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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Feb 10. 2021

아들들이여, 며느리들의 불편한 물음에 응답하라!

살다 보면 100% 좋기만 한 일이 있을까.

우리는 진짜 흰색과 검은색을 본 적이 있을까.


화성남자 금성여자같은 남녀 캐릭터에 관한 이분법이 맞을까.

혈액형을 4개로 나눠 성격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이들이 말하는 B형 남자는 진짜 나쁜 남자일까.

며느리들이 시월드 때문에 겨울 시금치마저 싫어한다는 게 진실일까.


우리는 수많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면서도 섣부른 자기 주관과 어설픈 확신을 자존감의 승리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1990년대 후반 우리 집 명절 풍경

이른 아침(대략 4~5시에 기상) 차례와 성묘를 위해 새벽부터 할머니, 어머니와 며느리들이 총출동해서 음식을 장만하고 상차림에 동원된다. 그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그전 하루 정도의 수고는 기본이었다. 아침 차례상(평균 4개 정도의 상이 차려진다.)부터 4촌과 8촌 사이의 당숙뻘 친척들의 방문과 연이은 상차림이 반복된다. 밥상과 술상이 교차로 오가고, 설거지의 양은 상상을 초월한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분들에게 인사를 하고 세배를 하고... 하루 동안 밥상과 술상을 합쳐 13~17번 정도(밥상과 술상이 합쳐진 경우도 있으므로). 이때를 회상하는 이들에 따르면, 상 차리고 설거지하다 하루해가 다 갔다고 한다. 형용사로 표현하자면, 아주 피곤한 혹은 지긋지긋한.


2019년 우리집 추석 풍경

2010년부터 돌아가신 분들의 제사를 모두 합쳐서 하루에 모시기로 합의를 했다. 명절도 차례를 지내지는 않고 추석날에 성묘만 가기로 했다. 그것도 약식으로. 명절 당일 집에서 차례상만 차리지 않아도 엄청난 수고를 던다. 이제 얼굴도 모르는 사촌 이상의 분들은 거의 오시지 않는다. 대부분 돌아가셨거나 왕래할 필요성이 없을 정도로 충분히 멀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족 대부분은 명절 당일 아침 충분한 수면을 취한 뒤 평온한 식사를 한다. 음식 장만을 최소화하고 그마저도 온 가족이 함께 한다. 나머지 시간은 커피를 마시고 같이 영화를 보거나 보드게임을 한다. 저녁시간은 마당에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 와인을 마시며 별을 바라본다. 이야기 꽃을 피우다 느지막이 잠이 들어도 아침이 부담스럽지 않다. 그것도 귀찮으면 우리에게는 아점과 브런치가 있다.



기다리던(?) 설 명절이 내일모레다. 코로나로 흉흉한 세상에도 어김없이 해는 바뀌고 나이는 한 살을 더한다. 명절은 화합과 화해의 장이기도 하지만, 가족들 간의 갈등이나 남녀 간의 묘한 대립의 날이기도 하다.


장날마다 찾아오는 각설이처럼 남녀 간의 댓글 전쟁이 또 시작되었다. 지겨울 정도로 똑같은 레퍼토리로 반복된다. 양측의 논리(논리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도 거의 변함이 없다. 물론 기자들이 마땅히 쓸 기사가 없고 누군가의 숨어있는 통점을 자극해서 기사 조회수를 늘린다는 의도가 있었다면. 일단은 그 작전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멀쩡히 잘살다가도 댓글 전쟁이 벌어지면 예비군에서 현역으로 투입되는 인력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그렇다고 매너 있는 의견이 아닌 악성 댓글로 누군가에게 상처는 주지말자. 제발)


흑백논리와 편 가르기처럼 쉬운 갈등 조장 시도는 없다. 또한 이로 인해 발생하는 싸움구경처럼 재미있는 것도 없다. 하지만 어떠한 갈등이나 대립도 소모적인 논쟁과 근거 없는 주장이 그 근저에 자리 잡고 있다면. 양쪽 모두 명목 없는 십자군 전쟁에 이유 없이 동원되는 중세 기사와 같다.


왜 "코로나 시국에서 시댁에서는 오라 하고 친정에서는 오지 말라."는 스토리가 기사화되는 걸까. 


그 반대는 없을까. 처월드 때문에 상처 받는 사위들의 이야기는 왜 보이지 않는 걸까(물론 댓글에는 가끔씩 등장하기도 하지만). 며느리들은 만만하고 사위들은 씨암탉으로 대우받는 존재여서 그럴까. (기사 내용에 의하면) 따뜻하고 다정한 컨셉은 왜 맨날 친정이고 그 이상하고 각박한 컨셉은 항상 시댁일 수 있을까. 현실에는 친정보다 더 살가운 시댁도 많고, 며느리가 자발적으로 가고픈 시댁도 많을 것인데. 왜 시댁(혹은 시부모는)은 십자포화의 과녁이 되었을까.(기사에 의하면 맘 카페의 주된 의견이거나 다수의 기혼 여성들 주장으로 포장된다.)  


그 이유는 각 가정마다 개인마다 관계마다 다양하겠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가부장제나 남성 위주 씨족사회의 관념이 뿌리 깊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문제의 기사를 살펴보면 이유에 대한 설명이 박하다. 댓글 수준이 본문보다 나을 때도 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며느리와 딸을, 사위와 아들을 거의 대등하게 대우하는 가정도 많다. 동등한 대우는 가족 간의 애정과 상호존중에서 온다. 오히려 피를 나눈 가족에 비해 친밀도는 떨어지지만 며느리와 사위를 더 배려하고 존중해주는 가정도 많다. 역시나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적정한 거리두기가 유효하다. 흔히 말하는 딸 같은 며느리, 아들 같은 사위는 환상에 가깝다. 그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남의 집 귀한 자식에게 서로 함부로 대하지 말자. 절대로.)

 


며느리들의 시월드에 대한 명절 대전에서 아들들은 어디에 있을까. 

시댁의 아들이 누구의 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왜 미리 이런 사태를 예방하거나 확전을 막지 않았을까. 혹여 불만이나 갈등 해소가 자신들의 임무가 아니라는 소극적인 판단이었을까. 아니면 적극적으로 친가 쪽 가족의 대동단결을 위한 적극적 제스처였을까. 그렇다고 모든 아들들이 자신의 부모에 대해 침묵하지는 않을 터인데.


기사화된 사연 중에서 최대한 일반화의 오류를 제거하고 나면. 남녀 간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시월드 전쟁이라고 부를 만큼 심각한 케이스는 얼마나 있을까. 비록 그런 사례가 적다 할지라도 그 속사정을 눈여겨볼 필요는 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만을 갖고 문제를 제기한 며느리들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며느리들의 시월드에 대한 불만의 책임은 아들들에게 있다. 반대로 처월드에 대한 사위들의 불평을 방기한 책임은 딸들에게 있다. 어쨌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에게 피 섞인 이들보다 더 과한 성실함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우리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그랬다고 해서 우리의 아내와 딸들에게도 같은 경우를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세대가 달라지고 사람과 관념이 변화하면 생각과 행동양식도 변해야 한다.


최근의 제사문화와 차례문화가 급격히 변화하는 것이 그렇다. 더 간소화되고 생략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렇다고 인간관계가 삭막해지고 각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변화로 인해 서로가 더 살가워지고 마음에 담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 것이다. 예전의 농경사회의 대가족제도나 집성촌에서나 가능했던 의례의식을 핵가족으로 대표되는 지금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5인 이상 모임 금지>라는 방역지침에도 굳이 가족들을 불러 모으는 부모님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부모들의 자식들은 왜 침묵하고 그 배우자들이 불만을 표현할까. 시월드이건 처월드이건 자신의 부모들에게 대해서는 자신들이 답해야 한다. 실제로는 그런 부모님들이 거의 없겠지만, 혹여라도 있다면 그 부모들의 아들과 딸이 부모의 분별없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부모 자식은 연대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다행히 신문기사와 같은 무분별한 부모님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자식들과 손주들에 대한 사랑그리움을 어찌 모를 리 있을까. 늙으신 부모님의 감정적인 허기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그래서인지 방역지침에 부합하는 일정을 짜서 방문하는 가족들의 소식도 기삿거리가 된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자주 자식과 손주들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다. 다정한 스킨십은 없을지라도 화면상 대면을 통해 오고 가는 정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위기의 시대에 서로의 건강과 안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지 않은가.


가족의 연대감도 애정의 농도도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 2021년에 1980~90년대의 가족의 친밀도를 소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나 사회적 거리두기는 가족이라고 예외가 될 수가 없다. 가족은 누구보다 친밀한 집단이라 감염병의 전염 통로로 최적의 상황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기사의 오지랖에도 불구하고, 며느리들의 불만이 최소한의 진실을 담고 있다면. 이제는 그 불평의 상대가 되는 가족의 아들들이 물음에 답할일이다. 부모님께 서로의 안전이 보장되는 시간이 도래하면 그때 보면 된다고 해야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음을 말씀드리고, 지혜로운 일정을 짜서 분산 이동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일이다.


하여 며느리들에게 명절 귀향이라는 무거운 총대를 매게 하지 말자. 아들들이 먼저 나서서 부모님들을 설득하자. 작년 추석에도 그러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이번 설에도 각자 집에서 지내는 걸로 합의하자. 가능하면 의혹만을 제기하고 갈등을 조장하는 못된 기사를 무시하고 댓글을 달지 말자.(마지막 한마디, 자극적인 기사를 애정하고 갈등을 조장하는 언론과 기자들은 대오각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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