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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May 12. 2023

오월의 레시피, 기억의 보고(寶庫)를 세우다

짠한 오월을 위한 아빠의 매콤 레시피, 닭육개장

“엄마, 저 육개장 한 그릇 더 주세요! 밥도요...”


밥상을 차린 엄마, 아빠가 기다린 그 한마디. 아이들의 얼굴과 엄마의 미소 사이로 그림 같은 저녁 풍경이 지나간다. 배고픔은 몸의 습성이지만, 마음속에 파동을 그려 넣는 것은 손길의 관성이다. 밥과 찌개와 반찬 모두가 그 손길 끝에서 빛을 발한다. 모락모락 사연이 피어나는 가족들의 저녁 밥상이다.


잘 만들어진 요리의 맛과 냄새, 모양새는 잠든 오감을 깨우고 침샘을 자극한다. 집 나간 입맛을 데려오고 의기소침한 가족에게도 든든한 활력을 준다. 원재료와 부재료가 잘 어우러진 국물요리는 한 첩의 보약과 같다. 딱히 먹기 좋은 계절을 따질 필요 없이 사시사철 입맛을 살려주는 마음 넉넉한 음식. 닭육개장이 그렇다.


“엄마, 오늘 저녁에는 뭐 먹어요? 나는 치킨이나 피자는 싫은데... 더 매콤한 거 없나?”


닭을 주재료로 한 닭육개장은 화합과 어우러짐의 상징이다. 소고기로 만들어진 육개장도 맛나지만, 닭고기 육개장이 지닌 얼큰함과 시원함은 따라오지 못한다. 아마도 붉고 흰 육류 사이의 어떤 차이점 때문일 터이지만, 한번 맛본 아이들의 입맛은 냉정할 정도로 정직하다. 평소 나물을 꺼려하던 아이들도 국물 속에 담뿍 담긴 각종 나물을 고기보다 먼저 건저 먹고야 만다.


닭육개장을 만드는 과정은 지난한 수고를 필요로 한다. 만들어가는 과정 또한 단계별로 시간과 섬세함을 요한다. 어느 가정에서나 자주 해 먹기 힘든 이유다. 적당한 크기의 싱싱한 닭과 나물, 한나절 정도의 시간이 준비돼야 한다. 인스턴트식품에 익숙한 아이들에게는 기다림과 배고픔이란 숙제가 부여된다.


“아빠, 닭살을 어떻게 발라야 돼요? 이거 그냥 소금 찍어 먹어도 맛있는데... 헤헤헤.”


첫 번째는 닭 한 마리를 잘 손질해서 마늘과 파와 통후추를 넣어 끓이고... 두 번째는 푹 삶은 닭의 뼈와 살을 먹기 좋게 바른다. 적당히 식은 닭의 살을 바르는 것은 아이들의 몫이다. 닭 삶은 육수를 체에 걸러서 시원한 맛을 내주는 비법분말(멸치와 새우, 버섯, 다시마 가루)까지 더하면 최고의 육수가 준비된다. 세 번째는 나물 서너 가지를 준비해서 잘 삶고 무쳐서 각각의 맛을 고조시킨다. 마지막은 준비한 고사리와 숙주나물, 느타리버섯과 콩나물, 향과 품격을 높여주는 대파와 고추기름까지 넉넉히 넣고 한소끔 끓인다. 이 한 그릇에 우주가 있다면 과장일 터이지만, 어지간해서는 포기하지 못할 한 끼는 될 것이다. 어느 시인이 그러지 않았던가! 한 끼를 대충 때우면 영원히 한 끼를 잃는 거라고.


우리 집 네 명의 아이들은 때때로 음식 만드는 작업에 동참하면서 부모의 가사노동을 이해하고 자신의 허기를 다스린다. 자신들의 한 끼가 어떻게 차려지고 그 밥상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몸으로 익힌다. 체화되지 못한 깨달음은 지나가는 바람과 같다. 그 느낌을 몸과 마음으로 알아차리고 알알이 체험할 때 우리는 먼 훗날에도 기억의 창고에서 그때의 감정을 꺼낼 수 있을 것이다.  


“애들아, 밥 먹어라. 셋째는 상 닦고 반찬 가져다 놓고, 막내는 상위에 수저 좀 놓고....”


방에 있는 아이들에게 어떤 메뉴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매콤한 유혹은 까칠한 중2도 시니컬한 고3도 밥상으로 불러들인다. 한참 부모와 기싸움을 벌이는 중학생 아들과 대학진학의 중압감에 힘들어하는 고3 딸에게도 참을 수 없는 식욕이 일었으리라. 칼칼한 매콤함이 마음속 격정을 진정시키고 그들을 밥상으로 불러왔으리라. 육개장 한 그릇과 뜨신 쌀밥에 그들은 안도감을 느꼈으리라. 가정의 품이 이러하고 부모의 사랑이 저러하고 따뜻한 시간이 되었으리라. 예전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해주신 백열전등 아래의 그 저녁 밥상이 그러했듯이. 투박한 음식 몇 가지가 몸의 시장기와 마음의 허기를 동시 채워 주웠던 그 시절이 아련하다. 그분들의 애정 어린 손길을 우리의 밥상 위에서 계속 느끼는 것은 어떤 기시감일까!


"아빠, 이 맛은 꼭 시골 할머니가 해주신 거하고 똑같은데요. 진짜로 신기하네..."


육개장은 자체가 훌륭한 하나의 완성품이라 다른 반찬이 필요 없지만, 잘 익은 파김치나 부추김치를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멸치액젓 향이 강한 파김치와 부추김치는 바로 담갔을 때나 익었을 때의 풍미 모두 미식가들의 입에 오르는 호사를 누린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우리 집 식탁 위에는 시골 어머니가 보내주신 김치의 온도가 살아있다.


  유난히 입덧이 심했던 아내의 임산부 시절은 입덧과 입맛과의 전쟁이었다. 이럴 경우 대부분 친정 엄마가 해준 음식을 그리워하지만, 우리 집은 닭육개장과 소고기뭇국이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 각종 나물이 들어간 육개장은 임산부의 보양과 장 건강에도 좋았다. 혹여나 남아있을 임산부의 우울도 한방에 날려주는 것은 덤이었다. 그 덕분에 반복되는 입덧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네 명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꽉 들어찬 6인용 밥상을 둘러보면 뿌듯함에 절로 밥맛이 살아난다.  


"우리 막내는 오늘 학교에서 재밌는 거 있었어?, 큰아들은 수학공부는 할 만하고?"


저녁을 먹다 보면 하루에 있었던 다양한 얘깃거리가 반찬이 된다. 숟가락과 젓가락 사이에 갓 피어난 벚꽃처럼 대화가 오간다. 생각해 보면, 가족들의 관계도 이렇게 육개장 속의 재료들처럼 무르익고 섞여서 조화를 이뤄왔다. 자주 따뜻하게 보듬고, 때로는 매콤하게 눈물 흘리며, 시시때때로 팝콘처럼 웃으며...


노사연의 노래에 '사람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어쩌면, 가족의 애정도 시간의 너울 속에 시나브로 익어가지 않을까? 부모와 아이들의 사랑 또한 싹을 틔우고, 가지와 꽃을 피우고 과실을 맺지 않을까. 그 애정 한가운데 단출한 아침밥상과 정성껏 차려진 저녁밥상이 있었다.   

  

음식도 각기 어울리는 재료와 간이 있듯이 가족들의 화목도 밥상의 온기를 통해 자기만의 좌표를 찾아간다.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가슴속에서 발화되고 성장한다. 스스로 빛나지만 어우러지며 빛나게 해 줄 수 있다는 작은 교훈을 육개장에서 배운다. 아이들 마음속에 발효된 음식의 추억이 미래의 어느 저녁밥상에 그리운 선율로 깔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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