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집 뒤뜰에 감이 열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포대 자루를 들고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장흥은 어린 내가 가기엔 멀었어요. 광주에서 3~4시간 완행버스를 타고 가고 마을 입구에 내려서도 40~50분을 걸어서 들어가야 하는 깡촌입니다.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 오빠와 감 떠러 가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버스에 내려 고향 집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도랑물은 나에게 최고의 수영장이었습니다. 차가운 물이 발끝을 스칠 때 서늘한 기분과 물장구를 칠 때의 소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잠시 잠깐도 허투루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무조건 고향 집으로 직진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버스 시간에 맞춰 감을 따서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지만 철부지였던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거죠. 그렇게 할머니를 따라 지루하게 길을 가는데 갑자기 똥이 마려웠어요.
“할머니~ 똥 마려워요.”
“오냐, 저기 풀숲에 눠라.”
“누가 보면 어째. 글구 똥 싸면 뭐로 닦아?”
할머니는 적당한 풀을 겹쳐서 닦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황당했지만 어쩔 수 없어 적당히 넓은 풀을 겹쳐 뒤처리했습니다. 그날 까칠한 풀이 궁둥이에 닿는 느낌이 지금까지 남아있어요.
고향 집을 일찍 떠나온 후, 우리 집이지만 다른 아짐, 아재가 사는 낯선 집이 되었습니다. 뒤뜰로 가니 감나무가 뒷산 꼭대기만큼 커져서 저걸 어찌 따나 하고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할머니께 긴 장대를 드리니 하나하나 똑똑 감을 따기 시작했어요. 할머니가 힘주어 장대로 감을 똑 떨구는 소리가 바닥에 울렸고, 나는 그 감들을 주워 부지런히 자루에 담았습니다. 주먹만 한 감을 하나하나 주워 담는 재미는 쏠쏠했어요.
감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입니다. 어린 시절 유일하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을 수 있는 과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실컷 먹을 수 있는 과일이 고향 마을 뒤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아직 덜 익은 꾸리감을 실컷 자루에 담으면 물컹한 홍시를 만나는 횡재를 하기도 했습니다. 바닥에 떨어져 모양은 볼품없이 찌그러졌지만 맛은 일품입니다.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힘들게 자루를 짊어지고 돌아왔을 오빠와 할머니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따온 감은 옥상 한편에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할머니는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을 정성껏 깎고 또 깎았습니다. 할머니가 껍질을 깎을 때마다 나는 감 껍질을 옆에서 집어 먹으며 곶감이 대롱대롱 만들어지는 걸 구경했습니다. 할머니는 곶감을 만들어 하나씩 빼서 아들 손주에게 줄 생각에 힘듦도 잊고 하셨어요. 하지만 곶감이 되기 전에 하나라도 빼서 먹는 날엔 할머니에게 혼나기 일쑤죠. 그래서 감 껍질을 할머니 몰래 먹다가 변비에 걸려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 똥이 안 나와.”
공동 화장실에 갈 때마다 소리쳐 엄마를 부르며 했던 말입니다. 아무리 힘줘도 나오지 않던 똥이 엄마의 한 마디면 쑥~ 나왔어요.
“송곳으로 똥구멍을 쑤셔부러야겄다.”
엄마의 한 마디에 안간힘을 다해 똥을 눴던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