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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Apr 06. 2021

좋은 정치는 선거일이 아닌 일상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다

우리는 아니, 나는 비겁의 역사를 살아가고 있다.

어두운 시절. 시민을 겁박하는 불의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못했고 소극적으로 저항하고야 말았다. 


군 시절 부정선거의 현장에서도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대학시절에도 그 선두에 서지 못했다. 구차한 변명을 안고 집회의 후미에서 맴돌았고, 최루탄과 백골단에 쓰러진 학생들을 위해 연단에서 마이크 한번 잡지 못했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진실의 목소리를 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타협의 버스 안에 놓고 내렸다.


그러면서도(그랬으면서도). 늘 답답한 청춘의 미래와 미온적인 현실참여를 고민했다. 한 발은 도서관에 다른 한 발은 시위 현장에 두고, 저녁에는 막걸리집과 호프집을 전전했다. 나름 치열한 열정과 치기 어린 낭만 사이에서 살아왔던 이십 대였다. 불안한 천칭 위의 그 무엇처럼 순간순간을 저울질하며.


가장 부끄러웠던 삶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https://brunch.co.kr/@rok574/206



다시 우리의 삶의 현장에 열풍이 불고 있다. 민주주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 실제 꽃인지 불행의 씨앗인지 모르겠지만 중요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 열풍은 우리 개인의 일상과 밀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영역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모름지기 정치는 시민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총합과 같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거창한 이념을 내세우고 좌파, 우파의 논리를 앞세우더라도 시민의 삶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정치다. 그럼에도 우리의 현실정치는 별도의 차원에 존재하는 이상한 종족의 리그와 같다. 정치와 시민이 분리되고 시민이 국가에 의해 소외되었던 경험은 모두 이들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월호 침몰 현장에서 무기력한 국가의 참모습을 봤다. <세월호, 그날의 기억>에 의하면 전원 구조의 가능성과 희망을 놓친 것도, 방치한 것도 국가였다. 그 이전에 5.18 광주민주화 운동과 쿠데타로 인한 군사정권의 현장에서도 국가는 추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국민을 위함이 아닌 소수의 정치꾼의 욕망을 위해 국가가 비굴하게 존재하였던 모습을. 잘못된 판단이 아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무력한 위정자들의 모습을. 적군이 아닌 국민에게 총칼을 돌리고 학살했던 거악의 모습을 한 정치인들을 보았다. 나쁜 정치와 더 나쁜 정치인들의 민낯이다.

 

우리는 그런 치욕의 역사를 안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국가에 대해 바라는 것이 많다. 왜냐하면 국가는 국민의 생존과 안녕을 위해 존재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 비극의 시간들보다 더 나아져가고 있을까. 우리의 정치인들은 대오각성의 시간을 지나 국민을 위해 다시 태어났을까.  


절체절명의 순간에 국가가 국민을 버리고, 정치인은 시민을 외면하고, 공무원은 엎드려 움직이지 않을 때 그 국가는 이미 망한 것과 같다. 유명한 누군가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분명한 이야기다. 우리는 국가가 망한 것과 같은 트라우마를 여러 번 경험했다. 그나마 수많은 누군가의 피 끓는 정의감과 희생이 있었기에 겨우 민주정체의 외피를 띠고 있을 뿐이다.


정치하는 이들은 시시때때로 이념과 모습을 바꾸고 국민을 위한다는 가식의 명목 아래 끊임없이 환골탈태(?)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정작 모습을 드러내야 할 때는 보이지 않고, 영상과 사진 속에서만 등장하는 수많은 영악하고 비겁한 정치인들을 본다. 물론 이들에게 주권자의 이름으로 권한을 부여한 우리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선거라는 절차로 이루어진 부조리한 정권창출은 사적 이익의 극대화를 숨길 것이고, 국민의 명령은 갖가지 기만전술로 왜곡되어 빛을 잃을 것이다. 만약 정치가 꿈꾸는 일상이 아니라 오물투기의 장이라면 그때 피어날 것은 쓰레기뿐일 것이다. 만약 정치인이 시민의 일상 속이 아닌 시궁창에서 뒹구는 게 숙명이라면 그때 피어날 것은 역겨움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선거나 정치는 이런 것이 아님에도...


소위 정치를 직업으로 생각하는 이들에 묻고 싶은 게 있다.
왜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시민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는가를.
왜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그들에게 권한을 준 주권자들을 외면하는가를.
왜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지역을 분할하고, 정치적 이념을 왜곡하고, 국민을 계급과 계층으로 나뉘게 하는가를 .


국민의 삶이 고난의 길을 겪을수록 정치하는 이들의 존재감은 더 빛난다. 비극이지만, 이것은 참인 명제다.

시민의 일상이 평온할수록 그들의 역할은 줄어든다. 바람이지만, 이것 또한 참인 명제다.




우리는 또다시 시민의 삶이 바뀌어질 수 있는 시간을 앞두고 있다. 하루만 시민에게 충성하고 그 나머지는 시민을 조롱하는 정치인을 골라내야 하는 선거일이 코앞이다. 국가의 존재 이유와 정치하는 이들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아는 이들을 알아보는 것은 오로지 시민의 몫이다. 제대로 된 선택만이 그들에게 선동당하고 이용당하는 삶을 그치게 할 수 있다.


정치는 선거일 당일만이 아닌 시민들의 일상에서 피어나야 할 꽃과 같다. 그 꽃의 향기와 아름다움이 시민의 삶 속에서 시민을 이롭게 할 때 정치는 제 몫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는 악취로 오염된 일상을 보고 싶은 욕망은 없다. 악취를 풍기는 정치인들이 위선의 모습으로 국가를 버리고 시민을 외면하는 현장을 보고 싶은 마음 또한 추호도 없다.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을 한 밑천만으로 다른 노력 없이 평생을 살아가는 이들도 문제지만, 그런 고난의 청춘마저 없이 꽃길만 걸었던 이들이 시민의 일상을 위한다며 정치를 말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무릇 좋은 정치란 아이들과 젊은 청춘들, 부모들과 노인들을 위하고 그들의 일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들을 버리고 부모들을 힘들게 하고 노인들의 노후를 불안케 하는 행위는 정치라 말할 수 없다. 좋은 정치는 젊은 청춘들에게 희망을 주고 다양한 일자리를 제공할 기반을 고민하며, 중장년층의 집 문제와 아이들의 교육문제에 관한 해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런 것이 정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정치가 "수혜자인 국민"이 아닌 "정치하는 자들"을 위해 존재할 때 그것은 독재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2021년의 어느 하루에도 이들은 우리를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지는 개, 돼지"로 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의 망각 습관과 잘못된 선택을 탓해야 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다시 이들의 감언요설과 이간질에 귀를 기울이는 어리석음을 보일 수도 있겠다. 이들은 혼돈의 프레임을 짜고 옳고 그름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진흙탕 같은 상황으로 우리를 밀어 넣을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치인은 무능한 국가를 만든다. 자신들의 안위와 정권욕을 시민들의 생존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위정자가 될 때... 우리는 늘 <세월호에 승선한 시민> 일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 부동산과 주식, 예금잔고를 시민의 일상보다 더 중시하는 정치인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들의 미래는 미세먼지 속에 있을 것이다. 불행의 역사는 반복되고 되풀이된다. 우리의 생각이 깨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핍박받는 개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 또한 참을 수 없는 진실이다.

 


무관심이 무책임을 부른다.
https://brunch.co.kr/@rok574/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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