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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Jan 13. 2023

잘 놀기 위해 명퇴한 친구의 유쾌 발랄한 시간표

"후회 없이 놀고먹기 위하여 직장을 그만뒀다."


어느 날 친한 친구로부터 날아온 카톡 문장이다.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고, 배부르다 못해 배 터지는 소리가 다 있는가!  무슨 시대착오적이고 돈키호테적 데카당스가 다 있단 말인가!


남들은 가능하면 더 오랫동안 남아있기 위하여 기를 쓰고 살아가는데... 용기인지 만용인지 그 실체가 궁금했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유복한 집안의 자제도 아니고, 부동산이나 주식 재테크에 성공해서 은행잔고가 두둑한 것도 아니고. 난데없이 로또에 당첨된 것도 아닐터인데. 잘 다니던 억대 연봉의 직장을 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도대체 친구의 속셈은 뭐란 말인가?


그 친구가 자신의 일과표를 말로 보여줬다. 초등학생의 방학계획표 마냥 즐거움이 배어 나오는 그림 스케줄이었다. 단순하게 인물과 시간만 등장하는 원시적인 시간표였지만, 자신의 욕망이 그대로 드러났다. 얼마만인가, 이토록 단순한 계획표를 다시 보게 된 것이...

혼자 운동하고 음악 듣기
지인들과 운동하고 밥 먹기
친구들과 놀며 술 마시기
가족과 여행 가서 먹고 놀기
혼자 책 보며 놀고먹기(혼술)
친구들과 산에 가서 놀고먹기
놀기 ᆢ 먹기 ᆢ만나기 ᆢ운동하기 ᆢ적당히 쉬고 다시 놀기....


아! 얼마나 가슴 터지게 원하던 스케줄인가! 진정 이러한 선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기를 바라야 할터인데... 대부분은 이런 행운을 타고나지 못한다. 이런 바람직한 뫼비우스의 띠가 존재한다면 수많은 자발적 참여자가나타날 것이다. 최소한의 경제적 여건과 건강만 허락한다면, 저런 시간계획표는 누구나 소망하는 유토피아적 환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누구나 그러한 꿈을 꾸고 소망하고 행동을 계획하지만.... 마음속의 동요나 후회로 끝난 경우가 많을 것이다. 존경하는 친구처럼 저리 무모할 정도로 내지르고 사고 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의 놀고먹기 계획표가 더 대단해 보였다.


이 친구가 27년을 근무했던 회사는 누구나 다 아는 정유회사. 이 회사는 정년도 보장되고 있었다. 물론 법정 정년을 모두가 보장받는 것은 아니겠지만, 좀 더 있다가 나올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회사 차원의 정리해고나 명예퇴직의 권유도 없었고, 친구 스스로 걸어 나온 것이다. 깜짝 놀란 까닭에 진지하게 다시 이유를 묻자,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마음 편하게 놀고 싶다."


물론 이 친구는 회사 다니는 동안에도 잘 놀고 잘 어울리며 먹고살았다. 특유의 살가운 성격 때문에 회사 동료들과도 잘 지냈다. 배드민턴에 특별한 재능을 가져 여러 동호회 친구들과도 후회 없는 친목을 도모했다. 수많은 땀방울을 떨구고 더 많은 술잔을 기울이며 다졌던 우정은 형제애 이상이었다. 그 친밀함은 지금도 친구의 인적 네트워크를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직급이 올라가고 연봉이 상승곡선을 그리더라도 조직생활은 불편함이 기본이다. 때로는 본능과 자유가 억압되고, 알량한 월급의 이름아래 고개를 숙일 때가 많다. 누군가는 월화수목금금금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자존심과 승진을 바꾼다. 때문에 마음 놓고 놀 수는 없는 게 회사생활이다.


명예퇴직에 그럴싸한 퇴직금 얘기가 시중에 떠돌던 때라... 친구에게 물었다. 얼마를 받고 나왔느냐고. 하지만 어마무시한 퇴직금을 예상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외국계 회사라 자기 의사로 그만둔 사람에게는 명예퇴직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최근 몇 년 전부터 소정의 명예퇴직수당이 신설되어서 일부 혜택을 받은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친구의 명퇴금은 철저히 비밀에 싸여있다. 그 금액이 얼마이던간에 친구가 간절히 원했던 "자유와 놀 수 있는 시간"을 얻었으니 뭐가 중요할까.


친구는 덧붙여 자신의 소신과 향후 계획을 얘기했다.

"놀고먹는데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지는 않는다. 거창한 해외여행을 꿈꾸는 것도 아니고, 가족과 친구들과 소소한 어울림에 큰 목돈은 필요 없더라. 좀 더 덜 쓰고 아끼면서 먹다 보면, 쌓인 자산 포트폴리오가 없더라도 그렇게 불안하지는 않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 사용법과 그 시간을 즐거움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겠는가!"(이쯤에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누구나 알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용기와 만만치 않는 실행력이 필요하다.)


"생활체육을 통해 친해진 지인들과 끊임없는 교류와 소통(말은 거창하지만 주로 막걸리 마시는 자리)을 하고, 가족들과도 자잘하게나마 수도권 근교나 국내 여행을 통해서 시간을 보내고.... 마음껏 책도 읽고 걷고 하다 보면 또 다른 삶의 방식이 생각나지 않겠는가"(연락하면 언제든지 거절하지 말고 나오란 얘기였다.)


친구에게 가장 궁금한,

놀고먹고 그 이후의  경제활동(계획)에 대해 물었다.

"글쎄, 지금은 아무런 계획이 없고. 놀다가 지치면 그때는 무언가 다른 것을 해볼 생각을 할 것 같은데... 놀고먹고 즐기는 것도 한때고,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니. 그동안 밥벌이 때문에 못해본 것을 실컷 해봐야지~~~"(친구의 말이 백번 옳다. 힘 있고 놀고 싶을 때에는 돈과 시간이 없고, 돈과 시간이 있을 때는 힘이 없는 게 소시민의 삶이다.)


친구라고 무작정 놀고먹지는 않을 것이다. 무언가 보이지 않게 치밀한 계획과 준비작업을 해왔을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후회 없이 논 다음에 실행한다면, 친구의 놀기 위한 퇴직 계획은 이미 성공한 것이다. 아직은 놀고 싶은 욕망과 힘이 있는 때이므로, 대책 없이 놀기에 아직 늦지 않은 시기다. 밥벌이에 대의명분을 내어주는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그런 계획조차 없지 않던가!


우리는 말로는 유희적 인간이라 학자연하며 살아간다. 그 무언가에 쫓기는 신세이면서도 사냥꾼이라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어찌 되었건, 이런 태생적 본능조차도 꿈만 꾸다 마는 대부분의 소시민들에게 마냥 부러운 인생철학이었다. 최근 친구는 시청역 부근에서 매주 토요일 진행되는 어떤 시민집회에서도 목소리를 높였노라고. 모처럼 시간이 남으니 오히려 하고 싶은 것이 줄을 서있노라고. 막걸리를 마시며 후일담을 전했다.


우리는 늘 소망한다.
우리에게 위험하고 금지된 것을.
놀고먹고 즐기는 것은 가장 위험한 희망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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