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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 Sep 10. 2020

사물 쓰기, 14. 다마고치

이 손톱만한 책임감이 얼마나 큰 기쁨을 주던지요

리피아가 떠났다. 죽은 것은 아니고 나를 떠나서 사라졌다.


바이바이! 리피아을(를) 놓아주었다.


나의 첫 다마고치

다마고치라는 물건의 존재를 알게 된 지는 오래되었지만, 내 소유의 다마고치는 약 일년 전에 처음 갖게 되었다. 바로바로 이브이 다마고치! 이브이와 다마고치라는 조합이 신선하다. 포켓몬과 이브이를 한번이라도 마음에 품어봤다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디지몬보다 포켓몬이 먼저 다마고치가 출시되냐며 몇몇 디지몬 팬들이 아쉬워했다는 후문도 있을 정도)

어째서인지 버라이어티 매거진 웹사이트에도 소개가 되어있다. 역시 귀여움은 어쩔 수 없나!


포켓몬 중 이브이와 님피아를 사랑해온 나로서는 요 깜찍한 물건을 반드시 소장하고 싶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일본 여행을 갔을 때 바로 구매했을텐데, 작년 봄 아이폰SE2 발매라는 헛된 찌라시에 속은 바람에 두 번의 일본 여행을 다녀오는 사이에도 전혀 소식을 몰랐다. 그로부터 1년 후 정말로 나와버릴 줄은 몰랐지만...


생일을 대략 2주 앞두고, 나는 충동적으로 생일맞이 구매라는 말같지도 않은 명분을 달아 갑작스런 소비를 감행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한창 다마고치썸의 발매 소식으로 주변이 시끄럽던 때라, 구할 수 없을 줄 알고 단념했던 이브이 다마고치 구매를 다시 도전하게 된 것이다.


원래 가격보다 비싸게 팔고 있지만 다행히 미마존에서 배송은 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친구 두 명에게 연락을 돌렸다. 다짜고짜 물어본 것 치고, 에브이 팡인인 M은 곧바로 수락하고 구매를 결정했다. 결제를 하려던 찰나, 님피아가 최애인 남자친구 J가 생각났다. 나와 J와 M은 종종 어울려 노는 친구 사이다보니 ㅈ의 의사도 묻고 싶었다. 다급히 카톡을 해도 말이 없어 전화를 때렸다.


나: 뭐해? 전화 괜찮아?
J: 응 무슨 일이야?
나: 지금 아마존에서 이브이 다마고치 사려고 하는데 어때? 같이 살래?
J: 아...어어...
나: 왜? 너무 갑작스럽나?
J: 아니.. 그게 아니고 안 샀으면 좋겠어
나: 왜? 돈낭비라서?
J: 나 이미 샀어 너 주려고...


그렇다. J는 이미 몇 번이고 나의 이브이 다마고치 타령을 곁에서 다 들은 사람이었다. 놀라고 고마운 마음에 아무 빈 회의실이나 뛰쳐들어가 환호성을 지르며 방방 뛰었고 회의실 구석에 불 꺼놓고 쉬고 있던 동기는 덕분에 소중한 낮잠시간을 방해받았다. 나는 신나게 고마워하고 한껏 흥분된 마음으로 주문 취소를 했다. 뜬금없이 M은 남들의 사랑놀음에 이브이 다마고치를 구매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쉬우면 직접 사라구. 그치만 이랬다 저랬다 해서 미안하다!

참고로 이브이 다마고치의 진화 형태는 이렇다. 엄청 귀엽죠?


포켓몬에게 필요한건 첫째도 관심, 둘째도 관심

이렇게 시크릿이 아니게 된 시크릿 생일선물은 작년 어느 가을날 성대하게 열린 나의 생일 파티에서 개봉하게 되었다. 미리 알아서 망정이지, 생일파티에서 윈드밀 출 뻔 했다. 그래도 기쁨은 매한가지여서 그 자리에서 개봉하고 바로 부화도 시켰다. 엄지손톱만한 이브이가 꼬물거리는 꼬라지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더라.


한 가지 문제는 내가 다마고치를 처음 해본다는 것이었다. 버튼 조작법도 하나도 모르는 채로, 생일파티가 끝난 후 거의 만 하루동안 이브이를 방치해두었다. 다마고치라는 것이 껐다가 세이브 파일을 불러오는 게임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계속 케어해줘야한다는 특성이 있는 줄을 나는 전혀 몰랐다...


다음 날 아침 선물들을 정리하며 다마고치를 꺼냈더니 이브이는 잉잉 울더니 나를 떠나버렸다.

정말 큰 충격이었다.


뭔가를 키운답시고 돈을 주고 데려와서는 귀여운 모습에만 현혹되어 잠깐 구경하다가 방치하고, 꼬질꼬질해져 밥도 잘 먹지 못하고 떠나버린 이브이에게 너무나 미안해졌다. 아니 다마고치가 이렇게 사람 죄책감 주는 물건이었습니까?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다마고치가 처음 출시되었을 때에는 일본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전부 다마고치 밥 주고 똥 치우느라 면학 분위기에 방해가 되어 금지를 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니 원래의 다마고치가 어떤 물건인지 알만하다. 그나마 포켓몬이라 안 죽고 그냥 나를 떠나기만 해줬던 것이다. 바이바이 인사도 하고 떠난다니 젠틀하기 그지없다.


리셋 버튼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라서 헤메다가 겨우 재구동을 했다. 이렇게 안 하면 이브이의 마지막 인사가 화면에 계속 떠있게 된다. 엄청나게 죄책감이 들어버리고 만다. 어쩌다 세상에 이런 물건이 나온 것인지.


회사에서도 틈틈이 챙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주말동안 깨달아 다행이었다. 사용설명서가 포장지 사이에 끼워져 있는걸 발견하고 설명서도 열심히 읽고 새 이브이를 맞아들였다. '너만은 잘 챙겨주리라' 다짐하며 여분의 파우치를 준비하고 키링도 달았다. 워낙 조그맣고 동그래서 손에서 빠져 잃어버리기 딱 좋게 생겼더라. 덕분에 사놓고 안 쓴 키링 하나가 활약하게 되어 다행이다. 이런 날을 위해 예쁜 물건은 일단 사두어야 하는 것이지. 언젠가는 쓸모가 생깁니다.


리피아야 잘 살아 그동안 고마웠어

그렇게 출퇴근을 하며 3일간 밥주고 놀아주고 털 빗어주었더니 9월 4일 무렵, 뜨르른. 리피아가 되었다. 진화하는 순간을 보지 못해서 아쉽다... 출근해서 일하고 밥주려고 보니까 애가 자라있더라. 이 게임이 정말 웃기는 게, 어린 이브이는 9시에 잠들지만 성장해서 진화한 리피아는 10시에 잔다. 진짜 웃기다.ㅋㅋㅋㅋ


약 4주를 동고동락하며 키웠다. 진화를 하고 나면 거기서 더 변하는 것은 없다. 다른 진화 버전도 궁금해지는데, 그러려면 강제 리셋을 하거나 떠나도록 방치해야 한다. 고민이 컸지만 처음 이브이를 잃은 충격이 커서 리피아를 보낼지 말지 고민하는 며칠동안은 내내 악몽도 꿨다. 이런 내 속도 모르고 회사 사람들은 귀여운 취미라며 재밌어했다. 물론 과몰입하는 나도 웃기지.


그러던 어느 주말.. 아침 9시에 나가서 저녁 8시에 집에 돌아온 날이 있다.

전날에 야근하고 들어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잠들어서는 하루종일 밖에 있었는데 하필 다마고치를 집에 두고 나가고 말았다. 다급하게 돌아와 확인해보니 이 녀석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서운한 모습으로 떠나버렸다.


미안하다 리피아야. 그래도 정말 고마웠어. 특히 바쁘고 힘들고 매일매일 일과 싸우는 한 달이었는데 너 밥 주는 재미라도 없었으면 세 번은 더 울었을거야. 종종 내게 웃어주고 잔재미를 주어서 여러모로 고맙다. 솔직히 한 달을 키워줬으면 해줄만큼 해줬다고 생각한다. 조금 아쉬운게 있다면 다음 주에 (리피아를 제일 좋아하는)H와 만날 때 널 소개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모르는 어떤 전자 포켓몬 세계에서 행복하길 바랄게. 


당분간은 다마고치를 좀 쉬어가다가 리셋하고 새 이브이를 만날 생각이다. 이번에는 어떤 이브이로 진화하게 될까 궁금해. 이브이들아 함께 하는 시간동안은 잘 해줄게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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