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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동나동 Jul 25. 2023

시금털털한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시금털털한 것들을 이겨내는 힘에 대하여

시나브로처럼 사회에선 많이 쓰지 않는데 나는 즐겨 쓰는 단어가 몇 개 있다. 아마도 청소년기에 문학을 좋아했던 영향 같다. 고전, 특히 서양고전은 힘들었다. 역사적 배경을 이해 못 하니 뭔 소린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 소설은 사람 이름 외우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주로 읽은 작품은 한국 근현대 시기 가운데 대략 1900~1970년대 정도. 학교에서 추천해 주는 작품은 대체로 작가가 고인이 된 경우가 많았으니 아무래도 표현이 조금 올드했을 것이다. 자연스레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그렇다고 자주 쓰지도 않는 그런 단어를 문학작품에서 접했던 게 아닐까 싶다.


시금털털하다는 표현도 참 좋아한다. 내키지 않는 일, 내키지 않는 관계, 내키지 않는 상황을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할 때 이만한 표현이 없다. 시큼하고도 떫은맛, 상한 식초 같은 맛. 일부러 먹으려던 건 아닌데 유통기한이 지난 식초로 양념한 반찬을 한 입 우적 집어먹었을 때 그 맛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


아마도 시금털털한 것들을 견디는 것이 중년의 일상일지도 모른다. 내키지 않는 상황이 닥쳤을 때 요령이 생겨서 어느 정도는 피해 갈 수 있지만 온전히 피할 수는 없을 때, 너무 고통스러운 건 아니라 견딜만 하지만 은근하게 스트레스가 될 때, 시금털털하다는 말이 튀어나온다.


다들 자기식대로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요령이 생겼을 테니 그냥 시금털털한 정도로 끝나는 일들을 서너 개씩은 달고 사는 일상.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시면 시금털털 환장 대잔치다. 결혼한 친구들은 결혼한 대로, 안 했으면 안 한 대로 불평 한가득이다. (해가 갈수록 결혼 안 한 친구들이 이상하게 승리한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은 내 주변 사람들의 성향 때문인 것일까?) 그래서 하소연으로 이어지다 보면 술자리 분위기도 시금털털해진다. 다들 재미없고, 뭐 신나는 일 없냐 이런 표정으로 앉아 있지만 조금 지나면 너도 별 수 없네, 어 그래 나도 별 수 없지 하며 지루해하는 표정과 표정. '아직은 가슴에 불꽃이 남은 그대여 지지 말고 싸워주게'라며 노래를 불러도 불꽃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30대 타임라인은 온통 새로운 시도로 넘쳐 난다. 헬스장에 가보고, 등산도 가보고, 아직까지는 맛집도 찾아다니고, 서핑도 한 번 해보고, 클라이밍도 해보고, 이것 저것 해보고, 또 계속 사진도 남긴다. 젊지는 않다고 하지만 여전히 젊다는 걸 아는 분위기고 이제는 돈도 벌겠다 조금씩 쓰는 재미도 찾아 나간다. 40대는? 그런 30대를 보며 흐흐 그거 나도 해봤지 곧 너도 시들해질 걸 하며 냉소를 날린다. 그러면서 그 숱한 새로운 시도가 무색하리만치 어쩔 수 없이 스며드는 거대한 일상의 그림자, 이를테면 늙어가는 부모님, 함께 닳아가는 내 육체, 올라가는 집값, 결혼을 해도 안 해도 2% 부족한 선택과 같은 것들에 조금씩 압박당하는 현실을 예감한다. 너도 별 수 없을 것이라며 저주? 안도? 하는 것 같지만 핵심은 체념이다.


그런 시금털털한 중년도 잠깐 눈빛이 반짝일 때가 있으니 대부분 연애 얘기인 경우가 많다. 대놓고 말하긴 뭐 하지만, 친구끼리 굳이 숨길 것도 없는 이야기. 내 주변에는 다시 연애하고 싶다는 중년이 참 많아서 대부분 실낱같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혼한 친구도 많고, 별거 중인 친구도 여럿이다. 하지만 대부분 상상만 할 뿐이다. X세대니 어쩌니 처음 자유로움을 맛본 세대라고 하지만, 다들 한국적 정서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유교의 자식들이다. 재혼을 했는데 전남편을 불러 셋이 같이 소풍가는 미드 같은 상황을, 드라마로 열심히 소비했지만 현실은 가족이란 테두리를 벗어나 삶의 의미를 찾기가 힘든 현실.


어제도 한 친구와 통화를 했다. "XX랑 놀러 가자고 했는데, 너도 같이 갈래?" 방학 때 수업이 너무 많아 시간이 안 된다고 했다. "아니 XX이랑 둘만가면 좀 그런가 해서..." 그 둘은 한쪽은 이혼했고, 한쪽은 별거 중이고, 둘은 헤테로고, 한 명은 여자고 한 명은 남자다. 이런 상황에서 둘만의 조합으로 놀러 가는 게 문제적 상황이 아닐까 조금은 고민한 것이다. "야 너네 둘이 썸이라도 탈 가능성은 거의 0.01%에 가깝지만 설사 뭔 일이 난다 해도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누가 신경이나 쓸 것이며, 너네 곧 50이다. 아직도 그런 거 신경 쓰고 살래?"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 "그렇게 확률이 낮냐? 너무 슬픈데."


여전히 연애하고 싶은 그대여 지지 말고 싸워주게. 한 번뿐인 인생, 너가 행복하지 않으면 뭘로 보상받아도 다 의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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