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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파리 Aug 12. 2024

허름해지는 능력

혜이드가 씁니다

 나는 천성이 광대다. 광대보다 나를 더 잘 표현하는 단어가 없다. 아주 옛날에나 광대가 천한 직업으로 여겨졌지 요즘 광대는 엔터테이너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엔터테이너는 현대에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다. 우하하! 그러니 나 스스로 광대라 칭해도 안타까워하지 마시라!


 지금이야 "제가 광대라서요"라는 문장이 불편하지 않고 그렇게 나를 소개하는 것이 가끔은 강한 인상을 남기고 이미지를 굳히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자주 써먹지만, 이전에는 광대보다 나은 인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심을 수 있길 바랐다. 바야흐로 2021년 1월 1일, '새해를 맞아 내가 바라는 나'라는 제목으로 일기를 썼다. 다짐이랄까? 가장 상단의 1번과 2번의 내용은 각각 이러했다.


1. 천천히 말하기, 말 수 줄이기 : 꼭 내가 오디오를 다 채우지 않아도 된다. 가끔 호감을 얻으려 뱉는 말들 때문에 되려 허름한 기분이 들거든.

2. 비언어적 표현 늘리기 : 말없이 다른 이들의 이목을 사로잡아 설득까지 해낼 수 있는 카리스마를 키우고 싶다.


 11번까지 쓰고 난 뒤, 페이지의 마지막에 커다란 하트와 함께 '혜원아 나를 사랑해 줘~'라고 썼다.


 1, 2번의 내용과 마지막에 쓴 '나를 사랑해 줘~'라는 문장은 사실 상충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 성격을 부정했다. 더 나아가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아낄 수 있는 길이라 손수 못 박았다. 사실 위시 리스트나 투두 리스트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갖고 싶다 쓰거나 내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 쓰는 것이 맞다. 그러나 20년 동안 벗어나지 못한 본성의 관성은 쉽게 깰 수 없다. 나에게 말 수 줄이기란 전부 다 부정하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 급의 도전임을 지금은 안다. 하지만 때마침 나는 코로나를 맞아 어쩔 수 없이 말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어른에 가까워야 할 20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른이란 침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기어이 밑바닥에 있는 말들까지 탈탈 털어 너덜너덜해진 채로 다른 상대방이 나를 인정하기를 기다리는 을의 입장이 아니라 말없이 분위기를 휘어잡아 주도권을 쥐는 무게와 카리스마가 있는 갑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이라 믿었다. 나는 명백히 전자에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말없이 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미지를 갖고 싶었다. 갑자기 든 생각이지만 오늘 다시 일기를 읽어보니 어쩌면 이때부터 혜킬이가 혜이드를 본격적으로 통제하려 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때는 나를 위해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혜킬의 주장과 근거도 일리가 있긴 하다.


 새해맞이 11가지 다짐을 기록한 뒤 며칠 후 사랑하는 친구 하를 만났다. 물론 내 바탕이 그러한 탓도 있지만, 하와 있으면 어쩐지 온갖 이야기들을 다 털어놓고 싶어 진다. 그날도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다가 '이렇게 이렇게 할 거야' 연기까지 가미해 그에게 새로운 이미지 메이킹 계획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표정과 손으로 다양한 제스처를 취하고 목소리의 높낮이와 빠르기를 조절해 가며 스스로의 결심에 무아지경 취해가던 차에 하는 이렇게 말했다. "혜원아 너는 오히려 그 가벼움이 매력이자 장점이라 생각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단순 취미로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남에게 보이는 각자의 이미지 찾기가 수업의 주제였다. 물론 이병헌 배우처럼 입는 옷에 따라 이미지가 확확 바뀌어도 이질감이 없는 정도의 연기력이 바탕이 되면 좋겠지만, 그전에 보는 이에게 어떤 '인상'을 남겨 자꾸 생각나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두 시간 동안 수강생들은 서로 첫인상이 어떠하였는지 그리고 그 사람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 외모, 말투, 목소리 등이 어떤 분위기를 풍기는지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역시 다른 눈들에 보이는 나는 '카리스마', '무게', '우아함' 등 내가 추구하는 이미지와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지가 가볍다'와 '중력이 약하다'는 애초에 차원의 얘기였다. 하와 연기 수업에 감사하게도 그날에서야 이미지 구축 이전의 나와 주변인들 사이에 꽤 강한 만유인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특히 내가 낯을 가릴 때 자동으로 발동되는 지독한 습관 중 하나는 끊임없는 TMI 남발, 의식의 흐름에 따른 발화 및 자기 희화화를 통해 분위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그래야만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광대놀음을 하면서도 주도권을 잃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을 드디어 깨달았으므로 "내가 그렇다는 게 그다지 밉지 않다", 고 얘기하지만 여전히 가끔 그날의 광대짓이 떠올라 침대에 누워 자책하며 이불을 찬다.


 나름 나이를 좀 먹었으므로 오직 분위기를 풀고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한 '을의 원맨쇼'의 빈도가 좀 줄어들었다 생각했는데, 얼마 전 오랜만에 보는 친구 L과의 만남에서도 또다시 나도 모르게 광대를 자처했다. 심지어는 분위기가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아 식은땀 줄줄 흘리는 광대. 이전까지는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 없었지만 나는 그가 굉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단 둘이 만나니 더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이었다. 어느새 별 말 없는 그에게 압도당해 아무 말이나 지껄이면서 '아차!'와 얼굴 붉히기를 반복하던 중, 그의 어떤 한 마디가 나를 탁 깨웠다. 나는 곧바로 "제가 천성이 광대라서요 하하"를 시전 했고 L을 유일한 관중으로 삼은 나의 스탠드업 코미디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서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L은 내 광대 페르소나를 반복적으로 응원했다. 그것이 그에겐 없지만 나에겐 있는, 광대짓을 '할 수 있는' 재주를 신기해하는 것처럼 들렸다. 실제 의중은 영영 알 길이 없을 테지만 그 한마디 이후 나는 되풀이되는 그의 문장들을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의도야 뭐가 됐던 그 덕에 허름해지는 것도 능력임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의중이 나에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님도 깨달았다. 이불은 차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L!


 그래서 허름해지는 능력이 무엇인가? 고풍스러운 거대 저택에 방문하는 것, 즐길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는 값비싼 오마카세나 오페라를 예약하는 것, 어렵고 두꺼운 철학 서적을 마음 굳게 먹고 시작하는 것 등이 주는 느낌과 거의 대척점에 있는 기분이 들게 할 수 있는 재능이 나에게는 있다. 게다가 과거의 나 포함 많은 이들이 이 또한 역량의 일종임을 간과하고 있다. 이 능력은 어쩌면 나만 가지고 있거나 나만 써먹을 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미묘하고 강력한 재주를 앞으로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혜킬, 혜이드, 혜파리야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앞으로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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