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게의 설움
꽃 같다.
꽃처럼 예쁘다.
꽃길만 걷자.
이래저래 꽃과 접목하면 긍정적인 표현이 된다.
꽃게도 그렇다.
꽃게는 본래 어둔 파란색이었다가 열을 가하면 빨간색이 된다.
이것은 아스타크산틴(astaxanthin)이라는 물질 때문이다.
단백질과 결합해 있을 때는 파랗고 끓이면 빨갛다.
꽃게를 떠올릴 때 대개 빨간색이 연상된다.
그런데 꽃처럼 예뻐서 꽃게가 된 것은 아니다.
꽃은 곶을 의미한다.
곶은 뭍의 일부다.
육지와 닿은 곳에 길게 뻗은 지형이 곶이다.
포항에 가면 바닷가 가녘에 오른손이 우뚝 솟아있다.
그런 곳이 곶이다.
호미곶.
꽃게도 곶처럼 양쪽에 뾰족한 가시가 뻗쳐있다.
그래서 본래 명칭은 곶게였다.
이왕이면 곶게 보다 꽃게라 부르면 발음이 용이하다.
끓이면 빨간색으로 변모하는 것도 곶게를 꽃으로 연상하게 된다.
어원과는 별도로 곶게는 이렇게 꽃이 되었다.
날씨가 추워지고 따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이럴 땐 얼큰한 꽃게탕이 으뜸이다.
좋은 사람과 눈을 흘겨가며 먹는 꽃게 찌개란 세상을 모두 긍정의 바다로 내 몬다.
그 무엇이 부러우랴.
두 팔을 걷어붙이고 꽃게 속살을 드러내는 작업은 그 수고스러움에 비해 실상 소득은 빈약하다.
하얗고 부드러운 속살이 조금 끌려 나온다 싶으면 끝이다.
무엇이든 희소성이 가치를 창출한다.
이래서 남자들은 해체작업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 국물의 구수함만으로 밥을 말아먹으면서 만족한다.
그러나 여자들은 딱딱한 게 껍질을 벗겨내고 속속들이 숨어든 살점을 헤집는 전문가다.
해체 전문가.
덕수궁 돌담길처럼 단단하게 둘러쳐진 외피는 파도치는 세상과 무관하다.
다만 그 속에 간직된 물성이 우리를 자극한다.
부드럽고 고소하고 달착지근한 이 신비의 물질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봄 바다에서 건져낸 암 꽃게의 뱃속에는 분홍빛 알이 포실하다.
가을에 퍼올린 수컷 꽃게의 뱃속에는 실크뭉치가 한가득 채워져 있다.
꽃게는 단백질, 베타카로틴, 비타민, 아연, 엽산, 인, 철분이 골고루 들어있다.
그야말로 종합비타민이다.
살찔 염려도 없고, 두뇌 발달에 좋고, 뼈가 튼튼해지고, 피부가 반들거리고,
간이 살아나고, 심혈관이 건강해지는 만병통치 천연물질이 꽃게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뾰족한 가시에 피를 볼 수도 있다는 것.
무지무지 힘이 센 집게에 손이라도 `앙` 물리면 그날은 게에게 절절매고 절을 해야 된다는 것.
그것이 흠이다.
그것 말고는 시상에(세상에) 이보다 좋을 수가.
아이들과 여자들이 환장할 수밖에.
이래서 곶게는 다시 꽃처럼 화라락 피어난다.
큰 소득은 없어도 여자들은 꽃게 해체작업에 열을 올린다.
밥은 이미 다 식어가고 반찬들은 꼬들거릴지라도.
그것과 무관하게 작업에 심혈을 기울인다.
빈약한 한 점을 위하여 환호성이 대기 중이다.
환호는 곧 식어버린 국물에 밥을 퐁당 말아버리면서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어린아이와 여자들에게 아미노산의 결정체가 입안으로 투입되는 순간,
꽃게는 이미 우리네 정신줄을 강타했다.
그것은 심해 어딘가에서 속살을 채울 때부터 준비된 각본이었다.
부단히 속을 채운 결과가 고작 아기와 아녀자들의 목구멍이다.
그 허망함을 어디 가서 채울 것인가.
진정 속상하고 억울하면 드럽게(더럽게) 맛이 없어야 하는데 혼미하게 맛있는
이 부당함의 극치여!
그나마 곶게를 꽃게로 승격시켜 준 것만으로 그들은 오늘도 내일도
우리네 밥상에서 조용히 침묵한다.
침묵의 곶게요. 꽃게요.
봄과 가을 식탁에서 피어난 빨간 꽃은 심해 저 밑바닥에서 피어나던 보물꽃이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