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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istan Aug 17. 2019

사랑은 왜 밀당을 요구하는가?

밀당은 기술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밀당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사랑하면 밀당같은 것은 필요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밀당을 하려고 밀당을 하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다보면 저절로 밀당을 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어떻게 필연적으로 밀당을 요구하는가?

 사랑할 때 밀당이 요구되는 것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기분좋은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랑이 정말 견고한 사랑인지, 이 사랑이 정말 뜨겁기만한것이 아니라 단단하기까지한지 확인하려면 필연적으로 시험을 해봐야한다.


 영화를 만들 때 사랑하는 두사람이 그냥 사랑만하고 끝난다면 그 영화는 성공하기 힘들것이다. 관객에게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해서 사랑을 시험하는 거대한 장애물을 놓고 그 장애의 크기만큼이나 주인공들은 고통받지만 그 장애를 사랑으로 극복했을 때 그 사랑이란 얼마나 견고한 것인가를 깨닫는다.


 밀당의 본질은 이 장애, 고통에 있다. 사랑의 스트레스 테스트인 밀당은 통제가능한 고통이다. 상대를 밀면서 상대는 고통을 느낀다. 도대체 이 이유없는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무관심, 변심은 무엇인가? 상대는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그 고통속에서 자신의 사랑을 재확인할 수 있다. 이토록 나를 고통스럽게하는 그녀에게 나는 이 고통만큼이나 사랑에 빠진것이구나라고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시한번 그녀에게 자존심을 버리고, 분노와 두려움을 이기고 사랑한다고 표현한다면 분명 그녀도 그리고 그 자신도 자신들이 견디어낸 사랑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밀당이 너무 과하면 회복불가능한 영구적 손상을 일으키는 수준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항상 회복가능한 수준의 압력으로 밀어붙여야한다. 자신의 현재 사랑의 깊이와 수준을 이해하고 재확인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사랑이 그토록 아름다운 이유는 무한한 기쁨과 한없는 고통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내게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나의 모든 기쁨과 고통의 주재자이다. 그녀의 웃음은 내 모든 슬픔을 한번에 용서할 수도 있지만 그녀의 심기가 조금만 불편하더라도 세상은 순식간에 지옥이된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없이 사랑은 그저 설탕덩어리에 불과하다. 두려움과 사랑이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살아있는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사랑을 할 때, 사랑받는 것보다 먼저 자신이 두려운 존재가 되야한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 <군주론>에서 군주는 사랑도 주고 두려움도 주어야 하지만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한다면 주저없이 사랑을 포기하고 두려움을 받는 존재가 되라고 한다. 사랑할 때나 나라를 다스를 때나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사랑을 할 때, 사랑받는 것보다 먼저 자신이 두려운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에게 자신이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 사랑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상대가 나를 사랑만 주는 두렵지 않은 존재라고 여긴다면 이 사랑이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 


 사랑의 기초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두려움은 타자성이다. 자신이 알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낀다. 사랑은 타자성의 내면화이다. 남자와 여자(물론 여러가지 경우도 있지만)라는 서로 다른 생물학적차이를 가진 존재가 만나서 일으키는 사랑은 타자의 결합이다. 가족은 유전적으로 매우 유사하고 생각하는 방식도 비슷하고 살아온 환경도 비슷하다. 하지만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는 유전적으로 매우 다른 존재다.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다. 사랑은 그런 모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사랑은 남자에게 여자라는 두려움을 내 삶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녀는 아주 어려운 것을 해내는 것이다. 남자에게 여자는 아주 어려운 문제이다.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그 모든 불가사의를 다 견디어야한다. 사랑이 어렵지 않다면 또 무슨 큰 가치가 있을까? 삶에서 의미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우냐에 비례한다. 어렵고 힘든 과정을 겪어내고 나서야 얻어낸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의미있는 내 것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있어서 오로지 사랑만 준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남자가 여자의 모든 생각을 손쉽게 알 수 있다면 그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과 로봇을 사랑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한 여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여자는 살아있다. 끊임없이 변하면서도 한편으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 천문학자가 되어야 하며, 물리학자가 되어야하며, 생물학자가 되어야한다.


 아주 먼 옛날, 미토콘드리아는 하나의 독립적인 세균이었지만 어느날 세포 속으로 들어와 세포와 공생관계가 되었고 이제 미토콘드리아와 세포는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둘을 이끈 것은 최초의 사랑일지도 모른다. 세포에게 미토콘드리아는 미지의 세계였고 두렵고 알 수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은 그들을 하나로 묶었고 그 최초의 사랑은 이제 온 세상에 퍼져 생명을 번성시키고 있다. 어쩌면 그 둘도 밀당을 했을지도 모른다. 조금 다가가보고 돌아와보고 고민하면서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면서 둘은 하나가 되었다.


 여자들이여! 자신을 두려워하는 남자만이 사랑할 가치가 있는 남자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 두려움의 크기만큼 남자는 섬세해질 것이고, 그 두려움의 크기만큼이나 인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여자와 남자를 바꿔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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