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맥퀸의 이야기
맥퀸에 대한 짧막한 기억
어렸을 적 꿈이긴 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나의 꿈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사실 겉으로 화려해보이는 모습에 이끌 림을 느껴서 아무것도 모르고 꾸기 시작한 꿈 이기는 하다. 그래도 그 겉멋 든 꿈이 흔히 인생의 중요한 기로 라고 하는 고 3때까지 가기는 했다. 한 두개의 과를 제외하고는 패션디자인과에 원서를 넣었고 학생부 종합 전형으로 쓴 자기소개서나 생기부에는 패션디자인과에 관련된 활동들이 대부분이었다. 알렉산더 맥퀸은 내 자기 소개서의 좋은 소재 중 하나 였다. 가장 좋아하는 패션 디자이너를 꼽아보라 하면 맥퀸을 뽑곤 했다. 그 즈음이 맥퀸이 세상 을 뜬지 몇 년 안되었던 때인데, 패션 채널에서 특집으로 내보낸 맥퀸의 패션쇼 런웨이 영상을 우연히 보고 그를 알게 되었다. 그때 본 패션쇼는 모델들을 체스말처럼 사용해 화제가 되었던 2005년 알렉산더 맥퀸 컬렉션으로, 극적인 무대 장치와 과장되고 그로테스크한 드레스들이 주는 아름다움들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어쩌다보니 나는 패션디자인과에 진학하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패션은 내 삶에서 멀어져 갔다. 세계 4대 패션 위크가 열릴 때마다 꼬박꼬박 해외 유명 브랜드들의 쇼 도록을 챙겨보고, 매달 2-3개의 패션 잡지를 구독하 던 고등학생 때 를 생각하면 지금은 아예 나와 상관 없는 먼 세계 이야기가 된 것이다. 그 뒤로 알렉산더 맥퀸이라 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 또한 없었다. 그러던 중 내 삶에 알렉산더 맥퀸이라는 인물이 상기된 계기는 이번 여름에 다녀온 유럽 여행에서 였다. 가장 첫 번째로 방문한 도시는 런던이었고 명품 패션 브랜드들의 쇼룸과 가게 들이 즐비한 메이필드, 옥스포드 스트리트 쪽을 돌아다니던 중 알렉산더 맥퀸의 쇼룸을 발견했다. 쇼윈도는 수백 마리의 나비들이 장식하고 있었고 시크한 블랙 톤의 매장의 분위기와 형형색색의 나비 장식을 멀리서 보자마자 아, 맥퀸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잊고 있었던 인물을 떠올린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맥퀸>을 보면 서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내가 좋아했었던 디자이너는 이런 인생을 살았구나. 디자이너로서의 업적이 중점이 아 닌,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루고 있는 형식이 그래서인지 더 나에게 몰입감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리 맥퀸의 이야기
알렉산더 맥퀸이 흔히 많은 천재들이 그렇듯,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으로 생을 마무리 했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 람들이 알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그의 작품과 그의 천재성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어떻게 해서 디자이너의 길 을 걷게 되었는지 혹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인터넷 검색 몇 번으로 알기는 어려웠다. <맥퀸> 은 천재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을 찬양하고 그의 업적 만을 돌아보는 패션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맥퀸, 지방시, 구찌 등 유수의 명품 브랜드를 이끄는 패션계의 거물 이었지만 때로는 연약 하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다정했던 리 맥퀸이 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맥퀸의 썩 풍요롭지 못했던 유년 시절부터 패션디자이너를 꿈꾸며 재봉사로 일을 하던 시절, 파격적인 졸업 전시로 패션계의 이단아로 데뷔 했던 젊은 날들, 유명해지면서 불행해졌던 그의 복잡한 개인사, 그의 가장 큰 후원자 이자 친구 였던 이자벨라 블로우와의 미묘한 관계들, 그의 어둡고 파격적인 패션 세 계의 근간이 되는 유년 시절 그의 어두웠던 기억들과 상처, 우울증,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 거대한 패션 브랜드를 거느리면서 그에게 주어진 막중한 책임감과 살인적인 업무 강도, 고통을 약으로 잊으려 했던 시도들, 그리고 그가 사랑하던 사람들의 죽음까지...맥퀸의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사를 맥퀸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그를 회상하며 이 야기한다.
그의 개인사와 더불어 ‘자신의 어두운 면의 끝까지 가서 그 안의 공포들을 무대 위로 올린다’ 는 맥퀸의 말처럼 그 의 사적인 면과 맞닿아 있는 패션 세계와 런웨이들이 이야기와 함께 바쁘게 화면을 채운다. 리 맥퀸이라는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알렉산더 맥퀸의 파격적이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옷들은 미장센으로도 화면을 압도한다. 맥퀸이 처음 자신의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로봇 팔이 모델이 입은 드레스에 물감을 뿌리는 피날레는 말그대로 압 권이다. 맥퀸의 팬으로서 그의 초기 작인 톡톡 튀는 열정과 끼가 흘러넘쳤던 ‘희생자들을 쫓는 살인마 잭’ 컬렉션 부터 그의 마지막 런웨이까지를 함께하는 <맥퀸>의 여정은 즐거울 수 밖에 없었다. 살인마, 정신병원, 강간 사건, 히치콕, 그리스 신화, 로봇 등 패션의 틀을 깨는 소재로 의복이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그의 예술은 보는 것 만으로도 황홀하고 경이롭다. 또한 <맥퀸>에서는 그의 이러한 결과물 뿐만 아니라 그가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과정, 그의 작품에서 모티프가 된 사건들을 같이 다루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관객들은 맥퀸과 그의 예술에 대 해 더 심도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며 그에게 공감하게 된다.
5 개의 테이프 그리고 해골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패션 필름만은 아니다. 패션 디자이너 리 맥퀸이라는 개인에 관한 이야기가 중요하다. 그 러나 맥퀸의 삶에서 패션을 제외하고 이야기를 하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맥퀸의 중요한 패션쇼의 이름과 맥퀸 의 인생에서의 중요한 시기를 엮어 이야기를 구성할 수 밖에 없었다. <맥퀸>은 총 5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이하게 테이프라는 단어로 챕터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맥퀸>이 알렉산더 맥퀸과 관련된 영상이나 목소리가 녹음 된 테이프 200여 개로 제작된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맥퀸의 최측근자였던 보조 디자이너 세바스찬 폰스가 제공한 홈비디오테이프가 지금의 <맥퀸>을 만든 두 공동감독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 한 맥퀸의 개인적인 사생활을 엿보는 듯한 날 것 그대로의 홈비디오는 생생하고 또 그래서 그에게 친근감을 느끼 게 한다. 그래서인지 <맥퀸> 안에서 마치 테이프를 틀고 끄는 듯한 음향적 효과와 플리커 효과등의 전환 효과가 자주 쓰이기도 한다. 앞서 언급 했듯이 5개의 테이프는 맥퀸의 런웨이 쇼 중 그의 인생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작품들 중에서 선정해 제목을 가져왔다. 세인트 마틴 스쿨 졸업 전시로 강렬한 인상으로 패션계에 데뷔를 알렸던 테이프1 ‘희생자들을 쫓는 살인마 잭’ , 맥퀸의 어두운 과거와 상처 유년기를 상징하는 테이프 2 ‘하일랜드 레이프’ , 유명 패션 디자이너로서 일과 인간 관계 안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의 테이프 3 ‘세상은 정글’ , 테이 프 4 ‘보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죽음을 상징하는 마지막 테이프 5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까지..
우아하면서도 리듬있는 빠른 템포의 편집은 이러한 맥퀸의 패션쇼를 돋보이게 하며 이를 통해 그의 삶을 들여다보 게 한다. 또 매번 챕터가 시작되고 끝날때 등장하는 맥퀸의 상징과도 같은 해골 그래픽은 이러한 맥퀸의 인생과 분 위기와 어우러지며 상징적으로 해당 챕터를 표현하고 있다. 황금으로 덮이는 해골, 두개골 위로 떨어지는 핏방울, 맥퀸의 죽음을 상징하는 활짝 폈다가 지는 해골 안의 꽃들 등 해골 그래픽의 변주는 맥퀸의 작품세계를 보는 듯 기 이하고 아름다우며 다큐멘터리의 분위기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맥퀸이 가장 좋아했다고 알려진 영국의 영 화음악 작곡가 마이클 니만의 그리스 비극을 연상시키는 듯한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선율은 이런 맥퀸의 이야기와 그의 패션 세계를 심화시키며 이를 감상하는 관객들을 감정적으로 고조시킨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실 우리는 이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다. 알렉산더 맥퀸은 여느 천재와 같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처음부터 <맥퀸>은 이렇게 맥퀸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인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구성은 앞서 언급 되었듯 맥퀸의 가 까운 지인들이 중점적으로 이끌어가는 서사적 구조이다. 누구보다 그와 가까웠던 맥퀸의 누나, 그의 애인이자 조 수, 조카, 동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맥퀸>을 이끌어가며 인간 리 맥퀸을 추억하고 그와 자신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을 회상한다. 이들은 그저 맥퀸을 천재 디자이너로서 찬양하거나 우상화하지만은 않는다. 때로는 우울하고 성 격이 괴팍할때도 있고, 삶의 어려움을 약에 의지하기도 했던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리의 결점을 증언 하기도 한다. 맥퀸을 누구보다 더 가까이서 지켜봐왔던 사람들이 말하는 맥퀸의 일생은 그래서 더 생생하고 드라마틱하다. <맥퀸>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은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성공과 부귀영화, 셀레브리티의 삶이 아니다. 여 러 직원들을 책임져야 하고 사람들을 끊임없이 놀라게 해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던, 자신이 관리하는 여러 브랜드 모두를 성공적으로 계속 이끌어나가야 했던 맥퀸의 고통과 무거운 책임감은 이렇게 생생하게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유년시절 누나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매형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매형으로부터 당한 성폭행, 동성애자 로서의 자신, 그가 가장 사랑했던 두 여자 이자벨라 블로우와 어머니의 죽음까지. 맥퀸이 옷밖에 없던 시절 부터 함께해 그가 슈퍼스타가 될 때 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본 맥퀸의 주변 인물들은 그의 기쁨과 슬픔을 증언한다. 이렇 게 천재라 불리웠던 한 인물을 생생하고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는 이 작품은 그래서 더 특별하고 강렬하다. 역사에 남을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 뿐만 아니라 그 뒤의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던 순수한 청년이었던 리 맥 퀸이라는 사람을 기리고 추억하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거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작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 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