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욕망, 그리고 세 여자
사랑과 욕망, 그리고 세 여자
평소 요르고스 란티모스를 좋아하는 감독으로 뽑고는 한다. 나에게 있어 2018년 개봉 영화 중 최고의 충격을 준 영화는 그의 전작인 <킬링디어>였다. 따라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이자 그의 첫 시대극인 <더 페이버릿>이 개봉 하자마자 극장으로 달려간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사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줄거리를 듣고 의아 했던 것은 사실이다. 시대극과 요르고스 란티모스라니. 사랑하지 않으면 동물이 되는 세계와, 그리스 신화의 비극을 바탕으로 한 소년이 초 현실적인 힘의 개입으로 일가족을 심판하는 현대적 이지만 비현실적인 세계를 구축 하던 그의 전작들을 생각하면 예상 못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늘 나에게 좋은 의미로 충격을 주었던 그이기에 어떤 영화가 나올지 궁금했다. 그리고 처음 <더 페이버릿>을 본 후 가장 강렬하게 남은 것은 세 인물이었다. 궁중 암투를 다룬 영화 중에서 여성들이 이렇게 권력과 사랑 사이에서 피 튀기게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었던가. 그리고 그 사랑과 권력 한 가운데에 있는 중심 인물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것도 잘 보지 못한 설정이었다. 그리고 세 인물 모두 입체적이고 굉장히 매력적이다. 여성 서사에서 흔히 보지 못했던 유형의 인물이라는 점이 특히 반가웠다. 전작인 <킬링디어>에서의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안되는 차가운 인물들의 느낌과는 사뭇 대비되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아픔을 지니고 있기에 미워할 수 없는 여왕 앤, 그리고 앤의 가장 오래되고 친한 친구이자 절대 권력을 지니고 있는 사라, 그리고 신분 상승의 꿈을 가지고 있는 야망이 가득한 시녀 애비게일까지. <더 페이버릿> 에서는 이처럼 인물들의 힘이 극 전체를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세 여자들 사이의 사랑, 질투, 싸움 그리고 이 감정들 사이의 긴장감이 극의 리듬을 형성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 이 인물들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손에 땀을 쥐며 바라볼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여자들의 관계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의 소비였다. 번진 마스카라나 닦으라며 사라에게 놀림을 당하는 할리 당수나, 애비게일에게 희롱 당하고 이용 당하는 마샴 등 남성성을 대놓고 비웃고 있는 장면들이 많다. 잘 보지 못한 여성 캐릭터, 잘 보지 못한 남성 캐릭터 등 이 뻔한 클리셰들을 비틀고 있는 인물들의 활용이 이 영화를 더욱 경쾌하게 만든다.
거짓말 하지 않는 사랑, 사랑해서 하는 거짓말
이 영화를 이끌고 가는 큰 힘 중 하나는 여왕 ‘앤’ 을 사이에 둔 두 인물 간의 대립이다. 언제나 여왕의 최측근으로서 사실상 권력을 쥐고 있는 실세에, 결단력과 호쾌함을 겸비한 인물인 사라. 또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그 사랑스러운 표정 아래 신분상승의 야망을 숨기고 있는 영특한 하녀 애비게일. 이 둘은 사랑과 권력을 두고 대립한다. 그 중심에는 여왕 앤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앤의 마음을 쟁취하는 것이 곧 권력의 쟁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사라와 애비게일 모두 앤을 사랑한다. 그것이 앤이라는 인물을 사랑하는 것인지, 여왕인 앤을 사랑하는 것인지, 여왕인 앤이 가진 권력과 부를 사랑하는 것인지는 보는 관객에 따라 다르게 느끼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두 인물이 여왕을 사랑하는 방식과 싸움의 방식 또한 대비되는데 이 지점이 나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점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두 여자들이 사랑하는 법이었다. 후반부에서 사라가 궁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앤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는 대화의 핑퐁과 표현이 참 재미있었다.
걘 너처럼 뭘 바라지 않아.
당신한텐 바라는 게 없어도 다시 귀족이 됐고, 연금도 2000파운드 씩 받죠.
넌 왜 걔처럼 날 사랑해주지 못해?
내가 거짓말 하길 바래요? 폐하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같으세요. 아니, 당신은 가끔 오소리 같아요.
난 그걸 솔직히 말할거고. 왜? 거짓말을 안 하는게 사랑이니까!
그리고 나는 마지막 저 문장에서 사라만은 여왕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달콤한 거짓을 속삭이는 사람이 있다면 때로는 쓴 진실을 알려주는 사랑도 있다. 물론 사라가 앤이 여왕이 아니었다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라는 앤을 여왕으로 만난 이후에 권력을 잡기 위해서든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사랑하는 척을 하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진짜 사랑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물론 사라는 앤의 여왕이라는 지위와 그 권력을 이용한다. 아주 대놓고 말이다. 그리고 때로는 여왕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왕이 자살시도를 하겠다며 창문 난간에 서 있을 때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잔디로 떨어지면 안 죽으니까 돌로 떨어지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라가 대놓고 여왕을 이용할 수 있는 것도 그녀를 사랑하기에 숨길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애비게일은 어떠했나? 애비게일은 여왕에게 항상 공감하고 그녀를 칭찬하며 그녀의 말에 대들거나 하는 일이 없다. 사라는 질색했던, 여왕이 죽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키우는 17마리의 토끼들을 예뻐해주고, 자신이 남자였다면 당신에게 열렬히 구애했을거라 말한다. 그리고 까치집이 다름없는 여왕의 머릿결을 빗으로 벅벅 빗겨주며 궁전 사람들이 여왕의 머릿결이 좋다며 칭찬일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애비게일은 여왕이 잠들었을 때 토끼 위에 발을 올린다.
또 원하는 것이 있을 때는 어떤가? 사라는 원하는 것이 있다면 민망할 정도로 직접적이다. 돌려말하지 않고 그대로 여왕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에비게일은 원하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싫다며 할리 당수를 포섭해 자신의 요구를 할리가 대신 전하게 한다. 사라의 “당신한텐 바라는 게 없어도 다시 귀족이 됐고, 연금도 2000파운드 씩 받죠.” 라는 대사는 사라의 말을 빌리자면, 뱀같은 애비게일의 속내를 간파 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사실 사라는 처음부터 애비게일이 보통 인물이 아님은 눈치 챘을 것이다. 여왕이 애비게일과 한 침소에 있는 것을 봤을 때 부터? 아니, 사라는 한참 전 부터 경고해왔다. 물론 이정도로 애비게일의 세력이 커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애비게일이 여왕의 다리에 약초를 사용해 치료한 후, 치료한 사람이 자신임을 여왕에게 알리기 위해 여왕 앞에서 기침을 했을 때부터 알아봤을 것이다. 여왕이 그게 너였어? 라고 묻고 애비게일이 여왕에게 눈도장을 찍는 것을 뒤에서 듣고 있던 사라는 돌아서며 싱긋 웃는다. 그리고 묻는다.
“사격이나 좀 할래?” 이렇게 사라가 애비게일과 일정한 신경전, 혹은 경고를 할 때 마다 사격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여러 차레 등장 하는 사격 장면들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사라는 애비게일에게 사격을 가르켜준다. 처음 사격을 배운 애비게일의 사격 솜씨는 허공에 총알이 날라가기 일쑤였고 엉망이었다. 그에 비해 사라의 사격은 훌륭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의 가르침 덕분에 애비게일의 사격 솜씨가 동등해지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우열을 가르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후반부 사라를 밀어내고 여왕의 총애와 권력을 독차지한 애비게일은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배웠노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격 장면은 일종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처음에는 압도적으로 애비게일의 우위에 있었던 절대 권력을 가진 사라와, 여왕의 총애가 애비게일로 옮겨가면서 부터 동등 해진 두 사람의 힘의 크기가 사격 이라는 스펙터클과 만나 긴장감을 자아낸다. 애비게일이 할리 당수로부터 스파이 제안을 받은 후, 이를 사라에게 밝히고 당신의 가장 큰 비밀이라도 지켜주겠다는 애비게일의 말에 사라는 총알이 장전되지 않은 총을 애비게일에게 겨눈다. 총알을 넣었는지 넣지 않았는지 헷갈려서 사고 칠까 봐 걱정이라는 사라의 말은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총알을 넣고 너를 겨눌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인 것이다. 이처럼 <더 페이버릿> 은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여러 상황과 장치를 통해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7 마리의 토끼들
이 영화의 엔딩 장면은 왜인지 나에게 특이한 인상을 남겼다. 처음 극장에서 보았을 때는 당혹감을 주었고, 수업을 위해 한 번 더 보았을 때는 여운을 주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처음 보았을 때는 이게 끝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닫힌 결말도 열린 결말도 아니고 영화가 갑자기 끝나버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 겹쳐지는 토끼들과, 앤과, 애비게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점들. 그 때는 나름의 뚜렷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해 영화 자체는 좋았지만 결말이 이해하기 힘들어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지막 장면이 세 여자의 꼬여버린 사랑과 관계, 그리고 그 관계로 생긴 상처와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비게일이 여왕의 총애를 얻게 된 계기는 여왕의 토끼들이었다. 국정으로 인해 바쁜 사라가 저 대신 애비게일을 보내자 여왕은 애비게일에게 사라를 불러오라고 말한다. 그때 애비게일은 토끼라면 질겁했던 사라와는 다르게 여왕에게 각별한 의미인 토끼들에게 관심을 보내며 너무 예쁘네요 라고 말한다. 여왕은 토끼들을 예뻐하는 애비게일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계기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되며 자신이 자식을 17명 잃었다는 이야기와 아이들이 죽을 때마다 내 자신의 일부가 사라졌다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털어놓는다. 여왕이 육신의 아픔에 몸부림치고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이며 제정신이 아니어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여왕은 후반부에서 상처 중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도 있다는 말을 한다. 이처럼 여왕이 키우는 토끼 17마리는 지울 수 없는 상처들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엔딩 장면의 설명을 위해 이 세 여자들이 어떤 처지가 되었는지 살펴보자. 여왕의 가장 가까운 최측근이자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공작부인, 사라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왕의 명에 따라 궁에서 쫓겨나고 남편과 함께 영국에서도 추방될 위기에 처한다. 사랑과 권력 모두를 잃은 것이다. 여왕은 어떠한가. 가장 오랜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사라를 제 손으로 쫓아낸 뒤 자신이 선택한 애비게일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고, 내가 못 보는 사이에 자식같은 토끼를 발판으로 쓰는 인간이다. 그리고 몸은 여전히 아프고 나라 일은 더 골치 아프다. 설상가상으로 나라 일을 도맡아 대신 처리해 줄 사라도 없으며 사라의 편지를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 애비게일은 모든 것을 다 이룬 듯하다. 하녀에서 귀족으로 신분 상승은 물론, 눈엣가시였던 사라는 영영 사라지고 자신에게는 귀족 신분인 남편이 있고 여왕의 최측근은 자신이다. 허나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여왕이 소리 지르면 소리지르는 대로, 입 하나 뻥긋하지 말라하면 뻥긋하지 말아야 하고 다리를 문지르라 하면 머리채가 잡힌 채 다리를 문질러야 한다. 그리고 처연한 여왕과 허탈한 애비게일의 얼굴 위로 오버랩되는 17마리 토끼는 이 세 인물의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감정을 뜻 하는 듯하다. 마치 이 상황이 계속 지속되며 반전은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저 이 희망없는 상황이 계속 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