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이드가 씁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 초등학생 시절 미술 시간엔 은행나무 이파리, 단풍나무 이파리, 네 잎 클로버 등을 책 사이에 끼워 납작하게 말려 책갈피를 만드는 활동이 있었다. 미술 시간이었는지 과학 시간이었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하여간 그랬다. 아무튼 하라니까 예쁜 잎들을 찾기 위해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나무 밑동 주변을 빙빙 돌면서 다녔고, 그나마 좀 괜찮아 보이는 잎 몇 장을 주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 어딘가에 끼워 두었다. 두꺼운 책에 끼워 무거운 물건으로 눌러야 잎이 깔끔하게 잘 마른댔고, 다 읽은 책 중에 그 책이 우리 집에 있는 가장 두꺼운 책들 중에 하나였다. 새것 같거나 아끼는 책 사이에 끼우면 잎이 책을 상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
시간이 꽤 지나 마른 잎을 코팅하기 위해 책을 열었을 땐, 내 기대와 달리 금방 바스러질 것처럼 쭈글쭈글하게 말라죽어버린 잎이 있었다. 이 바삭하면서도 축축한 느낌의 검붉은 것이 처음에 주웠던 그 단풍잎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며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애초에 정성을 다해서 한 일은 아니었으므로 금방 잊어버리곤 납작하게 잘 마른 은행잎을 코팅해 검사를 받았다.
사실 단풍잎이 잘 마르지 않은 데엔 내 호기심이 한몫했던 것 같다. 초등학생의 시간은 실제보다 느리게 흐른다. 참고 참다 '이 정도면 좀 말랐겠지?'하고 책을 종종 열어봤었는데,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딱히 기대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싶다. 사실은 교과서 예시 사진처럼 멋진 책갈피를 가질 수 있길 조금은 기대했던 걸까? 아니면 뭐가 어떻게 되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그랬을까? 아무튼 지금 와서 보니 그땐 뭔지 알 수 없었던 내면의 욕망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예 관심이 없었으면 까먹었을 거다.
꽃을 말리는 건 우리가 하찮아졌기 때문이다. 김언수, <잽>
아직도 김언수 작가님을 잘 모르고, <잽>도 읽어보지 않았다. 이 문장은 그의 단편 소설 제목들 중 하나이다. 내 이십 대 초반에는 멋진 사진에 멋진 글귀가 합쳐진 그럴듯한 감성 이미지들이 페이스북에 자주 돌아다녔고, 나는 그런 이미지들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이 문장도 그렇게 만났고 그때 나는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지금까지도 꼭 어떤 순간에 번쩍하고 떠오른다.
성인이 되고 내가 내 물건은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 다음부턴, 꽃을 선물 받으면 말리려 노력했다. 목이 댕강 잘린 식물은 물에 담가 놓아도 조만간이면 시들어버린다. 싱싱하게 살아있는 꽃다발을 선물하면서 웃던 이들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바람에 며칠 안가 죽어버린 꽃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늘 어려웠다. 차라리 시들기 전에 말리자 싶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본래의 색과 모양 그대로 마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인터넷에 '꽃 말리는 법'을 찾아보면서 각종 다양한 방식으로 말렸다. 옷걸이에 묶어서 말리기도 하고, 펼쳐서 말리기도 하고, 그냥 가만히 두기도 했다. 꽃을 말리면서 생각했다. '하찮아진 건가?'
꽃을 말리는 일엔, 그 꽃에 얽힌 앞뒤 짧은 역사를 물리적으로 박제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 순간을 흩어지게 두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결심이다. '인간은 자신이 보낸 시간과 결코 이별할 수 없는 법이다'라고 김언수 작가는 쓴다. 어차피 인간은 결코 자신의 과거와 이별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도 한 술 더 떠 절대 이별하지 않겠다고 꽃을 말린다. 어떤 시간들은 부단히 잊으려 노력하면서도 어떤 시간들은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애쓴다.
필멸의 운명 앞에서 인간이 희망차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꽃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수밖에 없다. 꽃을 말리고, 사진을 찍고, 편지를 모으는 일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음을 확인을 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래서 그리 대단한 삶을 산 것도, 앞으로 그럴 것도 아닐 텐데, 내가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라고 믿음을 품는 순간 나는 좀 하찮아지는 것 같다. 방구석에서 혼자 꽃을 만지작거리며 어떻게 해야 이 시간은 장기 기억으로 예쁘게 보존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집착한다.
그래도 하찮아지는 건 대수롭지 않다. 인간이니 당연하다. 그런데 최근, 자신의 모든 시간을 바스러질 것 같은 쓰레기로 만드는 능력이 있는 자를 발견했다. 아주 신기하고 쓸모없는 능력이라 깜짝 놀랐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늘 조심스러워야 하는 일이지만, 그의 영향을 받아 그의 것과 잠시 겹쳤던 내 시간도 쓰레기 비슷한 것이 되어버려 좀 슬프고 원망스러운 마음에 감히 한 번 삿대질해 본다.
살아있기 위해 시간을 말리다 실패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발생한다. 나는 죽을 때까지 내가 보낸 시간과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그 어떤 시간도 시들어버린 쓰레기로 만들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러나 때때로, 어린 시절에 의도치 않게 쭈굴쭈굴 말려 죽인 검붉은 단풍잎처럼 예쁘지 않은 시간도 필연적으로 손에 쥐게 된다. 어쩔 수 없다. 실수할 수 있다. 대신 그 시간 속에서 뭔가 배우면 좋겠다. 그럼 쓰레기가 아니게 되므로.
그런데 시간을 쓰레기로 만드는 능력이 있는 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하지만 자기가 내키는 대로 자신이 보낸 시간을 들었다 놨다, 펼쳤다 접었다, 찢었다 붙였다 한다. 차라리 시간을 가만히 말리는데서 그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저러면 자연스럽게 쭈굴쭈굴한 단풍잎보다 더 바라보기 어려운 것이 탄생할 텐데. 결국에는 아무 의미 부여도 하지 못하고 쓰레기 통에 처박게 될 텐데. 살아온 시간을 다 저런 식으로 다루면 참 공허할 텐데. 여러 가지 이유로 슬펐다.
그는 왜 같은 짓을 반복할까? 그 사람은 자신도 필멸자임을 잊은 걸까, 거울 앞에 너무 오래 서 있는 바람에 자신이 너무 커 보이게 된 걸까, 진짜 셈을 할 줄 모르는 걸까? 예쁜 책갈피를 만들기 위해 <나무> 사이에 단풍잎을 끼워뒀지만 자꾸만 펼쳐보았던 어린 나의 생각을 빌려와 보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은 아니다. '존재 확인' 이상의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거겠지.
시든 꽃을 실컷 난도질하다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것보다 곱게 땅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낫다. 내 인생에 그 꽃이 있었다는 사실은, 굳이 박제하거나 갈기갈기 찢어놓지 않아도 변함이 없다. 반짝거리는 시간들은 때가 되면 흘러 지나가야 하지만 여전히 같은 시간의 줄기 안에 있을 거다. 자연이 그렇게 정했다. 내가 보낸 시간과 이별하지 못하는 일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무조건 일어난다.
소소한 기억들이 삶을 지탱하기에 그래도 꽃을 말리고 시간을 말리는 일이 즐겁다면 기꺼이. 대신 과도한 욕심이 결국 그것들을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지 않도록 유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