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새의 선물
라는 질문이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다 읽자마자 떠올랐다.
열두살이란 어른들에게 어떠한 아이로 비춰지는가. 그 숫자가 어떠한 의미를 우리에게 주는가. 단편적이다. 어리지만 저학년은 아니기에 마냥 아주 어리다고는 볼 수 없는. 그러나 우리가 어딘가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할 때 마주하는 '만 14세 미만' 등의 약관을 떠올리면, 아직은 어린편에 속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나의 그 시절은, '애어른'으로 묘사되는 소설속 주인공 화자와 닮아 있었다. 어른들의 세계를 아직 다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그렇다고 또래 아이들과 같이 있자니 유치하단 생각이 들곤했다. 이 아이들은 나보다는 어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고, 대화가 잘 통화는 상대들은 나보다는 몇 살 위인 사람들일 것이라고.
그러나 이러한 내 마음을 솔직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진 않았다. 이를 밝히게 되는 순간 친구들은 애어른같은 아이를 별나다고 볼 게 뻔하고, 어른들에게는 미성숙하고 계속 돌봄이 필요한 것처럼 모자라게 행동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 안심을 준다는 것도 깨달아버렸기 때문이다. 괜시리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섣불리 행동을, 그러한 이미지가 고착화되길 원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린시절부터 내가 일찍이 성인이 되기를 꿈꾸었다. 할 순 있지만 어린 나이에 하기엔 금기된 것처럼 여기는 것들을 빨리 하고 싶었다.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번다던가, 한국과는 다른 문화에서 나고 자란 외국인과 친구를 맺는다던가, 어른을 흉내내는 10대의 어설픈 연애가 아니라 진짜 서로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랑을 해본다던가. 10대와 20대의 획을 철저히 절단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만 14세 약관이 아니라, 만 19세 약관을 이젠 기준점으로 삼는 것.
사실 글을 쓰는 행위라는 것이 그런 것 같다. 성숙해지는 '듯한' 느낌을 들게한다. 그래서 그 행위를 어릴 때부터 시작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혼자만의 외로움을 달래는 행위의 한 축이 되어버렸다면 더욱 그렇다. 생각도 마찬가지. 결국에는 생각과 생각과 끊임없는 생각들이 머리에만 떠다니다 글에서 배설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작점을 생각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앞단에 위치하는 영역은 관찰이다. 사람을 뚫어지게 관찰하다보면, 그 사람의 행위라던가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라던가 성격을 파악하게 된다. 이를 관찰하며 내 생각이라는게 떠오르게 되고, 이를 글로 남기는 것.
모든 글에는 일종의 자기확언이 담겨져 있다. 쓰다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내 사상과 생각이 묻어나기 쉬운데, 글을 쓴다는 행위가 이를 보증 서 주는 것처럼 내 의지와 의견을 확언해준다. 이것이 확언과 비슷함을 깨달은 것은 근래이긴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이 행위를 정말 어려서부터 시작했던 셈이다. 관찰, 생각, 글.
이 3가지 흐름에는 타인을 낄 수도 있고, 타인을 배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외로움을 달래는 행위 중 하나가 내게는 글쓰기였으므로, 굳이 나는 그 영역에 타인을 껴놓지 않았다. <새의 선물>에 나오는 주인공이 열두살을 회상하며 이야기하는 글에서 나는 그 감정을 느꼈다. 이 아이는 그때 외로웠다고.
어른들의 사정과 세상이 굉장히 복잡하다고 엿보게 된 것은, 생각해보니 나도 주인공과 동일했던 열두살이었을 때였다. 그 시절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책을 그렇게 많이 읽어본 해일테니까. TV 홈쇼핑이었나, 현대문학전집을 엄마가 질렀던 게 생각나고 그게 내 방 책장에 들어왔다. 당시 겨울방학에 나는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방학수업을 들으러 가기 전에 짬을내어 1일 1독서를 했다.
한국인의 소설에는 왜 이리 한이 많을까. 그 생각도 했었다. 일제강점기, 전쟁, 해방 이후 등등 시대상을 반영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어른들의 유형은 굉장히 다양했다. 그런데 다양하면서도 결국엔 어느정도 레퍼토리가 비슷했다. 망나니 같은 캐릭터, 한숨을 쉬며 비관적인 삶에 순응하며 사는 캐릭터, 죽을 각오를 하고 본인의 의지를 내비치는 캐릭터, 사랑에 목숨을 거는 캐릭터, 어릴때부터 병을 앓아 결국은 죽고마는 캐릭터... 특히나 당시에는 대가족, 여러 세대가 한 집안에 모여 사는 내용을 주제로 한 소설이 많았기에, 한지붕 아래 같이 산다는 게 무엇인가- 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살면, 저러한 캐릭터들이 어느 정도 정해져있구나. 저 시대 사람들은 저런 마음가짐을 많이 했었구나.
그리고 다시 앞을 돌아보아 우리 가족, 돌다리를 좀 더 건너 들어본 다른 가족의 이야기를 실제로 듣다보면 사실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비극과 희극은 내가 말한 나이처럼 절단이 정확히 가능한 부분이 아닐 뿐더러, 그렇기에 선과 악이라는 것, 좋고 나쁘다는 것은 매번 우연히 나타나 한 사람을, 한 집안을 휘감았다 놓았다 한다는 것.
주인공도 그 시절 삼촌의 방에 있는 책을 죄다 독파하며 몰랐던 어른들의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다.
인간들을 많이 관찰한 만큼,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퍼즐을 갖고 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여기서 딜레마에 빠진다. 저 문장처럼, 반대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본질의 나를 숨기며 내가 살았던가? 생각하지만, 난 정말로 나의 본질이란 게 무엇인지 모른다. 내가 날 이해하지 못하기에 남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닌지에 도달해보지만, 애초에 내가 나를 이해하는 게 가능한가? 라는 물음이 오히려 되돌아온다.
그러나 참 쓸데없는 질문이 되어버렸다. 사실 나는 남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한다. 이해하려 노력했던 것이 아닌데, 그냥 관찰만 했을 뿐인데 상대의 표정과 행동과 말에서 짐작되는 힌트들이 너무 많기에. 그것이 그냥 이해가 되어버리고 말아서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주인공은 왜 삶을 농담이라 했을까. 이유는 앞문장에 써있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가니까. 논리적이고, 맥락이 분명하고, 대단한 것들은 삶을 이끌어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삶을 이끌 수 있다고 인간이 어리석게 믿는 순간, 고통이 시작된다고 본다.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는 것도 결국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뜻과도 같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문학의 묘미이자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실제 삶에 이 원리를 들이대면 견뎌내야할 후폭풍이 너무나도 많다. 내가 부여한 의미만큼, 잘 따라주지 않는 게 삶이니까. 인간을 가스라이팅하는 게 가능할지는 몰라도, 삶을 가스라이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것이 한순간의 농담임을 깨닫는게 허무하다는 고통을 줄 순 있으나, 이 허무함은 제 뜻대로 되지 않아 겪게되는 고통보다는 덜 아프다.
소설의 마지막 장 쯔음 다다라서, 서른여덟이 된 주인공이 말하는 본인의 습관.
시선을 두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눈이라는 기관을 이용해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조정할 순 있지만, 본다는 것에는 그 이상의 해석이 가능하다.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볼 수도 있고,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볼 수도 있고, 본다는 행위자체에 의미를 둘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인공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으면서 시선을 둔다고 묘사한다. 즉, 남들이 보았을 때 '이 사람이 날 보네'라는 인식을 주긴 하나, 실상 그녀는 상대에게 그만큼의 해석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녀가 어릴때부터 본인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컸기 때문일까.
삶이 농담이 아니길 바라며 집착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그래도, 적어도, 이렇게 태어난 것에는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하며. 없다면 내가 이를 창조하거나, 일구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게 아닐까하면서. 그러나 내가 창조하고 있던 것은 존재의 증명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창조되는 것은 고(苦)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를 조용히 관찰했다. 왜 노력하는 것에는 고통이 따를까.
여러 소설, 종교 서적, 과학책을 읽으며 깨달은 답은 '낙'도 분명히 존재하나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고보다는 미미하다는 점이었다. 긍정 뒤에 부정이 따르면 부정만이 전부였던 것처럼 치부하고, 부정 뒤에 긍정이 따르면 행복해하나 그것이 찰나임을 인지하고 언제든 고에 의해 깨부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해진다는 것.
그래서 나름대로 내가 생각한 대처법은, 어쩌면 주인공처럼 곧 습관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행위 그 자체였다.
사람이던, 사물이던 무언가를 대할때 뚫어져라 시선은 주지만 그것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내 삶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애정이 각별한 것들은 보려고 노력하지만 어린시절처럼 감정을 내세우면서까지 보려하진 않는다. 행복과 고통을 번갈아 느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생에 지쳤는지도 모른다. 그런 감정을 소모하며 살 수 있는 에너지가 무한대로 생성될수는 없음을 알아서일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글을 써내려가다보니 결국 나도 습관이었음을 깨달았다. 무엇이든 보고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보는 것 뿐인 '나'를 바라본적도 셀 수 없이 많았었던 것 같아서. 가끔 기민한 어른들은 이러한 나를 또 다시 바라봄으로써,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간파한다. 물론 살면서 이를 간파당한적은 손에 꼽는다. 그럴때면 당황스럽긴하지만, 그럴때일수록 더 눈치없이 해맑은 어린이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한다. 조금만 날 더 간파하면, 내 내면을 이해한 첫번째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면서도 고통 같은 것이 피어난다. 한없이 냉소적으로 보이기만 하는 주인공도, 열두살에서 서른여덟이 되기까지 한번쯤은 이러한 기대를 품에 안고 살아가지 않았을까.
진희의 독백처럼 여전히 이 세상엔 기적도 없고, 하찮은 것이 삶을 이끌어가고, 사랑은 여전히 배신에서부터 시작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