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생일을
가을 바다는 맑고 푸르렀다. 수평선 위에는 마치 수석(壽石) 같은 섬들이 떠 있다. 기상예보에는 바람이 거세게 분다고 했지만, 포구는 안온하기만 하다. 청량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잔주름만이 일뿐이다.
우리는 짐을 선착장 입구에 풀어놓았다. 낚시가방, 쿨러, 배낭, 식료품 상자 등 승용차에서 내려놓으니 한 무더기이다. 가방은 메고 양손에 짐을 들고 배에 올라탔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중화항에서 출발해서 무인도 인근에 있는 좌대다. 바다 한가운데 띄워놓은 낚시 좌대에는 방갈로도 포함되어 있다. 이 교수는 1박 2일로 낚시여행을 계획하였지만, 송 선배와 내가 2박 3일로 우겨서 3일 동안 바다 위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양력으로는 시월 중순이지만 음력으로 반달이 뜨는 음력 8일의 조금 물때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시월의 조금 물때는 나의 생일이기도 하다.
생일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이 시기를 잡은 것은 바다낚시하기에는 최적의 날들이기 때문이었다. 출발하기 전 “아빠는 하필 생일날에 낚시를 하러 가냐!”라고 딸이 힐난하는 어투로 말을 했었다. 작년에도 나는 생일날에 집에 없었다. 그때는 어청도에서 급조된(?) 생일상을 받았었다. 이 교수가 우럭 미역국을 끓여주었다. 그런데 올해도 바다에서 생일을 맞게 된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니다. 시월이 바다낚시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고 그중에도 조금 때가 조과를 올리기에 최적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항구를 출발하여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좌대에 도착했다. 무인도 가까이 바다 위에 설치된 좌대는 규모가 대단하다. 거기에는 방갈로가 두 군데가 있었다. 우리는 섬 쪽에 가까운, 마치 이글루처럼 생긴 돔형의 방갈로에 짐을 풀었다. 외부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방갈로 내부는 넓었다. 10여 명이 잘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공간… 전기장판, 밥솥, 취사도구가 정리되어 있었고 냉장고도 작지만 두 대나 있었다.
대략 짐을 던져놓고 셋은 각자 낚싯대를 꺼내었다. 송 선배, 이 교수는 길게 띄워진 좌대 중간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방갈로에서 먼바다 쪽으로 우선 채비를 던졌다. 우리를 데려다준 낚시점 주인은 최근에는 돌돔, 참돔, 갑오징어, 장어, 전갱이가 주로 잡힌다고 한다. 어쨌든 3일 동안 할 터이니 고기는 언제이고 잡을 것이고, 나는 우선 먼바다 쪽의 풍광을 즐기고 싶었다. 멍하니 세월을 낚고 싶었다. 갯지렁이를 풍성(?)하게 끼워주고 10m 깊이의 바다에 낚시를 던져 넣었다. 오후가 되자 조금은 세어진 바람이 분다. 하지만 낚시하는 데는 큰 불편함은 없다. 오히려 인근을 지나는 여객선과 어선 때문에 생긴 파도가 출렁출렁 좌대를 크게 흔들고 있다. 낚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송 선배는 벌써 전갱이와 성대를 십여 수 낚았다. 이 교수도 여럿 낚았지만 나는 방갈로 곁에 홀로 앉아서 바다 위에 지는 노을만 낚고 있었다.
점심이 조금 늦었다. 다들 낚시와 풍경에 빠져 배고픈 것도 잊은 것은 아니다. 사실 점심으로 먹을 횟감을 잡기 위해서 늦어진 것이다. 송 선배 옆에서 낚시하던 현지의 꾼이 장비를 접으며 자기가 잡은 갑오징어와 전갱이를 드시라고 주었다. 그리고는 전갱이 회 뜨는 방법을 직접 시연해주었다. 우리는 밥보다 먼저 한 접시의 회에다가 막걸리를 한 잔씩 들었다. 코로나가 만연한 세속을 떠나 바다 한가운데에서, 금방 잡은 횟거리에 마시는 소주와 막걸리의 맛은 참으로 형용하기가 어렵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친구들과 근처의 저수지에서 낚시했었다. 피라미, 붕어낚시로 시작된 경력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아버지 혹은 형들과 함께하며 실력이 늘고 다채로워졌다. 여름방학이 되면 고향인 충주 인근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밤낚시도 자주 갔었다. 아버지는 제일 좋은 낚싯대와 고기가 잘 무는 명당자리는 늘 내게 양보하시곤 했었다. 그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호박색의 반투명 글라스 민물 낚싯대를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니고 있다.
대학원생 시절에는 충주댐이 축조되고 댐에 물이 차기 시작하면서 민물낚시의 횟수와 조과가 풍성해졌었다. 30cm 안팎의 붕어와 잉어, 향어가 낚시 바구니를 가득 채우기 일쑤였다. 결혼하기 전에 처남댁에 들를 때면 냉동된 깨끗한 충주댐 붕어를 자주 들고 가기도 하였다.
민물낚시는 안성으로 이주한 뒤로도 몇 년은 계속되었다. 저수지가 흔한 안성지역은 낚시터가 수십 군데는 되는 것 같았다. 봄, 여름이면 늘 새 낚시터를 찾아다니며 밤낚시를 했었다. 그러나 떡붕어 일색인 저수지와 수입한 중국산 붕어가 판을 치는 유료 낚시터의 환경과 낚시 문화에 싫증을 느껴 그만두었다.
바다낚시는 일 년에 한두 번 간헐적으로 동료들과 함께했다. 배를 타고 하는 우럭낚시가 전부였다. 그 시기에는 갯바위 낚시에도 관심이 있어서 주위의 권유로 값이 제법 비싼 감성돔 낚싯대를 사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20여 년이 지날 때까지 그 낚싯대를 제대로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주위에 바다낚시를 본격적으로 즐기는 인물이 없는 탓이기도 하다.
몇 년 전부터 여름이 되면 서해의 좌대로 낚시를 하러 가기도 했다. 안면도나 도비도의 좌대에서 숭어 몇 마리씩은 잡기도 했지만, 같이 할 동료가 없었기에 그나마도 자주 하지는 못했다. 둘째와 두 번인가 함께 가기도 했었지만, 몇 년 전부터는 그나마도 퇴짜를 맞았다. 아들은 “맨날 아빠만 잡고, 나는 한 마리도 못 잡는데 무엇이 재미가 있냐?”는 것이다. “아빠는 안 하고 네게 낚싯대를 모두 펴 줄게!”라고 제안해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안 간다고 한다.
작년 어청도에서 시작된 우리 셋의 낚시 기행은 올해까지 이어져, 지난 8월에는 아내와 함께 3박 4일을 어청도 낚시와 도보여행으로 보낸 적도 있다. 8월이라 조과는 불황이었지만 경치와 환경이 그만인 어청도에서의 날은 힐링 그 자체였다. 어청도에서 배운 연안에서의 지그헤드를 사용한 낚시에서 웜이나 루어낚시로 관심이 이어졌고, 낚시채비도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통영으로 떠나기 전에 나는 새 낚싯대와 릴을 사고 채비도 새로 꾸렸다. 물론 수십만 원의 여윳돈이 들어갔지만, 그래도 “골프 장비에 비하면 싸다.”라고 스스로 자기 합리화하면서…
날이 어둑해졌다. 나는 새로 장만한 카본 재질의 낚싯대와 비싼 합성사 재질의 낚싯줄을 감은 릴을 꺼내 이른바 명당자리라고 알려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좌대 중간쯤인 이곳은 늘 꾼들이 앉아서 밑밥을 던져주었기에 돌돔이나 참돔이 출몰한단다. 채비도 바꿔서 크릴과 갯지렁이를 매달아 주었지만 잠잠하기는 마찬가지다. 남들은 잘도 낚는데 못 낚는 것은 내 실력이 부족한 탓이다. 아니 감을 못 잡은 것이다.
사실 바다낚시는 민물낚시보다 변수가 다양하다. 복잡한 낚시 조건에 따라 장비도 다양하고 방법도 그렇다. 따라서 조과가 없는 이유와 조건을 분석하고 그것에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첫날이기에 나는 무리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여기저기를 찔러보고 실험적으로 이것저것 사용해보고 결정하자는 것이다. 그런 중에 몇몇 마리의 전갱이, 성대, 볼락을 낚아냈다.
밤이 깊어질수록 바람도 차가워졌다. 주중이고, 바람이 셀 거라는 예보 때문인지 거대한 좌대에 낚시꾼은 우리 일행과 다른 방갈로에 잠든 두 명의 꾼뿐이다. 어둠이 깊어지고 조황이 없자 다른 일행은 철수한다. 결국 우리 셋만이 드넓은 좌대를 독차지하고 있다.
나는 명당자리를 양보(?)하고 방갈로 바로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 방갈로 입구 앞에는 커다란 원목 식탁이 있고 조명등이 걸려 있어 랜턴이나 케미 라이트도 필요가 없다. 불빛이 환하게 비치는 물속에 밑밥을 던져주자 망상어 떼가 몰려들고 ‘풀치’라고 부르는 작은 갈치도 가끔 출몰한다.
자정을 넘자 송 선배는 먼저 잠자리에 들었고, 새벽 두 시까지 분투했던 이 교수도 방갈로로 들어갔다. '그래 고생하면서 몇 마리 더 잡는 게 능사가 아니다. 편하게 힐링하면서 즐기자!'란 생각으로 식탁 의자에 앉아서 미끼를 끼우고 낚시를 던진다. 어느 새인지 막걸리 한 병이 다 비워졌다. 남해 바다 한가운데에서 막걸리에 취해 얼큰하게 생일을 맞은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 활동이 불편한 고령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리고 홀로 되뇐다.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잠깐 나의 눈가에 물기가 맴돈다. 아마 소금기 섞인 차가운 바닷바람 때문일 것이다.
새벽에 잠든 탓일까? 오전 7시가 되어서 눈이 떴다. 지나는 여객선이 밀어낸 파도에 가끔 방갈로가 출렁출렁 흔들린다. 바다에 떠 있는 좌대에서 생일상을 받았다. 송 선배의 형수님이 오늘이 내 생일이란 것을 전해 듣고 소고기와 미역을 준비해주었다 하였다. 세심하게 배려해준 것에 고마운 마음이다. 이 교수는 돌돔으로 회를 뜨고 가져온 몇 가지 밑반찬과 떡과 포도까지 차려 놓으니 진수성찬이다. 마치 돌잔치 상을 받는 것 같다. 햇빛이 고운 가을날, 푸른 바다 위에서 맞는 야외 생일상… 특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둘째 날, '이제는 본격적으로 낚시를 해봐야지…'하는 생각이 든다. 내 자리는 여전히 방갈로 앞이다. 낚시채비를 다시 변경한다. 갯지렁이에는 별 반응이 없어 크릴새우도 매달고 수시로 주변의 수심을 체크하며 낚시를 시작했다. 몇 시간이 지나자 10m 아래 바닥의 지형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아! 여기는 바위가 있고 저곳은 여이고 저기는 돌밭이고…”
그런 와중에 엄지손가락만 한 붉은빛이 감도는 쏨뱅이가 딸려온다. '이 작은 것이 어떻게 굵직한 갯지렁이를 물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지만 우럭이나 독가시치처럼 가시 지느러미로 완전무장한 어종이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웬만한 것은 삼킬 수 있는 큰 입,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송곳 같은 지느러미, 먹이를 포착할 수 있는 커다란 눈, 상대에게 경고하는 얼룩무늬를 지닌 모습으로 진화해왔을 것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니 소유의 욕망과 잔인한 경쟁의 세태 속을 살아가는 인간과도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방생하고자 장갑 낀 손으로 조심하면서 다룬다. 그런데도 손가락을 찔렸다. 깊이 찔린 것은 아니지만 한참 동안 쓰리고 아팠다.
바닥의 지형을 익히고 고기들이 노니는 수심이 파악되자, 조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바닥 주변에 노닐던 볼락이나 성대가 아니라 이제는 전갱이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 지난 저녁부터 밑밥을 꾸준히 던져 넣은 탓이리라. 파악해둔 수심만큼만 낚싯줄을 풀었다. 바닥에 걸릴 여지가 없다. 그러자 쉴 틈 없이 전갱이가 미끼를 물기 시작했다. '챔질 하고-릴을 감고 –고기를 떼고 – 크릴새우를 달고 – 던지고'하는 행위가 기계적으로 반복될 때쯤 송 선배는 또다시 돌돔을 끌어올린다. 이 교수는 입질이 뜸하여지자 갑오징어 채비인 “에기”를 달아 캐스팅한다. 그리고는 듬직한 놈을 한 마리 건져 올린다. 그리고는 내게 한 마디 던진다. “형님은 전갱이 낚는 데는 천부적인 재질이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전 고수로 부를게요!”
끼니마다 싱싱한 횟감으로 입 호강, 푸른 바다와 붉은 저녁노을로 눈 호강한 2박 3일의 일정을 끝내고 우리는 공주와 세종에서 각자의 일상으로 귀가했다. 술 마시면서 즉석에서 내가 제안했던 모임의 이름 “일학모임”(송 선배의 이름에서 한 글자, 이 교수와 내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서)의 2021년 가을 낚시가 성황리에 끝을 맺은 순간이었다. 세종시에서 차를 몰고 귀가하는 도중에 정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 박사! 많이 잡았어? 뭐 잡았는데…” 집에 도착하기 이전에 정 사장네 들러서 볼락, 성대, 전갱이를 듬뿍 나누어주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혼자 되뇐다.
“아들아 시간 나면 바다낚시 가자! 좋은 낚싯대, 명당자리는 이제 네게 모두 양보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