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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Nov 04. 2020

어느 70대 노인의 "우리 이혼할 수 있나요?"

때로는 배우자의 행복을 위해 이혼을 꿈꾸는 게 인생이다

이혼이 흔한 세상이다. 이혼은 흠도 아니고 그냥 개인의 사생활일 뿐이다. 이혼사유는 부부가 가진 갈등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이혼절차는 재판상 이혼과 협의이혼이 있다. 재판상 이혼은 서울지역의 경우에는 서울가정법원의 전속관할이다. 나머지 서울지역 각급 법원에서는 협의이혼만을 신청할 수 있다. 협의이혼은 서로의 이혼의사의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해 부부 쌍방의 확인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협의이혼 신청은 반드시 부부가 함께 출석하여야 한다. 서울시내의 각급 법원에서 협의이혼은 종합민원실에 있는 협의이혼 담당자에게 신청하여야 한다.


코로나로가 준 유일한 선물은 맑은 하늘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 "벽공(空)"에 가까운 하늘을 바라본 적이 언제였는지... 민원실에는 각종 재판 신청이나 공탁, 가족관계 관련 업무를 처리하고 있어서 온종일 민원인들로 붐빈다. 세상은 코로나의 공포에도 온통 가을의 향기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바람마저 잠들고 커피 향이 그윽하게 풍겨왔다. 투명한 가을빛이 따스하게 내리쬐던 목요일 오후 3시였다.


대략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분이 민원실을 찾았다. 처음 오셨는지 먼저 민원안내부스를 찾아 당신이 찾아온 이유를 말씀하셨다.

"저기, 선생님. 잘 찾아왔는지 모르겠네요. 여기가 00 법원 종합민원실인가요?"

(밝게 인사하는 안내직원의 반응을 살피시는 듯)

"저기 선생님, 죄송한데요... 이혼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민원안내를 맡고 있는 직원은 한쪽 구석에 위치한 가족관계등록팀 쪽을 가리켰다.

 "네, 어르신... 저 앞쪽에 있는 대기표를 발부받으시고, 2번 창구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계시면 순서대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노인은 민원안내직원의 도움으로 대기표를 받고 창구 앞쪽에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민원실 한쪽 벽에 걸려있는 티브이에서는 국정감사가 한참인 국회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티브이 중계가 한창이었지만, 우리나라 정치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의원들의 꼴불견 행태에 다수의 국민들은 외면하고 있었다. 노인은 멍한 눈빛으로 티브이와 오가는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윽고 접수창구의 직원이 번호표를 호명했다.

"1021번 선생님, 2번 창구로 오시죠."


노인이 천천히 창구에 있는 민원인용 의자에 앉았다. 직원은 고령의 노인분이 오셔서 다소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속으로만 갸우뚱거렸다. 통상 이혼은 젊은 부부나 중년부부가 오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어르신, 무슨 일로 법원에 방문하셨나요? 여기는 협의이혼 신청창구입니다."


노인은 갑자기 생각에 잠긴 듯...  말씀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직원 입장에서 민원인에게 재촉할 수 없기 때문에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한참 동안을 뜸을 들이다가 노인은 흰머리를 긁으며 어렵사리 한마디를 꺼냈다.

"저기, 제가 올해 나이 일흔 하고 여섯인데.... 제가 이혼할 수 있나 해서요? 어떻게 하면 이혼을... "


담당 직원은 마스크를 하고 있었지만 최대한 또박또박 답변을 했다. 노인의 질문에 대한 의문이 마스크를 뛰어넘을뻔했지만, 개인의 호기심을 최대한 자제하며 말했다.

"네, 어르신. 두 분이서 이혼 합의 의사가 있고, 두 분이서 합의해서 함께 이혼 신청을 하시면 됩니다. 그다음은 판사가 이혼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고요. 그 절차가 끝나고 일정한 이혼숙려기간이 지나고 구청에 신고하시면 이혼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두 분이서 같이 오셔야 되는데요."


노인은 잠시 뚱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한마디 더 보탰다.

"혹시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나요? 이혼.... 이놈의 할망구가 같이 오기 싫다고 해서.... "


직원은 다시 한번 노인에게 협의이혼 절차를 자세히 안내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이 필요한 분위기였다.

"아! 네... 어르신. 협의이혼은 반드시 두 분이서 함께 오셔서 이혼신청을 하셔야 하고, 이혼 확인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악용될 우려가 있어서요...."


직원은 노인이 알아들으시는지를 확인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다음번에 할머니랑 같이 한번 오시죠.... 이렇게 혼자 오셔서는 신청자격이 안되십니다. 죄송합니다..."

"여기 협의이혼 신청서 양식이 있으니까요. 혹시 작성하기 어려우시면 저쪽에 상담하시는 분이나 자식분들 도움을 받으시면 됩니다."


노인은 뭔가 아쉽다는 듯이 직원에게 고개를 숙이며 일어났다. 노인의 뒷모습에 무언가 할 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직원은 옆자리 직원과 '무슨 사연이 있으시길래 혼자 오셨을까' 작은 소리로 얘기를 나누며 다음 순번 대기자를 호명했다. 다음 대기자는 40대 부부로 보였다. 한랭전선의 냉랭한 분위기가 둘 사이를 짐작케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비바람이 치는 화요일 오후. 가을을 아쉬워하듯 속절없이 낙엽이 날리고 있었다. 다시 그 노인분이 혼자 등장했다. 마치 처음 오신 것처럼 민원안내 직원에게 다시 이혼 창구를 묻고, 이번에는 스스로 대기번호표를 뽑았다. 대기하는 의자 옆에 파란 우산을 놓고 다시 접수창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원실내 티브이에서는 전 세계의 코로나 판데믹에 대한 우려가 방송되고 있었다.


노인과 담당 직원은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협의이혼절차와 신청 가부를 묻고 답했다. 직원은 이유는 모르지만 죄송한 듯 조심스러웠고, 노인은 의사는 분명했지만 어쩔 수 없음에 고개를 젓고 있었다. 노인은 민원실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민원상담실로 들어가서 한참 동안을 상담위원과 대화를 나눴다. 상담실 문이 열리고 얼굴이 벌게진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혼신청서 양식을 들고 민원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담위원이 고개를 빼꼼 내보이며 안타깝다는 듯 노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상담위원은 혼잣말을 했다.

"할머니가 이혼을 거부하시나... 황혼 이혼도 너무 늦으신 것 같은데.."


며칠 전 올 들어 가장 쌀쌀했던 금요일 오후. 바바리를 걸친 중년의 남성 한 사람과 그 노인이 다시 등장했다. 중년의 남성은 노인의 아들로 보였고, 노인은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노인의 재등장에 민원안내 직원은 특이 민원인이 한 분 더 늘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노인의 세 번째 등장에 다시 안 오실 줄 알았던 접수창구 직원의 눈이 커졌다.


노인은 이번에는 접수대기 번호표를 뽑지 않았다. 잠시 상담을 기다리다가 민원창구가 뜸해지자 직원에게 다가선 아들이 말을 건넸다. 노인은 건강식품을 광고하는 티브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소리 없이 광고 자막이 흘러가고 있었다. '중년 남성의 전립선 장애나 지구력 증진에는 소팔메....'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희 아버님 때문에 고생하셨죠. 아버지께서 여기에 몇 번 방문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금 저희 아버님이 치매여서 많은 것을 기억 못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저희 어머님은 몇 년 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아들의 말에 직원은 혹시 잘못 들었나 귀를 쫑긋했지만, 아들은 담담하게 사연을 얘기했다.

"아버지가 멀쩡하실 때는 혼자 계신 것을 인정하시다가도 어쩔 때는 어머니 돌아가신 사실도 기억을 못 합니다. 그래서 주위분들 얘기가 아버지가 이혼을 하시겠다고 여기 오셨다고 해서, 죄송하다는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혹시나 공무원분들한테 폐를 끼치지 않았을까 싶네요."


접수창구의 직원은 놀란 듯 아무 말도 못 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직원과 눈을 한번 마추친 아들의 얘기가 다시 뒤를 이었다.

"아버지가 젊으셨을 때 어머니 속을 많이 상하게 하셔서, 어머니께서 농담으로나마 이혼해서 편히 사실 거라고 말씀했던 적이 몇 번 있었거든요. 그때는 웃어넘기시더니만, 치매가 아버지에게 갑자기 옛날 기억을 불러온 모양입니다."

(아들이 노인을 살짝 쳐다보며 웃자 직원도 겸연쩍한 미소를 보였다.)


"어느 날 느닷없이 아버지가 어머니랑 이혼을 해서..., 고생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셔서... 저희 가족은 아버지 말씀을 장난으로 여기고 웃어넘겼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신걸 보니 농담이 아니셨나 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관공서에서 엉뚱한 떼라도 쓰시지 않으셨을까 싶어서 제가 얘기를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습니다."(아들은 아버지를 안쓰러운 듯 쳐다봤다.)


담당 직원은 아들의 말을 듣고 뜻밖의 사연에 놀란 듯 말했다.

"아!!... 아버님께서 너무 조심스럽게 오셔서 절차만 묻고 가셨는데 그런 사연이 있으셨군요. 안타까운 일이었네요."

"워낙에 조용히 말씀하시고 그러셔서 치매가 있으신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함께 오시라고 한 건데... 어머니가 돌아가셨군요... 그래서 많이 머뭇거리셨는데 그것도 모르고, 두 분이 함께 오시라고 계속 말씀드렸네요. 제가 정말 죄송합니다..."


아들은 아버지 모르게(들리지 않게)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요약해보면. 집에서 아버지를 모시다가 이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서 치매전문 요양원에 모신다는 얘기였다. 대화를 마친 아들은 일어서서 직원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직원 또한 급히 일어서서 아들과 아버지에게 잘 돌아가시라는 인사를 드렸다. 직원은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아버지와 점잖은 아들이 돌아간 뒤에도 한참 동안 컴퓨터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어떤 감정이 그 직원의 가슴속에서 솟아났는지 모르겠지만.(마음속으로는 노부부의 협의이혼신청서를 접수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아내의 행복을 위해 이혼을 바라던 노인의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협의이혼 당사자인 부인의 영원한 부재로 인하여...


가을이 깊어져 가는 것처럼 현실 속 부부의 속정도 깊어져 가길 바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람일 뿐. 오늘도 이혼신청 창구에는 늘 대기자가 붐비고 있다. 그 가운데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이혼을 꿈꾸는 이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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