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ower of Unlearning : 디자인 관성 거스른 디자인
“The illiterate of the 21st century will not be those who cannot read and write, but those who cannot learn, unlearn, and relearn." - Alvin Toffler, futurist and philosopher
"21세기의 문맹자는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잊고-다시 배우는 과정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 앨빈 토플러, 미래학자 겸 철학자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만 집중한다. 과거에 도움이 된 사례나 성공 공식, 그간 익혀온 좋은 디자인의 개념에 매여있기도 한다. 하지만 더 나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지식을 잊는 과정을 뜻하는 ‘언러닝(Unlearning)’이 필요하다.
* 이 글은 쿠팡의 UX Head ‘Jonathan Chung’의 WCCD 강연을 바탕으로 각색한 글입니다.
러닝(Learning), 언러닝(Unlearning), 그리고 리러닝(Relearning)
최근 3년 간 데이터드리븐 방식이 국내에도 많이 도입되면서, 디자이너들이 고객 경험을 설계할 때에도 데이터로 증명할 수 있는 논리적인 디자인에 더욱 신경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데이터를 본다는 가정에는 ‘내 디자인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고 싶다’는 니즈가 함께 담겨있다. 여기서 디자이너들이 논리의 근거로 삼는 기준은 무엇일까?
우리는 전공에서 배운 공식, 업무에서 얻은 성공 사례들을 통해 자신만의 논리를 쌓아왔다. 바우하우스와 디터람스, 애플 디자인과 같이 ‘심플‘하고 ‘일관성‘있고 ‘혁신적‘인 디자인을 좋은 디자인의 공식으로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나 역시 그 공식을 믿었고 실제로 여러 프로젝트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공식을 적용한 사례에서 고객 경험을 해치는 결과들이 이어지자 내 논리에도 균열이 생겼다. 이제껏 스스로 정해놓은 프레임에 갇혀 판단하고 있던 건 아닌지, 논리의 기준을 점검해봐야 할 타이밍이었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임할 때 지금까지 학습해온 것들과 머릿속에 자리 잡은 디자인의 관성을 버리면 머릿 속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바로 ‘언러닝(Unlearning)’ 하는 과정이다. 그 안에 ‘리러닝(Relearning)’ 한 것들을 채우면 결국 본인이 정해놓은 프레임에서 나아가 더욱 가변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
쿠팡 프로덕트 디자인에서 러닝, 언러닝, 그리고 리러닝 한 사례들을 크게 Simplicity, Consistency, Innovation 이 세 가지 관점으로 나눠 소개한다.
많은 디자이너들은 고객경험을 설계할 때 정보를 잘 보여주기 위해 심플한 디자인으로 간소화해 표현하려 한다. 하지만 실제 고객 관점에서는 심플해 '보이는 것'보다 심플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빠른 의사결정을 돕는다.
쿠팡의 신선식품 서비스인 로켓프레시를 처음 선보였을 당시, 판매 상품의 종류가 많지 않았다. 몇 분기 동안 다양한 종류의 상품을 입고하여 대형마트보다 더 많은 제품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지만, 앱의 탐색 화면에서는 여전히 가장 상위 카테고리만 노출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고객들은 로켓프레시 안에 많은 셀렉션이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파악하지 못했다. 고객들이 로켓프레시 안에서 다양한 카테고리 제품군을 한눈에 파악하고 카테고리 간 쉽게 이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내비게이션 개선 작업이 이뤄졌다.
여기서 문제, 아래 To Be 화면 중 어느 타입에서 고객들이 더 많은 반응을 보였을까?
A안 - 각 카테고리를 큰 이미지로 쉽게 파악할 수 있어, 탐색에 용이한 경험을 줄 것이다.
B안 - 정보들이 빼곡하게 밀집되어 카테고리 구분이 어렵기에, A안 대비 효율이 낮을 것이다.
위와 같이 예측한 가설로 실제 고객들을 대상으로 A/B테스트를 진행했다.
A/B테스트 결과, 예상과 달리 고객은 B안에 더 좋은 반응을 보였다. 프로젝트에서 목표했던 ‘카테고리 간 이동 횟수’가 월등히 증가했고, 전체 거래액 역시 B안이 더 높은 결과를 가져왔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
분석해 보니, B안은 각 카테고리 안에 어떤 세부 항목들이 있는지 텍스트로 바로 확인하면서 한눈에 더 많이, 더 빠르게 인식할 수 있었다. 로켓프레시라는 큰 스토어에 어떤 상품군들이 구성되어 있는지 전체적인 볼륨을 확인하기에 더 편했던 것이다.
오프라인 마트에서 간판 텍스트를 보고 원하는 코너로 이동하는 것처럼, 고객들에게는 텍스트만으로 카테고리와 상품군들을 파악하는 것이 더 빠른 의사 결정을 도왔다. 다시 말해, ‘심플해 보이는’ 디자인이 아닌 ‘심플하게 받아들여지는’ 디자인이 고객에게 더 좋은 경험을 줄 수 있었다.
이로써 정보를 전달할 땐 심플해 보이는 디자인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고객의 니즈를 함께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시각적으로 심플한 디자인(Visual Simplicity)'을 하기에 앞서, ‘심플하게 인지할 수 있는 디자인(Cognitive Simplicity)'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을 리러닝 했다.
고객 경험을 해치지 않으려면 인지적인 측면에서 일관된 정보들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했다. 통일성 있게 구축된 서비스에서 고객은 일관된 경험을 통해 브랜드를 학습한다. 그러나 고객에게 조금 더 확장된 경험을 제공해야 할 경우 ‘Consistency’의 관점을 버리는 시도도 필요하다.
한 분기 동안 로켓프레시는 내비게이션 작업과 더불어 아주 많은 개선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우선 기존 프로모션 배너들만 쭉 붙어있어 마치 마트 전단지 같았던 스크린부터 개선했다. 다양한 카테고리를 탐색할 수 있는 메뉴뿐만 아니라, 맞춤형 큐레이션 및 추천 위젯과 같은 캐러셀을 추가해 실제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경험을 더하기로 했다. 개선 이후 로켓프레시 이용 고객이 빠르게 늘어났고, 기존에 직접 키워드를 검색하여 상품을 탐색하던 고객들이 로켓프레시 홈에 들어와 메뉴나 큐레이션 위젯을 살피며 브라우징 하기 시작했다. 당장 필요한 게 없더라도 ‘오늘 가볍게 장이나 볼까?’ 하며 둘러보는 패턴이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더 많은 카테고리를 추가하며 지속적으로 로켓프레시의 상품군을 늘리던 중, 로켓프레시 안에 ‘생활용품’ 카테고리를 추가가 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브랜드 일관된 경험을 해칠 수 있다며 이 의견에 반대했다. 로켓프레시의 신선식품과 로켓프레시가 아닌 일반식품을 구분하는 것부터 고객에겐 어려운 과제인데, 여기에 샴푸나 화장지, 가글과 같은 생필품이 들어가면 더 복잡하게 느껴질 거란 우려였다. 또 생활용품이 로켓프레시 안에 포함된다고 가정했을 때, 로켓프레시와 로켓배송을 어떻게 구분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비즈니스적으로 UX에 큰 혼선이 없을 것이란 가설을 바탕으로 생활용품이 추가된 디자인으로 테스트를 시도했고, 이 역시 예상과 달리 개선된 디자인의 결과가 훨씬 더 좋았다. 이 기능이 런칭된 후 고객은 더 편리하게 로켓프레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로켓프레시는 신선식품으로만 15,000원 이상 채워야 새벽까지 상품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있는데, 식품으로만 채우기 힘들었던 액수를 생활용품으로 채울 수 있어 최소 주문가능금액에 쉽게 도달할 수 있는 포인트가 생긴 것이다. 심지어 생필품은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미리 쟁여둘 수 있어 구매에 부담이 덜하다는 이점도 있었다. 고객에게 로켓프레시란, 쿠팡 안에 있는 하나의 마트다. 그들은 카테고리 위계나, 로켓프레시와 로켓배송의 차이를 하나하나 이해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로켓프레시의 아이덴티티 ‘신선식품’을 기준으로 그 안에 신선식품이 아닌 카테고리는 들어올 수 없다는 일관된 규칙을 버렸다. 우리가 만든 규칙은 우리가 언제든 고객의 더 나은 경험을 위해 바꿔나갈 수 있다. 앞선 사례는 오히려 일관성을 버림으로써 마트 장보기와 유사하면서도, 장바구니를 더 쉽게 채울 수 있어 고객들에게 더 나은 경험을 줄 수 있었다.
일관된 고객 경험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일관적인 경험을 고집하다 보면 어느 타이밍에서는 내가 만든 시스템이 고객에겐 또 하나의 번거로운 과정이 될 수 있고, 몇 번 더 해석하게 만드는 어려운 장치가 될 수도 있다. 어느 상황에서는 고객이 최적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Consistency’ 틀을 깨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흔히 ‘혁신’을 떠올릴 때 기존에 할 수 없던 것을 가능케 하고, 어떤 프로덕트를 완전히 바꿔 새롭게 재탄생시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혁신적인 프로덕트는 보통 단기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MS Office, Google Android, Google Material Design 모두 차세대 디자인 혹은 새로운 시스템을 출시하려는 큰 목적을 갖고 오랜 기간에 거쳐 준비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혁신적인 프로덕트가 출시될 때마다 고객들은 새로운 기능, 새로운 하드웨어, 혹은 새로운 Look & Feel을 보며 열광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디자이너는 완전히 새롭거나 한층 진화된 프로덕트 디자인을 위해 마치 하드웨어를 디자인하듯 ‘소장 가치를 위한 디자인’에 치중하게 된다. 그러나 서비스를 디자인 할 때에는 소장 가치에 연연하기보단, 고객들의 ‘사용성’에 더 초점을 두고, 불편함을 개선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평소 즐겨쓰던 지도 앱이 하루 아침에 다른 모습으로 개편했다고 가정해 보자. 출근길에 당장 이 개편된 지도를 보면서 이동해야 한다면 당혹감과 함께 큰 불편을 느낄 것이다.
출처: Justin Obeirne(저스틴 오번) 블로그 포스팅 ‘A Year of Google & Apple Maps’
구글맵을 살펴보면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렇게 큰 변화에도 고객들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 채 편리하게 서비스를 이용한다. 서비스의 모습이 바뀌고 있는데 고객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디자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고객들이 불편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건, 구글맵이 아주 작은 단위로 점진적 개선을 하며 고객 경험을 해치지 않도록 신경 썼기 때문이다. 하나의 요소를 추가한 뒤 테스트를 진행하고, 또 추가된 요소에 맞춰 주위 다른 요소들까지 최적화해나가는 방식으로 개편 작업을 진행했다. 그 덕분에 고객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더 나은 방법으로 다듬어질 수 있던 것이다.
추가적으로, 구글맵은 랜드마크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목적으로, 맵 안에 ‘Place’라는 개념을 새롭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 맵의 이용 목적이 단순히 목적지를 찾는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요 상점과 랜드마크를 발견하고 찾아가는 또 다른 경험으로 확장되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조금 더 큰 기능 개편이 있을 땐 최대한 활성 유저가 적은 타임을 공략했다는 것이다. 위 데이터를 보면 일년 중 겨울에는 MAU가 적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렇게 활성 유저가 줄어드는 시간대에 큰 개편 작업물을 배포하여 불편함을 느끼는 고객 모수를 최소화 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쿠팡에서도 이런 위험 요소를 완화시키기 위해 모든 도메인마다 마이크로 단위로 점진적인 개선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적은 모수의 고객군에게 먼저 AB 테스트 하여 사용성을 검증한다.
사진: 서치 홈 before & after
기존 쿠팡은 검색 바를 탭하면 빈 화면이 나오고, 검색어 입력 시 하단에 연관 키워드가 노출되는 형식이었다. SEO(검색 엔진)이 고도화 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고객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들을 조금씩 단위로 추가하며 검색 알고리즘을 형성했다. 그 결과 현재는 검색창 안에 검색어를 입력하지 않더라도 많은 정보들을 미리 확인할 수 있다. 최근 검색어는 물론, 고객의 지난 검색결과를 바탕으로 한 추천 검색어와 인기 검색어를 노출해 탐색을 위한 기능으로 고객의 경험을 확장시켰다.
사진: 상품 상세페이지 before & after
상품 상세페이지 역시 마이크로 단위의 테스트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꼭 필요한 정보는 펼쳐보지 않아도 한눈에 들어오도록 구성했으며, 배지와 툴팁, 텍스트 강약 조절로 우선순위에 따라 위계를 주어 더 중요한 정보부터 빠르게 확인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또 카테고리마다 강조되어야 하는 정보, 표현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필수 노출 정보와 옵션 선택 박스를 다르게 구성하여, 구매를 결정 짓는 정보를 더 쉽게 파악하고 빠르게 구매할 수 있도록 개선했다.
혁신은 큰 변화를 뜻한다. 하지만 서비스에서의 혁신은 비주얼과 형식을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객의 삶에 더 깊숙이 녹아 그들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것에 가깝다. 이러한 혁신을 위해 디자이너는 서비스를 세세한 단위로 설계하고 고객들의 반응을 살피며 점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고객이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나아가 그들에게 대체불가능한 상품으로까지 각인될 수 있다.
지금까지 디자이너로서 가져야 할 자세를 Simplicity, Consistency, Innovation에 대한 언러닝, 리러닝 사례를 통해 정의했다. 이는 크리에이티브한 디자인적 사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익숙하게 학습해온 디자인 관성에서 벗어날 때 새로운 인사이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에겐 문제 상황을 진단하고, 고객 경험을 기반으로 비즈니스적인 사고와 디자이너만이 할 수 있는 사고를 적절하게 전환하는 역량이 필요하다. 이러한 역량이 쌓일수록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은 디자이너로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Graphic design by Irin
Edited by 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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