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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나 Pina Nov 25. 2023

아무 계획도 없기를 계획하기

 뜻하지 않게 2주 정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이전 회사와 새로운 회사 사이 이동에서 생기는 짧은 공백. 여행을 갈 수도 있었지만 이미 두 달 전엔 런던을 다녀왔고 딱히 이 시기의 여행을 계획하지도 않았던 터라 다시 마음먹고 떠날 곳은 떠오르지 않았다. 또 그렇다고 해서, 하고 싶은 일이나 계획들을 촘촘히 짜놓고 하나씩 해치우며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만큼은 좀, 쉬고 싶었다. 딱 2주 동안만 아무것도 안 하며 시간을 보내기.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 재충전을 해두면 내년을 더 기쁘게 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주말 이틀은 잘 수 있을 만큼 잤다. 맞춰둔 알람 소리에 억지로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게 행복했다. 피곤해서 잠을 깨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 여유 시간이 생기니 아침은 시리얼로 대충 먹고, 오후엔 용기를 챙겨나가 먹고 싶은 음식을 사다 먹었다. 아직 나에겐 시간이 있고 이 흐름에 맡기다 보면 자연스레 2주가 지나있겠지.




 초반의 기대와는 다르게 며칠 후 갑자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어제와 같이 충분히 자고 일어났는데 이렇게 시리얼을 먹고 난 뒤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심지어 쉬는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생각을 거부하는 느낌이랄까, 그대로 눈만 뜬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동자를 굴리다 보니 급기야 자책감이 밀려왔다. 갑자기 생긴 자유로운 시간을 이렇게 허둥대면서 보내고 있구나. 쉬기로 한 결심이 무색하게 마음은 복잡해져 왔다.



 일이라는 것을 시작하고 나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짜여진 대로 보내왔다. 내가 결정하지 않은 일들이 넘어오고, 또 나의 결정이 담긴 일이라 해도 어떤 이유와 근거들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진행할 수 없다. 그런 일들을 처리하며 보내는 대부분의 낮 시간과 지친 저녁 시간, 또 나름의 일들을 고민하며 보냈던 주말. 그러다 갑자기 많은 자유가 주어지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생긴 자유로운 시간이 불안했다. 조금 뒤 정신을 차려 의미 없이 할 일 목록을 쓰고 고치면서도 주어진 시간을 쓰는데 내 자신이 얼마 정도의 권한을 갖고 있었나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보내는 대부분의 쉬는 시간도, 나의 뜻과 상관없이 많은 것들에 의해 침범당한다. 유튜브라도 잠깐 켜 놓는다 치면 여기저기 알고리즘과 쇼츠의 파도를 타다 흘러버린 시간에 놀라고. 인스타그램에 오랜만에 들어갔다가 끊임없이 새로고침을 하는 걸 발견한다. 또 자기 전엔 의식하지 않은 사이 생겨난 부정적인 감정을 끊임없이 곱씹기도 한다. 24시간 중 특히 평일, 온전히 내가 결정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시간은 몇 분 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슬픈 직감. 또 떨어진 체력은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지금 지내고 있는 방 안의 상태도 그렇다. 어느새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생긴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는 모습. 쉬는 기간 동안 마음에 걸렸던 것들을 치우고, 또 옷장 아래 선반 한칸을 뒤집었는데 끝까지 쓰지도 못한 영작문 노트가 한 무더기 나와 씁쓸한 상황을 맞기도 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정말 휴일이 좋기는 했는지, 딱 일주일 정도만 더 쉬면 정말 좋겠고. 한결 여유롭게 병원을 찾는게 좋았고 출근룩을 위한 올해 첫 새 옷으로 산것도 기뻤다. 조금 멀리 사는 친구의 아기를 보러 갔고, 일하는 친구의 점심시간에 맞춰 같이 점심을 먹었다. 역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며 자꾸 일정을 만들었다. 반대로 너무 놀기만 한다며 급한 대로 책도 몇 권 후루룩 읽고는 내년엔 또 어떤 걸 쓰고 기획할지 리스트업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다음에 쉬게 된다면 하고 싶은 일들도 정해뒀다. 너무 예상했던 바라 놀랍지도 않고 그저 나다운 일들을 했던 것 같다.


 잠을 많이 자던 첫 주 그리고 조금 불안해진 며칠과 이리저리 밖으로 돌던 둘째 주. 흘러가듯, 때로는 복작복작하게 보내도 역시나 큰 별일은 없다는 걸 확인했다. 다만 나의 삶을 채워나가는 데에 있어 얼마나 많은 권한을 가져야 할지 문제의식 같은 게 단단하게 자리잡고 말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더라도 원하지도 않았던 무언가에 휩쓸리지 않고, 내가 주도할 수 있는 부분에는 그 누구보다도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시간을 보내겠다는 계획. 연말을 앞두고 보낸 의미있는 2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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