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축사
나에겐 정말 소중한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있다. 거의 인생의 절반 가량을 알아온 친구들인데, 오래도록 함께 지내면서도 크게 싸워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다들 성격이 둥글둥글하고, 나보다 어른스러워서 이 친구들이랑 같이 있으면 주로 나는 철없는 농담을 하는 편이고 친구들은 어이 없다는 듯 웃어주곤 한다. 우리는 한창 때에도 맥도날드에서 콜라를 마시면서 건전하게 놀던 친구들이라 우리끼리 논다고 하면 아무리 늦어도 엄마들이 걱정하지 않으실 정도고, 우리들의 별명은 엄마들 사이에서도 통용된다. '싸피, 팅코, 곱단이, 띨구'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몇 년이 지나 서로 다른 곳에 살며 다른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처음 만났던 그때 그대로 자주 연락하며 서로의 시간을 공유한다. 이 친구들이랑 대화를 하면 나이를 잊게 된다. 우리는 여전히 고등학교 수학여행에서 한 친구가 한라산에서 포대를 타고 내려오다가 동급생이었던 어떤 남자 애 다리 사이를 통과했던 이야기를 하고, 야자 시간에 시켜먹었던 눈물 맛 닭꼬치 이야기, 개구리를 보러 갔다가 걸려서 개구리 자세로 벌을 받았던 이야기를 한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친구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어른이 된 지금도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맘편히 꺼내곤 한다. 이 친구들과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지만 오늘은 이 친구들 중 한 명의 결혼식이 있었기에 그 친구에게 축사를 선물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원래 약속을 했었던 건지는 모르겠는데, 매번 결혼식이 있을 때마다 나머지 친구들에게 미션이 주어진다. 아마 고등학교 때부터 '우리 중에 누가 결혼하면 누가 드럼 치고, 누가 노래부르고, 누가 춤추자.'이런 농담을 했었는데 그 말이 잊혀지지 않고 남아 이렇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결혼을 하는 친구가 음악을 고르면, (드문드문) 한 달 정도 연습을 해서 축가를 불러주는 프로젝트성 그룹으로 한동안 활동했다. 한번은 일세대 걸그룹 핑클이 되었다가, 한번은 핫하디 핫한 비티에스가 되었다가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나이도 점점 먹고, 코로나때문에 함께 모여서 연습하는 게 여의치 않자, 올해부터는 축사를 하게 되었다. (내 결혼식엔 흑역사를 더 추가할 겸 다시 축가로 해달라고 해야하나?)
오늘이 두 번째 축사였는데, 우리는 축사도 팀이 되어 함께 준비했다. 일단 내가 초고를 쓰면(나는 발표 울렁증이 심해서 초고쓰기를 자원한다) 팅코가 한번 첨삭을 해주고, 나머지 친구들이 검토를 하고, 곱단이가 나가서 읽으면, 다른 친구가 촬영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 나는 긴장을 많이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과몰입형 인간이라서 친구들 결혼식에서 꼭 운다. 울지 않으려고 친구가 알려준 '링딩동'을 속으로 되뇌이지만 어느 순간 울고 있다. 그래서 나는 초고쓰기가 나에게 굉장히 잘 맞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는데, 처음에 나도 어떻게 써야하는지 몰라 관련된 글도 찾아보고, 유튜브 영상도 봤다. 그런데 이제 두 번째로 준비하는 축사다보니 제법 적응해서 안정적으로 준비하게 되었다.
(혹시 저처럼 소중한 친구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으신 분이라면 참고하세요. 하나의 팁이라면 최대한 눈물을 주의하면서 적어야 합니다! 담담하게 적어도 막상 읽다보면 눈물이 나더라구요)
안녕하세요?
힘든 시기에도 오늘 결혼식에 참석해주신 하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드립니다.
저는 사랑스런 신부 @@@ 양의 @@년 지기 친구 @@@을 대표하여 나온 @@@입니다.
두 사람이 새로운 인생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 뜻깊고 소중한 자리에, 축하의 마음을 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는 고등학교 시절, 언제나, 당연히 체육 부장을 맡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남달랐습니다. 그때부터 기른 체력 덕분에 일을 하면서도 모임 활동을 하면서 친구들과 만나길 좋아하는 핵인싸입니다. 그러던 @@이가 작년 여름 소모임에 가게 되었고, 거기서 소고기를 기가 막히게 잘 굽는 @@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씨의 늘 한결같은 모습과 일도 살림도 모두 잘 하는 모습에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도 잘 웃는 밝은 @@이지만,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더 많이 웃고 행복할 수 있게 해 준 신랑 @@씨에게 마음을 담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씨,
@@이는 @@씨가 정말 따뜻하고 밝은 사람이래요.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저희가 아는 @@이도 정말 따뜻하고 밝은 친구입니다. 오늘 서로의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참 많이 닮아있습니다.
좋은 일이든 힘든 일이든 함께 나눌 줄 알고, 서로의 다름을 현명하게 맞추어갈 줄 아는 두 사람이 소중한 단짝이 되어 이제는 평생을 함께 할 좋은 동반자가 되려고 합니다.
결혼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고 합니다. 사소한 일상을 나누며 함께하는 시간만큼 더 많이 사랑하고, 늘 서로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려는 마음을 가진 부부가 되길 바랍니다.
@@아,
우리가 종알종알 수다떨던 @@고등학교 1학년 12반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누구보다 아름다운 오월의 신부가 된 너를 보니 정말 기뻐.
@@년 동안 함께 웃고 공감할 수 있는 너라는 친구를 만난 우리는 참 행운인 거 같아.
이번엔 우리가 너에게 이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앞으로 두 사람의 새로운 인생에 따뜻한 순간들만 가득하길 바라며, 시를 한 편 준비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두 분께 정연복 시인의 ‘햇살’을 선물하며 축사를 마치겠습니다.
긴 세월 쌓인
그리움의 끝에서 만난
참 귀하고 아름다운 당신
혹한에 몸서리쳤을
야윈 가지마다 포근히 내려앉은 따순 햇살 있어
나목(裸木)은 쓸쓸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가난하여도
사랑은 찬란하고 복된 것
한 세상 살아가면서
굳이 자랑할 것 하나 있다면
우리의 목숨 지는 그 날까지
기쁜 날이나 슬픈 날에도
한결같은 사랑이기를 바랍니다.
드넓은 세상의
한 점 작은 우리의 사랑이겠지만
사랑으로 우리는
한줄기 따스한 햇살이 되어
세상을 밝게 비출 것입니다.
2020년 5월 31일 따스한 햇살처럼 행복하게 살아갈 두 사람의 아름다운 결혼을 축하합니다.
결혼 축하해, 오월의 신부 띨구!
우리 늘, 지금처럼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자!
참고로 박미라 시인의 '아름다운 날에 부치다'도 축시로 반응이 좋았어요.
(결혼식 분위기에 어울리는 부분만 활용했습니다)
멀리 있었으나 서로의 빛을 바라볼 줄 알았고
어두웠으나 서로에게 다가갈 줄 알아
오늘 드디어 두 손을 잡는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동행임을 아는 두 사람은
잡은 손을 놓지 않되 함부로 잡아끌지 않을 것이며
서로의 두 눈을 고요히 바라보아
말하지 않아도 같은 쪽으로 걸어가리라
수채화처럼 아련히 번지는 꿈의 조각들이
거짓말처럼 들어맞을 때
두 사람은 비로소 행복에 대해 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