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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Nov 12. 2020

당신의 자존감은 과대 포장되었습니다

과잉 자존감을 강요당하는 이들에게

바람개비는 바람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바람에 흔들려 돌아갈 뿐, 자신은 늘 그대로의 바람개비일 뿐이다.


스낵류 과자의 과대포장에 대한 품평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질소를 위해 과자가 충전재로 들어있는 건지 과자를 위해 질소가 충전되어 있는 건지 모를 정도다. 막상 먹을 수 있는 내용물을 보면 한 줌 정도에 불과하다. 타인과 나눠먹기 민망한 용량. 어쨌든 과자의 품질보존을 위한 조치라고 하니 이해해주기로 하자.


우리도 개인의 품격을 위해 가져야 될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자존감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자존감이 없으면 마치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엄청 중요하다고 강조되고 여러 번 되풀이된다. 몇 년 전부터 <자존감>에 관한 열기가 유행성 감기처럼 우리의 일상을 떠돌고 있다. 가끔씩 듣는 얘기 중 하나 "너는 자존감도 없냐! 당신은 자존감이 너무 강해서 문제야." 뭐가 문제라는 얘긴지?


흔히들 자존감과 자신감을 헷갈려한다. <자존감>은 "나라는 본질의 내면을 지켜내는 자신을 존중하는 힘" 정도의 의미고, <자신감>은 "자신이 가진 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에 관한 문제이다. 다시 풀이해보면 자존감은 스스로를 존중하는 내면의 힘이고, 자신감은 그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 정도라 하면 되겠다. 문제는 다양한 상황에서 이들 양자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는거다.


대체 자존감이 뭐길래... 우리를 이렇게 곤란케하고 있는가. 예전에 없던 개념이  등장한 것도 아닌데도....

마치 "있고 없고"에 대한 판단과 기준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얘긴가? 


자존감에 관한 제목이나 내용이 들어있는 <>은 그 완성도에 관계없이 인기 상승 중이다. 그만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존감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의미인데... 그동안 우리의 자존감은 아예 없었거나 땅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을까. 토끼의 간처럼 비밀금고에 넣어두었다가 쓸모 있을 때만 등장하는 그 무엇이었을까.


책의 저자들은 <아들러와 니체>라는 철학자를 불러와서 그들의 난해한 이론과 개념을 쉽게 설명해준다. 저자들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집필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들의 이론적 도구나 설명이 없으면 우리가 자존감에 대한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인지. 무지한 의구심이 든다.


그들이 아니면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자존감의 존재를 정작 몰랐을까. 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내면의 본질을.



 표현 그대로 베스트셀러였다는 책


대한민국 베스트셀러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자처하는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도 마찬가지다. 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 어쩌고 저쩌고 할까. 우리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타인의 눈치만 바라보고 살고 있을까. 반대로 다른 이들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삶은 가능할까. 타인을 의식하지 않은 나 자신만의 삶은 가능할까.


자존감을 갖는 것과 미움을 받는 것이 왜 동격으로 취급되는가. 내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 타인으로부터 미움받을 일인가. 왜 저자들은 나약한 자존감을 지닌 개인을 전제로 하고 결국 그들의 문제로 치부하는가. 우리가 사회적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것은 오히려 타인이나 사회적인 문제 자체로부터 오는 것도 많을터인데도...


과연 미움받지 않고 나의 자존감을 살리는 것은 어려운 것인가. 자존감은 살리되 미움을 받는다면 그 자존감에 다른 부정적인 영향은 없을까. 미움을 넘어서서 왕따가 되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면 어쩌란 말인가. 이것 또한 책이나 저자의 의도에 대한 오독의 문제이겠지만. 결국 정도나 밸런스의 문제라는 거다.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의 섬에 살지 않는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고, 최소한 타인들의 인식을 전제로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 너무 혼자 살아가는 것처럼 떠들지 말아야 될 이유다. 타인의 관점에 휘둘리지 않아야 되는 것과 타인과의 관계를 떠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나 이외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상호관계를 소홀히 해서  미움을 받는다면 그게 타당한가. 두고두고 곱씹어볼 문제다.  


자신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타인의 존재나 타인과의 관계를 소홀히 해서도 안된다. 이유 있는 미움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기준을 넘지 않아야 한다. 그 기준을 벗어나면 그것은 단지 미움이 아니라 공감능력이나 협동능력이 떨어진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다. 어느 일면을 강조한다고 해서 다른 면에 대한 양보와 배려가 없다면 그것이 진짜 큰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과대 포장된 과자처럼 자존감이 과대 포장된 사람들도 존재하지 않을까. 그로 인한 문제점은 없을까. 여러 책을 둘러봐도 없는 이들만 문제 삼고 넘쳐나는 이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다. 더불어 그 용기로 인한 부작용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이 없다.


자유와 행복이 환경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감에 관한 용기의 문제라고 설파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캐치프레이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가 느끼는 행복의 대부분은 스스로가 가진 능력이나 주위의 환경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 버려지는 다른 소중한 가치도 있다. 자존감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나라는 존재를 그대로 인식하지 않고 내가 바라는 나의 이상형을 나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어떤 순간에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 조금 비겁해질 수도 원치 않는 타협을 할 수도 있다.


철학자의 입을 빌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하는 것이 힘들까. 주변의 환경이나 사람들이 진정 문제일까. 아니면 자존감이 없다거나 부족하다고 징징대는 내가 문제일까.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대로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되새기다 보면 자존감의 실체가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것일까.


베스트셀러를 만들어줬던 수많은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다. 미움받을 용기를 가져보니 행복해졌느냐고. 아마도 다양한 대답이 있겠지만 대부분에게서 요요현상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책을 읽어서 충전된 자존감이 일정 시간이 지나고 면 결국 그 책을 읽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자신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러한 자존감에 대한 용기의 설파 이전에도 우리는 충분히 자유로웠고 행복했다. 마땅히 그랬어야 했다. 혹여 불행했더라도, 그것은 자존감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행복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바람개비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람에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바람개비가 아닌 것은 아니다. 바람은 바람개비를 흔들리게 할 뿐. 무풍지대에서도 바람개비의 본질은 그대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그냥 나대로의 자존감>이다. 나를 흔들리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은 지나 가는 바람의 일종일 뿐. 나의 자존감은 바람개비와 같다. 늘 그대로의 나를 위해 존재하는...


바람개비에게 왜 돌아가지 않느냐고 묻는 것은 엉뚱한 질문이다. 우리에게 자존감이 없다거나 낮다고 묻는 것 또한 헛된 질문이다. 오히려 존재 이상의 자존감을 강요하는 것은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실체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누군가에겐 아들러의 관점이 유효하겠지만, 우리가 자존감이 없다거나 부족하다는 착각은 하지 말자.(아마도 자존감이 없거나 낮은 것이 아니라 자신감이 부족해서 그럴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우리의 자존감이 과대 포장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필요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욕망처럼. 존재하는 그대로의 스스로를 인정하는 능력. 타인의 미움을 받지 않고 원만한 관계 속에서도 스스로를 존중하는 힘이 진정한 나의 자존감이다. 다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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