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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Nov 04. 2019

무관심이 무책임을 부른다

정치에 무관심이 인생의 무책임을 이끈다

#1.

친한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식사나 술자리를 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눈다. 대화의 주제는 직장생활의 애로나 가정생활의 문제점에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분야까지 다양하다. 서로의 눈높이, 관심의 대상이나 상식의 수준이 다르다 보니 특정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는 생각보다 적다.


"어이 김 교수, 메이저리그 류현진 어제 경기 봤어?"

"당연하지, 밤새워 봤는데... 역시 잘하더라고... 연봉값을 하는 거지. 다음 경기는 언제 하지?"

"저기 성태야, 요새 핫이슈인 검찰개혁이나 공수처 설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음..... 저기... 술이나 한잔 하지...ㅎㅎㅎ"

"사립유치원 감사 문제나 사립대학의 학내 유보금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 음.................."


그래서 주된 대화의 주제는 스포츠나 부부나 아이들의 문제에 한정된다. 정치에 관한 얘기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의 정치적 견해나 관심 방향, 참여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지, 어느 정도 정치적인 참여를 하고 있는지는 금방 드러난다. 어떤 이들은 유난히 국내외를 불문하고 스포츠경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다른 이들은 주식이나 자산 불리기 등에 눈을 반짝인다. 그러다가도 현재 진행되는 정치상황에서 무엇을 느끼고 뭐가 문제며, 자신들의 견해는 뭐냐는 얘기가 나오면 침묵하는 이들이 많다. 이것은 정치적 무관심이나 정치에 대한 환멸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태도가 불러오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진정 궁금해진다.


정치권력은 국민들의 관심보다는 무관심을 원할 것이다. 정치에 국민의 시선이 모아질수록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난 정권들은 국민들의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각종 프로스포츠를 유행시키고 각종 사행산업에 대한 규제를 소홀히 했다. 결국에는 다수의 국민들은 재미없는 정치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현실적인 즐거움에 빠질 확률이 더 컸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현실이 바로 그랬다. 이삼십 년 전부터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다양한 즐길거리들은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멀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다행히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 2016년의 촛불혁명을 통해 정치를 시민들의 관심의 영역에 두게 되었다. 그 위대한 여정에서 시민들은 정치행위의 주체였고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대통령 한 사람만 바뀌고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들이 변하지 않고 있다. 우리 현실 어떤 면이 문제일까?


정치는  우리의 일상이다. 따라서 시민들의 관심에서 정치가 멀어질 때 우리의 일상도 정치로부터 멀어진다. 이때부터 정치는 정치하는 자들의 선민의식이 배어든 특별한 권력으로 바뀐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리그에서 그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특권을 부여하기 위해 정치를 시민들로부터 격리시킨다. 그들은 정치를 낯선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정치와 일상 사이에 계속적으로 거리두기를 시도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비정상화를 막기 위해 멀어진 정치를 우리 일상의 영역으로 다시 데려와야 한다. 시민들이 서있는 광장에서 정치를 얘기하고 정치하는 이들을 비판하고 감시하여야 한다. 이때부터 우리의 일상에 정치가 살아 숨 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치는 정치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일상 속의 그 어떤 것들이다.

  



#2.

우리의 정치나 정치인들의 무엇이 문제일까? 왜 시대가 변하고 국가적 위기가 반복돼도 그들의 천박한 의식은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일까? 조정래의 <천년의 질문>에서 다음과 같이 묻고 답한다.


"스웨덴과 한국은 국회와 정치인들의 태도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스웨덴 정치인들이 이렇게 깨끗한 정치를 하게 된 비결은 무엇입니까?"

"비결? 비결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약간씩 있을 뿐 서유럽 여러 나라들의 정치상황은 거의 비슷합니다. 그 나라들이 오늘날과 같이 되는 데는 지난 400여 년에 걸친 노력이 있었습니다. 특히 시민들의 자각과 노력이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 자각과 노력이란 다름 아닌 시민들의 직접적인 감시와 감독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은 감시와 감독 그리고 견제가 없으면 반드시 횡포하고 부패하고 타락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고 , 또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 좋은 증거가 봉건 시대의 절대왕정들입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란 시민들이 자유와 평등과 평화를 조화시켜 창조해 낸 화초이고, 그 화초는 철저한 감시와 감독을 하지 않고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수 없는 것입니다. 서유럽 여러 나라의 시민들은 서로서로 배우며 그 감시와 감독 조직을 철저하게 가동시켜 오늘날의 민주정치의 꽃을 피워낸 것입니다."

조정래, <천년의 질문 3> 중에서


스웨덴처럼 잘되어있는 정치 시스템과 우리나라를 비교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일까. 양국 정치인들의 질적 차이는 무엇 때문일까? 단순한 비교를 해보면, 스웨덴은 의회 의원에게 개인비서나 보좌관이 한 명도 없다고 한다. 고작 의원 두 명당 입법조사관 한 명이 전부라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국회의원 한 명당 유급보좌관 숫자만 8명이다. 이토록 많은 인원과 세금을 쓰면서도 의원 개인당 입법안 발의 개수가 적은 것(거의 없거나)을 보면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가 궁금해진다.


스웨덴 같은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 의원들이 엄청난 특권을 누리면서도 그토록 입법이나 의회활동에 그토록 소극적인지 연구를 해볼 일이다. 갑질을 통해 선심성 외유를 너나 할 것 없이 즐기고, 선거 전날까지는 국민의 충실한 종복임을 맹세했다가도 당선된 이후부터는 지엄하신 의원나리가 되는 성품 또한 돌아볼 일이다. 임기 4년 동안 단 한건의 입법안 발의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재선을 꿈꾸는 이들의 후안무치는 어디서 오는 별난 자존감일까.


한편으로 국가나 국민의 이익보다 정당 자체의 이익 추구에 몰두하는 그들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유아기적인 정쟁으로 툭하면 국회가 아닌 곳에서 국민정서와 동떨어진 행동을 하는 그들을 보면 우리의 눈살은 저절로 찌푸려진다. 국민들이 정치상황에 한숨을 쉬고 환멸을 느끼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다면 그들의 의회활동은 성공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이유든지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들이 많아지는 것은 문제다. 무책임한 국회나 의원들을 비롯한 정치권력을 견제할 장치나 시스템 부재의 정치현실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정치는 국민을 배신하고 정치인들은 국민 위에 군림하려 할 것이다. 우리의 무관심은 최악의 부메랑으로 우리를 향햐여 빠르게 날아올 것이다.


당리당략에 휩싸여 민생법안과 예산안 문제를 방치하고 있는 국회를 보라. 의원 개인의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권창출에만 골몰하는 의원들을 보라. 기업집단의 이익에 앞장서고 국민의 불이익에는 눈을 돌리는 국회와 정치권력을 보라. 이런 것들로 버무려진 우리의 불행한 현실은 우리의 무관심이 가져온(혹은 가져올) 반갑지 않은 선물이다.




#3.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치권력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깨어있는 시민들이다. 시민들이 만든 시민단체의 상시적 연대가 절실하다. 시민이 깨어나서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될까?


"국민들의 감시 감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모든 권력자들은 그 순간 광야의 포식자 하이에나로 돌변하게 됩니다. 그건 권력자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권력 자체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국민이 감시 감독을 소홀히 하는 직무유기를 저지르는 것은 모든 권력자들에게 맘대로 직무유기를 저지르라고 기회를 주고 허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국민이 저지르는 가장 큰 어리석음과 망상은 정치인들이 자기네가 원하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주리라고 믿고 방심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자기 인생에 무책임한 것입니다."

조정래, <천년의 질문 3> 중에서


지금 여의도에서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을 가진 이들은 어느 나라의 정치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들의 방종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원로작가의 말씀처럼 국민의 감시와 감독뿐이다. 좌우나 진보나 보수 막론하고 광장에서 의견을 개진하고 시민들이 연대하여 시민단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시민단체들이 정치권력의 일거수일투족을 투명하게 감시할 때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더 쉽게 다가올 것이다. 정치권력이 국민의 눈과 귀를 두려워하고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할 수 있게 하려면 깨어있는 시민들과 시민단체가 훨씬 더 많아져야 한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광장에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하고 있다. 광화문 광장과 서초동 사거리, 여의도 국회 앞에서 정치권력과 국가기관의 개혁을 위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특정인들의 소유물도 아니고 특정 계층의 향유물도 아니다. 국민의 감시 감독과 시민단체의 활성화에 가장 큰 역할을 하여야 할 분야는 언론이다. 언론이 국민의 눈과 귀가 되고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때 정치권력은 시민과 시민단체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언론의 적극적이고 올바른 역할이 너무 당연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할 말이 없다. 빛과 소금 같은 언론의 역할은 고사하고 오히려 사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선봉대 역할을 하는 대부분의 언론들. 이들은 대한민국의 가장 큰 적폐 집단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언론의 자유는 결코 자신들의 비겁함을 감싸는 갑옷이나 구차한 변명의 도구가 아니다.


결국 시민들과 시민단체가 정치권력이나 언론을 제대로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천년의 질문>의 주인공인 장우진 기자와 같은 정의롭고 용감한 기자들을 현실에서 자주 마주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런 기자들이 태어날 수 없는 우리의 정치적 토양이 문제일까. 아니면 그런 기자와 기사를 바라는 우리의 염원이 부족한 걸까? 생각해보면, 참다운 기자정신이 실종된 기자들은 단순한 찌라시나 선전지 작성자에  불과하다. 그저 기자 시험에 합격해서 밥벌이하는 직장인에 불과하다면, 그들이 신봉하는 진정한 저널리즘이나 기자의 역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다양한 집회 현장에서 보이는 시민들을 보면 가슴이 뛴다. 그들의 역동적인 구호나 눈빛을 보면 우리의 광장에 민주주주가 제대로 뿌리내리고 있음을 느낀다. 행동하는 양심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편안한 거실에서 민주주의를 얘기하는 이들보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광장에 온 부모나 나 홀로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훨씬 민주시민에 가깝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정치인들은 절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우리가 정치에 무관심하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무책임한 것이다. 우리는 생각과 행동을 멈춰버린 좀비의 시간에서 벗어나서 광장에서 단체에서 정치를 비판하고 정치권력을 감시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일상이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서 의미 있게 살아 숨 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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