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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파리 Jun 25. 2024

부유하기

혜이드가 씁니다

"채민주가 쓴 것 좀 읽어봐라. 참 잘 썼다."


 실패? 실패를 해본 적이 있던가? 적어도 내가 선택한 것들에 대해서는 처절하게 실패해 본 일이 없다. 아니, 없는 것 '같다'. 늘 이런 식이다. 확신이 없다. 내 시간은 남들보다 더 빠르게 흘러간다. 뭐든 정신없이, 대충만 안다. 하루치 호기심, 하루치 열정으로 살아간다.


 지금까지 삶에서의 삼 분의 이가 부정의 경험이었다. 부모님이나 정규 교육과정이 나한테 해줄 수 있었던 건, 문밖 시린 현실에 치이지 않도록, 정신 좀 차리라고 숟가락을 처 들고 가볍게든 무겁게든 내 머리를 두드리는 일이었다. 숟가락 좀 맞는다고 죽지는 않을 테지만,  무형의 숟가락 살인마들에게 20년을 맞다 보니 편도체가 커지다 못해 비대해졌다. 겁내고 경계하는 걸 잘하는 것 같다. 뭐든 깊이 알려고 하면 무서워진다.


 거의 모든 것에 적당히 관심 있었고, 괜찮게 하는 척할 수 있었다. 엄청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없고, 정말 좋아하는 것도, 싫은 것도 없었다. 성인이 되고 나선, 사람이고 경험이고 취미고 전공이고 직업이고 뭐든 간에 일단 눈이 가면 살살 두드렸다. 이것도 나름 용기 낸 거다. 한 번 시작하면 어느 날 갑자기 늙어있을까 봐 혼자 아주 오래 생각하고 두드렸으니까.


 "똑똑." 살짝 열려도 그만, 안 열려도 그만. 문이 열리면 잠깐 들어가 앉아 있다가 나와버린다. 그 안에 눌러앉을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무서워진다. 자신이 없어서. 하염없이 얕고 가벼운 나는 어차피 얼마 안 가서 늙어버릴 텐데, 죽어버릴 텐데, 시간도, 체력도, 돈도, 재능도, 그렇다고 인내심은 더더욱 없는데. 그 없는 걸 다 끌어모아다가 쏟아부은 게 성에 안 찰까 봐. 너무 열심히 하면 미완인 게 부끄러운 채로 더 빨리 죽을 것 같다. 어쩌면 이것도 변명일지도.


근데 문제는 남의 집 문들만 한참 두드리다가 지쳐서 돌아왔을 때, 내가 내 문 앞에 서서도 들어가길 한참 망설인다는 거다. 꽤 괜찮은 매트리스도 깔아놨고, 좋아하는 노래도 틀 수 있지만, 오래 비웠으니 안에는 먼지가 굴러다닐 거고,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에 바퀴벌레도 있을 거거든. 하지만 집을 치울 생각을 하진 못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온다. 집 치우다가 인생이 끝나버릴 것 같아서 두렵다. 눈 감기 직전에야 '이게 아닌데' 할까 봐. 또 밖에 나와서 아무 문이나 두드린다. 그거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거야.


 성인이 된 이후로는 긍정이나 성공의 경험만 있었다. 다만 아주 미약한. 숟가락 살인마들의 선물. 한껏 신경을 곤두세우면 내 앞에 놓인 게 이길 싸움인지 아닌지 정도는 느낌이 쉽게 왔다. 질 것 같으면, 그게 내가 아무리 동경하고 원했던 거라도 휙 뒤돌아 걸어가 버린다. 그러나 아주 느릿느릿, 몇 번이고 남몰래 곁눈질하면서. 뭐 언젠가 운명이라면 다시 만나겠지 하면서.


 그러다 보니 술술까진 아니라도 얼렁뚱땅 인생이 풀려왔다. 미미한 긍정이나 성공의 경험. 인생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저 위에서 보면 이미 어느 정도 뚫려있는 길인데 더 낮은 차원에서 보기엔 알쏭달쏭하니까 괜히 발 한 번 뻗어보고. 살금살금 걷다가 문이 나타나면 한 번 두드려보고. '이 길이 맞긴 한가 보네?' 여기나 저기나 비슷한 지역을 빙빙 돌면서 안심하고. 너무나도 넓고 하염없이 얕게, 안일하기 그지없는 삶이다.


진취적인 자기 계발서들은 도전과 실패가 없는 삶은 훌륭한 성공과 성장을 누릴 수 없다고 했는데, 그게 뭔데? 질 걸 뻔히 알고도 뛰어 들어서 결국 상처받고 마음 붙일 데 없이 길이 아닌 곳들을 떠돌아다니다 할머니가 되는 것도 성장이고 성공인가? 아님 그냥 내가 치열한 셀프 가스라이팅 끝에 두려워져서 실체도 없는 시간이라는 것에 섀도복싱을 하는 건가? '성인', '성공', '성장'이라는 단어도 웃긴다. '이룰 성(成)'을 쓰다니. 누군가는 이루긴 하나? 나만 이루지 못하는 건가? 죽기 직전에서야 마침내 실패의 경험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죽을 때까지 '성인'이 되지 못했구나. 실패했구나.


 아 있다 실패의 경험. 매 연애에서 실패했다. 당연한 일이다. 연애에서 성공이라는 건 없거든.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성공한 연애는 결혼이 아니라 권태에 봉착한다. 어쩔 수 없다. 뭐든 인내심을 가지고 마지막 순간까지 '노오력'이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연애를 할 땐, 그 사람 방에 조금 더 오래 머무르려고 애썼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은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아닌가? 이것만은 잘하고 싶었던 건가?


 왠지 절실해져서 "똑똑."이 아니라 "쾅쾅!"하고 들어갔다. 그런데 우스갯소리로 남편들이 하는 말이 있지 않나, "여자친구가 집에 안 가요."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 집에, 어떻게든 마음에 들어보려고 뭐라도 있는 '척'을 하면서, 얼마나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을까. 내가 무모하게 비집고 들어가 들쑤셨던 것처럼 나도 막무가내로 쫓겨날 수 있는 거다. 그럼 또 금방 무서워져서 떠나기를 결심한다. 난 아무것도 없는데 더 이상 깊이 파고들면 나도 죽고 이 사람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차라리 우리가 믿는 '결혼'이라는 성공에 닿기 전에 나오는 편이 낫지 않냐고 자위하면서.


하지만 또, 나는 언제나처럼 확신이 없거든. 내가 나와 놓고 서성거리면서 괜히 또 살살 두드려본다. "똑똑." 열리지 않는다. 괜한 기대란 거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남몰래 곁눈질하면서 멀어진다. 뭐 언젠가 운명이라면 다시 만나겠지. 너무 열심히 하면 삶이 금방 끝나버릴 것 같다. 이럴 때마다 차라리 언제가 끝인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럼 어떤 식으로든 죽을 만큼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금방 죽어버릴까 봐 무서워서 아무것도 열심히 안 하겠다 선언해 놓고 이젠 언제 삶이 끝날지 알고 싶다니.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 연애에 실패한다. 사랑은 이런 게 아닌 것 같은데. 아닌가? 뭘 해도 비슷하다. 끝까지 가본 일이 없다.


 실패하기 전에 지속하기를 실패했으니 실패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확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채로 그저 부유한다. 모든 일에서 늘 그래왔다. 내가 선택한 것들에 대해서는 처절하게 실패해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나트랑서 이거 보고 아줌마들한테 자랑 실컷 했쓰. 울 딸 참 잘 썼네."


 기회가 생겨서 글을 쓴다. 쓰는 게 아니라 토해내는 행위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채민주는 내 동생이고, 이과를 갔다. 나는 국문학과를 갔는데. 국어 과외 선생님이 좋아서, 수능 국어 지문 읽는 게 재밌어서 국문학과를 갔다. 내내 뭐 하나 제대로 쓰질 못했다. 소논문도 과제도, 하다못해 인스타 사진에 딸린 한 줄도. 나름 오래 생각하고 두드린 문이라 후회는 없었다. 그래도 '성공'을 하진 못했다. '실패'도 하지 못하고.


 우연찮게 며칠 전, 차마 열어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문이 빼꼼 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그 문을 열어줬다. 마침 오래 앉아 있던 남의 방에서 나와 시간도 많겠다, 먼지가 굴러다니고,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에 바퀴벌레도 있을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하루 종일 노트북을 바라보고 앉아있다. 꽤 괜찮은 매트리스 위에,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와 있는 것도, 나름 도전이긴 하다.


다시 하루치 즐거움으로 앉아 있어 볼 심산이긴 한데, 이번에도 얍삽하게 실패의 조짐이 보이면 겁먹고 바로 뛰쳐나가겠지 싶다. 물살에 찢기지 않는 해파리처럼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것도 자기합리화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까. 혹시 힌트를 얻을지도 모르니까 건강 검진이나 받아봐야겠다. 그러면 죽을 만큼 열렬히 사랑할 수 있으려나.


기약 없이 늘어진 시간은 인간을 겁쟁이로 만든다. '성인'이 되지 못했구나. 실패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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