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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계현 Oct 22. 2021

내 이야기에 오롯이 귀 기울여줄
누군가

[심리상담 안내서] 경청은 존경의 표시입니다

보건소 심리지원센터에 오시는 분들는 주로 중장년층입니다. 평일 낮 시간에 운영하다 보니, 아무래도 40대 이상 주부, 60대 이상 어르신이 많지요. 살아온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60대 이상 어르신과 상담을 할 때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편입니다. 50분 상담이지만 때론 한 시간을 훌쩍 넘기도 하고, 약속 없이 불쑥 찾아오셔도 웬만하면 상담을 진행합니다. 언젠가부터, 어르신과의 상담에서는 딱딱 정해진 걸 지키는 게 의미 없다는 걸 알았거든요. 기법이나 절차를 따지기보다는 ‘삶이라는 고된 과정을 더 오래, 더 많이 겪어낸 것에 대한 존경', 그거면 충분했습니다. 


평생 애지중지한 아들이 결혼 후에 등을 돌려 서러움이 쌓인 분, 형편이 어려워 결혼 못한 30대 딸에게 짐이 될까 자살을 준비하는 분, 남편의 폭력으로 피멍으로 얼룩진 한평생을 사신 분. 사연은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가족을 위해, 어쩔 수없이 자신을 헌신했다는 점’이었어요. 아마도 가부장 사회가 그 시대 여성에게 요구했던 가혹함이겠지요.




평생에 얽힌 한이 너무 많아서, 엉킨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았습니다. 어떤 70세 어머님은 한밤중에 ‘보쌈’을 당해서 애를 낳고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누구와 결혼할지 선택권이 없었고, 부당한 처사에 항거할 방어권이 없었지요. 군불도 안 뗀 방에서 산후조리를 하느라 몸은 성한 데가 없는데, 시댁 식구 열댓 명의 삼시 세 끼를 차려내느라 잠시도 쉬지 못하셨다고 해요. 어느 밤, 서러움이 복받쳐서, 까맣게 잠든 애를 뒤로 하고 맨발로 뛰쳐나왔는데, 나와보니 막상 갈 데가 없어 길 한복판에서 한참을 목놓아 우셨다고 합니다. 


어르신의 이야기는 생생했습니다. 집을 뛰쳐나왔던 그날 밤 맡았던 밤 냄새, 새소리, 차가운 흙바닥의 감촉. 마치 제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것 같았어요. 칠순 어르신의 기억은 열아홉 서러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정해진 상담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차마 이야기를 끊지 못했어요. 어르신은 90분 내내 이런저런 한을 쏟아내더니 상담을 마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이에요. 이렇게 얘기해본 거.

단 한번도 꺼내지 못한 서러움은 그대로 굳어서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돌덩이처럼 딱딱하고 묵직하게요. 체증을 느끼면서 그 세월을 어떻게 견뎌 오셨을까요? 이야기를 마친 후에 어르신은 표정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소녀처럼 환하게 웃으셨어요. 기댈 데 없어 두렵고 불안했던 열아홉 소녀가 이제야 안심하는 듯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간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는 게, 아무도 그분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는 게,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게 마음 아팠습니다.


다음 번에 또 오셨으면 좋겠다고 하자, 어르신은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더 이상 상담은 필요 없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요. 이거면 충분하다고, 걱정해서 해주는 말인건 알겠다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셨어요. 남편에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대접도 못 받은 인생이었지만, 어르신은 그 말도 안 되는 대우를 참아내고, 부글거리는 속내를 다듬어가면서 내공을 쌓아 오신 듯했습니다.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만 보이는 단단함이랄까요. 제가 차마 범접할 수 없는 강함이었습니다.


누구나 불안과 걱정, 고민이 있습니다. 열다섯 소녀든, 칠순 노인이든 제 나이대에 맞는 고민을 하죠. 살지 못한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두렵다고 세월을 막을 수 없고, 후회된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일. 우린,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갈 뿐이니까요. 


다만, 그 여정에서, 누군가 내 이야기를 궁금해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이야기에 오롯이 귀 기울여줄 누군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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