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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Jan 08. 2022

작가라는 사람

[오늘의 한 단락] 로베르트 발저의 '작가'

[편집자 ] 요즘 가장 깊은 영감을 주는 인물은 로베르트 발저다. 평생 집도 가구도 없이 가난하게 살았다고 전해지는 작가. 그것을 부끄럽지 않게 생각했던 작가.  산책과 관찰을 좋아하고,  나는 대로 아무 종이에나 연필로 깨알같이  글씨로 글쓰기를 끝끝내 이어간 작가.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일기인지 독백인지 아니면  무엇인지도 모를 형식의 글을  내려간 작가. 그가 생각하는 작가는 무엇이었나. 어쩌면 자신의 모습에 대한 연민과 자부심이 교차하는 그의 작디작은 단편 '작가'에서 발췌했다.


작가는 대개 옷을 두 벌 가지고 있다. 하나는 외출하고 어딘가를 방문할 때 입는 옷이고, 다른 옷은 일할 때 입는 옷이다. 그는 보통 사람으로, 책상 앞에 앉으면 겸손해진다. 그는 인생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필요한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좋은 옷을 얼른 벗어 바지와 상의를 당연스럽게 깔끔해 정리해서 옷장에 걸고, 작업복과 실내화로 바꾼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서 차를 준비하고, 평상시의 일을 시작한다. 일하는 동안 그는 항상 차를 마시는데, 그것은 그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건강을 유지하게 해 주고, 그의 생각에 의하면 모든 세상의 다른 즐거움을 보상해 준다.


그는 미혼인데, 왜냐하면 필요한 모든 용기를 자신에게 주어진 예술가의 의무에 다 써야 하는 까닭에, 사랑에 빠질 용기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려진 바대로 예술가의 의무는 성실하게 수행하기가 매우 힘들어 보인다. 쉴 때 여자 친구가 도와주거나 일할 때 보이지 않는 수호신이 도와주는 것을 제외하면, 통상적으로 그는 집안일을 혼자서 한다. 내면의 신념에 따르면 특별히 즐겁지도 아주 슬프지도 않고,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고, 단조롭지도 변화무쌍하지도 않고, 지속적인 여흥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흥이 중단된 것도 아니고, 고통스러운 비명도 계속되는 환한 미소도 아니다. 그는 창조한다. 그것이 그의 삶이다.


그는 정확한 사람이다. 직업이 그렇게 하도록 그에게 명하는데, 태만하고 무질서하면 하루 종일 책상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삶을 문자로 그려 내려는 소원과 열정은 문자의 세밀함과 마음의 섬세함과 꼼꼼한 마음에서만 나온다. 세상의 수많은 아름다운 것, 스쳐 가는 것, 덧없는 것들을 공책에다 붙잡아 두지 못하면 후딱 날아가 버리는 꼴을 봐야만 하는, 그 고통을 감수하는 마음이다. 정말이지 걱정은 끝이 없다. 손에 펜을 든 사람은 이른바 어스름 속의 인물로, 그의 행동이 영웅적이지도 고결하지도 못한 것은 세상과 직접 대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유 없이 '문필가'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 그건 평범한 것에 대한 평범한 표현에 불과하지만, 소방대원도 특수한 상황에서만 영웅이고 생명의 구원자라는 점을 도외시한다면, 소방대원 역시 평범할 뿐이다. 때로 어린 아이나 혹은 목숨이 위태로운 어떤 사람을 어느 용감한 사람이 흐르는 강물에서 구하듯이, 예술이나 작가의 희생적인 노력에서도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난다. 작가는 무작정 정신없이, 익사해서 파멸할 수도 있는데도, 소설이나 노벨레를 쓰느라고 열 시간에서 열세 시간 동안 책상 앞에서 버틴다. 건강이 나쁜데도 불구하고, 건강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흐르는 삶의 강물에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건져 낸다. 그러므로 작가는 용감하고 대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특이한 생각으로 대충 스무 명의 사람들을 미친 듯이 웃게 만들 수 있고, 아주 쉽게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자신이 쓴 시를 그냥 낭독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울게 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그의 책이 시장에 나오게 되면 어떤가! 그는 옥탑방에 조용히 앉아서 온 세상이 달려가리라고, 멋지게 제본하고 종종 갈색 가죽에 인쇄한 자신의 책으로 몰려들 것이라고 상상한다. 표지에는 그의 이름이 박혀 있는데, 소박한 그의 생각에 의하면 그것이 이 둥글고 넓은 세상 곳곳에 자신을 알릴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환멸이, 신문에는 질책이, 죽음으로 모는 야유가, 묘지로 이끄는 침묵이 이어진다. 우리의 주인공은 그것을 꿋꿋이 인내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원고지를 전부 없애고, 책상을 날아갈 정도로 무섭게 가격하고, 쓰다 만 소설을 찢어 버리고, 집필 재료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열린 창밖으로 여벌의 펜을 내던지고, 출판사에다 "선생님, 부탁컨대 이제 나를 믿지 마십시오."라고 쓰고 방랑의 길을 떠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분노와 수치심을 얼마 후에는 우스꽝스러운 것이라 생각하며, 새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의무이자 책무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른다. 어떤 사람은 이렇고, 다른 사람은 명암이 좀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천부적인 작가는 결코 용기를 잃지 않는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새로운 아침이 매일 그에게 제공하는 수천 가지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 거의 끝없는 신뢰를 가지고 있다.


그는 갖가지 절망을 알고 있지만, 또한 갖가지 행복감도 알고 있다. 특이한 점은 실패보다는 성공이 그로 하여금 스스로를 더 불신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마 그것은 단지 그의 사고 기계가 계속 움직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작가가 돈을 벌고, 많이 번 돈을 즐기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에 질투와 조소의 독화살을 가능한 한 피하기 위해 겸손하게 처신한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태도다. 하지만 그가 가난하고 무시받으며 근근이 산다면, 눅눅하고 추운 방에서, 탁자 위와 접시 위로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곳에서, 밀짚 침대에서, 온 집구석에 황량한 소음과 비명이 가득한 집에서, 완전히 혼자 외롭게 길을 다니고, 떨어지는 비를 맞아 축축하게 젖어 있고, 그가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는지 똑똑한 사람 어느 누구도 그에게 허락하지 않는 생활비를 구하면서, 대도시를 달구는 태양의 열기 아래로, 형편없는 방이 즐비한 숙박소에서, 소란스러운 동네에서 혹은 이름은 꽤 멋있지만 친절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은 수용소에서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그는 이런 불행을 피할 수 있는가?


하지만 작가는 위험을 견뎌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그것을 견뎌 내는가 하는 건 모든 악조건에 적응하는 그의 천재성에 달려 있다. 작가는 세상을 사랑하는데, 왜냐하면 세상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면, 이미 세상의 후손이 아니라고 느끼는 까닭이다. 이 경우에 그 역시 대개 보통의 작가일 뿐인데, 그는 그것을 명확하게 느끼고, 그래서 삶에게 불쾌한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종종 그를 무비판적인, 우매한 몽상가로 본다. 조롱이나 증오의 감정이 창작 의욕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작가가 그런 감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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