 있지요. 취득과 상환의 질과 양으로 보자면, 그래도 우리는 영원히 유리한 쪽에 있지요. 거저먹는 셈입니다.
-부인이 대만 최고의 작가(대만의 '프랑수아즈 사강'이라 불렸다)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래서 어려운 점은 없나요? (그는 애처가로 유명하다. 매일 같이 카페로 가서 책을 읽는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다소 짓궂은 질문을 던져본 것인데 감동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저의 곤경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선의에서 비롯됩니다. 사람들은 줄곧 저의 생활 상태를 동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게 있을 것 같은 수많은 곤경을 생각해내지요. 마치 제가 지혜롭지 못해서 연옥에 들어가는 것 같은 결혼을 선택하기라도 한 듯이 말입니다. 사실 진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제 아내 주톈신을 정말 좋아합니다. 제가 그녀를 안 건 40년 전의 일이고 결혼한 것은 30년 전의 일입니다. 30년의 시간 동안 서로 가리는 것 하나 없이 살았지요. (우리는 서로에게 감추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책을 읽고 대화하고 저항해야 할 모든 것에 함께 저항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렇게 그녀를 좋아합니다. 정확히 말해서 주위의 친구들이 제가 엄처 밑에서 살고 있고 그 엄혹한 인성의 기준이 갈수록 더해간다고 생각한다 해도 주텐신은 여전히 제가 좋아할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저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까지 훌륭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쩌면 저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도 있지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녀가 대단히 훌륭한 작가라는 겁니다. 게다가 그녀는 정이 깊고 민감하며 정의감이 넘치고 사소한 일들까지 전부 기억하다 보니 수시로 곤경에 빠지는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그녀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다 합니다. 종종, 제가 감히 그녀를 위로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녀의 독특한 생명의 곤경 때문이지요. 이것이 바로 그녀의 글쓰기의 가장 깊이 있는 부분일 겁니다. 나는 그것을 소멸시키는 모험을 할 자신이 없습니다.
-두 사람이 일본 교토를 자주 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교토는 제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도시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도시는 런던 (음식만 제외하고)이지요. 하지만 런던은 너무 멀고 비용도 많이 듭니다.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지요. 여러 해가 지나면서 교토는 이미 또 다른 생활 거점이 되었습니다. 교토에 가는 것이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게다가 항상 1, 2년의 시차를 두고 가기 때문에 그 미세한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어느 거리와 길모퉁이에서 상점과 사람들의 표정, 복장과 행동거지까지 시간의 거미줄 같은 흔적을 느낄 수 있지요. 저항자들이 많든 적든 간에 결국 이렇게 기적처럼 남는 곳을 두고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거나 혹은 이데올로기의 힘 탓이라고 여기게 되지요. 그런 교토를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상태로 봅니다. 그러면 약간의 용기를 얻게 되지요. 아름다운 것을 믿을 수 있는 용기, 아름다운 것을 위해 설명하고 변호하고 논쟁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겁니다. 저는 그런 용기가 일상생활 속에서 줄곧 유실되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혹시 한국 문학이나 책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나요?
죄송합니다만 저는 한국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중국어로 번역된 책만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타이완에서의 한국문학 번역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문학과 책에 대한 저의 이해는 말할 만한 수준이 못됩니다.
-최근에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을 무엇인지, 어떤 책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최근에 읽은 책은 젊었을 때의 친구인 창칭(常青)이 쓴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如何老去)>라는 책입니다. 저자는 의학박사이고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연봉이 100만 위안(약 16억 5천만 원)이나 되는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사직했습니다. 시대 전체에 역행하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창칭의 책은 ‘몸통이 있는’ 글쓰기입니다. 그녀의 글쓰기는 착실하고 민첩한 의학 훈련과 경험을 튼튼한 밑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다국적적인 독서와 인문학적 수양 또한 대단히 놀라운 수준이지요. 이런 글쓰기의 준비는 대단히 드뭅니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아마 오히려 불리할 겁니다. 세상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을 여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녀의 글이 집단 공약수에 해당하는 요구를 훨씬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독자들의 심성과 수준에는 너무 큰 도전이 되지요. 동시에 이런 태도가 그녀를 너무나 이성적이고 완벽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글쓰기는 너무나 신중하지요. 이런 글쓰기는 조금 늦게 꽃을 피웁니다. 아주 오랜 시간 갖가지 의혹과 공격을 이겨낸 작가들이 다 그렇지요. 글쓰기는 일생의 의지가 담긴 작업이지 젊은 시절에 불꽃놀이처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저는 대단히 진지한 기다림으로 이 책을 읽어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쓰고 있거나 준비하는 책이 있나요?
<마르케스의 서재에서>가 출간된 후 어떤 독자들은 왜 예전처럼 NBA나 추리소설 같은 것을 쓰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책 읽기라는 주제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고, 독자의 신분을 제일 좋아하고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독자로서 책을 쓸 것 같습니다. 지금 신간을 준비하고 있는데, 나이와 읽기, 글쓰기에 관한 책입니다. 저도 곧 60세에 들어서게 되는데, 60세라고 하면 노년에 들어서고 죽음에 가까워지는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에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 인생의 변화 속에서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저의 생각은 어떻게 변하는지 새 책에 담으려고 쓰고 있습니다. 얼마 전 뉴스에 한국 여성의 평균 연령이 일본을 초과할 정도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고령화 사회로 가는 상황 속에서 제 인생에서 책 읽기는 계속해서 중요한 키워드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독서는 계속되는 저의 글쓰기의 가장 적절한 주제이고, '마르케스의 서재에서'에도 이미 나이와 독서와 글쓰기, 세 가지 요소에 대한 생각이 얼마간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