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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동나동 Apr 12. 2023

자연이라는 비유

식상한 <영상앨범 산>을 챙겨보는 이유

1.

일을 할 때 항상 뭔가를 켜둔다. 소리가 없으면 뭔가 준비가 덜 된 느낌이다. 어떨 때는 노래를 틀어 놓고, 어떨 때는 영상을 틀어 놓는다. 영상을 틀어 놓는다면 길이가 짧은 클립보다는 스토리가 있는 비교적 긴 영상이 좋다. 너무 집중력을 빼앗아도 곤란하고, 너무 관심 없는 내용이어도 곤란하다. 허참~ 어쩔 수 없다. 다 이게 스마트 시대가 만들어 놓은 습관이겠거니 핑계를 대본다.


딱히 틀어둘 게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다큐가 최고다. 여행, 환경, 과학 다큐를 좋아한다. 웨이브를 구독하고 나서는 영상앨범 산이나 한국기행을 자주 틀어 둔다. 눈길이 가면 다음 여행지로 마음속에 저장해 둔다. 등산 스크래치 맵을 사고 나서부터는 이런 습관이 더 강해졌다. 다음엔 어디를 긁을까? 생각하며 가보지도 않은 산을 상상으로 미리 오르는 것이다.


2.

영상앨범 산은 kbs1에서 매주 일요일 아침 7시대에 방송한다. 그러니 주로 누가 볼지는 쉽게 짐작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산을 오르는 내레이터와 게스트 조합이 상당히 구릴 때가 많다. 이 구리다는 표현은 조금 조심스럽기는 하다. 산림청 공무원이나 지역문화해설가가 포함되는 것을 두고 구리다고만 할 수는 없다. 어떤 부분에서는 필요한 섭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영역은 그 나름대로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정말 이건 좀 구리다고 생각할 때는 주로 가부장제에 익숙한 구성을 그대로 들여올 때다. 부부가 산을 타는데 꼭 남성이 계속 설명을 하고 여성은 듣는 다든지, 아버지와 아들이 산을 타면 아버지가 '인생이 어쩌고~~~'하면 아들이 '아버지를 존경해요~~~' 한다든지 하는 연출 말이다. 시간대와 주 시청층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위계상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남성, 연장자, 부모, 고위직 공무원, 인플루언서)이 위계가 낮은 사람(여성, 청년, 자녀)에게 설명을 하는 방식은 아름다운 풍경이 주는 감상을 깎아먹어 버린다. 의도가 이러니 지나치게 훈계조의 멘트가 많은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3.

당연히 자연에 대한 감상도 보수적, 유교적 세계관(자연관)을 그대로 끌어올 때가 많다.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느낌이라든지, 남성미가 넘치는 산이라든지, "자기야 어때, 내가 꽃보다 더 이쁘지 않아?" 따위의 표현들 말이다. 어쩌면 그렇게 매번 비슷한 감상을 이야기할까 싶지만 섭외대상을 생각해 보면 대체로는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투덜대면서도 왜 보냐고? 풍경이 너무 좋으니까. 드론 촬영이 대세가 된 뒤부터는 더더욱. 부수적으로 가보지도 않고 수많은 산의 풍경을 대리체험할 수 있는 데다 산이 너무 많은 한국에서 어디서부터 가봐야 할지 순서를 정할 수 있어 좋다.


그리고 이 글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였다.


"자연이라는 비유는 식상함을 넘어서는 감동이 있다."

종종 자연다큐를 보다가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확실히 자연이라는 비유에는 식상함을 넘어서는 감동이 있다.


(산 정상에서) 와 정말 가슴이 탁 트이는 거 같아요.

세상만사 모든 고민이 여기만 오면 다 사라져요.

지나온 길을 보면 정말 인생과 똑같아요.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죠.

자연은 언제나 말이 없어요. 하지만 화가 나면 가장 무섭죠.

그저 묵묵히 서 있는 나무는 말없이 우리를 지켜주고, 숲은 언제나 너른 품으로 우리를 안아주죠.


여행 다큐, 특히 영상앨범 산은 온갖 식상한 비유로 가득해서 내가 작가라면 도대체 매번 어떻게 다른 표현을 써야 할까 머리를 뜯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다 가끔 음, 지금 저 표현은 좀 신선했군. 같은 말이라도 저렇게 할 수 있다니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역시 대체로는 식상하다.


그런데 그 식상한 표현이 영상과 함께 나올 때 어쩔 수 없이 나는 또 웅장해지면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동한다. 자연이라는 비유가 절대 끝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수 천년에 걸쳐 떠들고, 그리고, 노래하고, 무엇보다 찍었으며 수많은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봤는데도 불구하고 그 비유가 절대 끝나지 않는 이유는 자연 그 자체가 주는 감동 때문이다.


그래서 또 영상앨범 산을 틀어놓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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