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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파리 Jun 26. 2024

제로섬

혜킬이 씁니다

 고등학교 시절, 정치 사회 시간에 '제로섬'의 개념을 처음 접했다. 총량은 0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득을 보면 누군가는 반드시 손실을 본다는 '제로섬 게임'. 윈윈은 없다. 인간은 이기적인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자신이 승자가 되어 독식하기를 바란다. 


 모든 것이 그래 보이긴 했다. 한국은 경쟁 사회였으므로, 누군가 1등을 하면 누군가는 2등이 되어버리므로, 각 대학교가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각 회사가 모집할 수 있는 인원 역시도 한정되어 있으므로. 나도 지는 것보단 이기는 게 좋았고, 누군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면 달려들었다. 


 그런데 살아보니 나 자신과의 경쟁이 남과의 경쟁에 필연적으로 우선된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의 남과 비교하기 위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싸운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오늘의 내가 되기 위해 늘 자기 검열을 하고 개선해야 할 부분을 찾았다. 안 좋은 모습을 숨기고 억눌렀다. 다른 얘기지만, <혜킬 앤 혜이드>의 혜이드는 그렇게 자랐다. 


 하지만 어찌 보면 '안 좋은' 특성은 잘 없다. 부지런한 누군가는 '게으름'을 제거해야 할 특성이라고 생각하지만, 누군가에는 '여유 있음'의 특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즉흥적, 충동적'인 면이 현대 사회에서 부적절한 특성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이에게는 '색다른 자극, 낭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처럼. '신중함'이 누군가에겐 '우유부단함'이 될 수 있고, '화끈함'이 누군가에겐 '부담스러움'으로 인식될 수 있다. 모든 특성은 양면적이기 때문에 한 인간의 성격적 플러스와 마이너스는 결국 총합 0으로 수렴된다.


 따지고 보면 성격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부분들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나는 팔다리에 털이 거의 나지 않는다. 나긴 나는데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고 적다. 그래서 한평생 제모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누군가는 팔다리에 털이 많이 나는 것이 고민이라는 것을 어느 날 깨달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비염이 있어서 냄새에 둔하고 숨을 얕게 쉬는 버릇이 있다. 불편한 일이지만 자연스럽게 적응해 살았다. 그러나 누군가는 처음부터 건강한 기관지를 가지고 태어나 비염으로 고민해 본 일이 없을 것이다. 얼마만큼 나의 플러스, 마이너스들을 좋게, 안 좋게 평가하느냐는 개인에 달린 문제긴 하지만 그것 역시도 그냥 각각이 정한 거고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평생을 이러한 성격과 신체로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플러스 특징'은 당연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고, 남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의 '마이너스 특징'은 한 없이 두드러져 보인다. 인간은 거울 앞에만 서면 한 없이 거대하고 대단한 사람이 된다. 사람들은 하루종일 자신을 '마이너스 인간'에서 '플러스 인간'으로 바꾸기 위해 스스로 채찍질하고, 매일 아침 일어나 익명의 누군가와 벌이는 '제로섬 게임'에서 영원히 이 기기 위해 힘껏 섀도 복싱을 한다. 세상아 덤벼라~


 그러나 평범한 인간들은 짧은 삶을 사는 동안 수많은 선택의 길에 놓이고, 그럴 때마다 무언가와 싸우고 어떤 결괏값을 얻는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고. 이득을 볼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새삼스럽게도 '제로섬 게임'은 정답이 존재하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오늘은 이겼지만 내일은 질 수도 있다. 내일이 어떠할지, 심지어 이 유한한 삶이 얼마나 오래갈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다.


 결국 인생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의 제로섬 게임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삶이 조금 편해질지도 모른다. 어차피 영원히 살 수 없다. 굳이 모든 순간에 일희(+1) 일비(-1) 의미 부여하지 않아도 생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에는 모든 것들이 자동으로 0에 수렴한다. 너무 불행하거나 너무 행복하거나 할 수는 없다. 나도 알긴 아는데~ 


 0은 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숫자이면서도, 다른 어디에 엉키기만 하면 그것조차 무조건 공()을 만들어버리는 숫자다. 공정하지만 가차 없는 것이 우주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운명이고 죽음이고 우주와 자연 앞에 겸손한 척, 이해하는 척 떠들면서도 거울 앞에만 서면 영원히 살 것처럼 구는 내가 웃기다. 혜킬은 좀 시니컬하네.


나는 우주 안에서 0으로 시작해서 0으로 끝나는 영영 작은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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