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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 Sep 09. 2020

사물 쓰기, 13. 수박

빠빠 빨간 맛 하나도 안 궁금해

여름이 끝나간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땀에 절은 옷을 벗으며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계절이 끝나간다.

누군가 수박을 권하지 않는 계절이 드디어 끝나간다.

나는... 수박이 싫다.

평생 이런 생각 단 한번도 안해봄


싫어하는 과일로는 수박, 멜론, 참외 등이 있어요

말 그대로다. 수박과 멜론과 참외가 싫다. 싫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과일도 야채도 아닌 듯한 오이 같은 와삭 물컹함이 싫다.

2) 씹히는 씨가 너무 많아서 싫다.

3) 먹고 나서 미묘하게 입 속이 따끔거리는 듯한 느낌이 싫다.

특히 수박은 먹으면서 줄줄줄 흘리는 게 너무 싫다. 다 먹어가면서 허연 맛이 나는 게 싫다. 달달한데 먹을수록 비린 게 싫다. 수박은 좋은데 수박바는 싫어하는 마크(아이돌 그룹 NCT 및 SuperM 멤버/랩 담당)와 정반대다. 수박은 싫은데 수박바는 좋고, 멜론은 싫은데 메로나는 정말 정말 좋아한다. 참외? 참외는 참외바도 참외나도 없잖아. 싫다.

안타깝게도 내 부모는 수박, 멜론, 참외를 좋아한다. 부모님은 좋아하는데 나는 왜 싫어할까? 부모님은 오타쿠가 아닌데 왜 나는 오타쿠일까? 여름에는 이런 사념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또 아빠가 부지런히 수박 한 통을 들고 오신다. 엄마는 환호한다. 나는 떨떠름하다. 모른 척하고 있다가 수박 먹어라~ 하면 그냥 가서 먹는다. 당분과 수분 섭취를 위해서. 과일을 나누어 먹는 가족의 정을 위해서. 엄마 아빠의 뿌듯함을 위해서. 먹고 나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일단은 먹는 게 여러모로 이로워서!


그래도 수박주스만은 절대 안 돼

수박의 애매모호함이 싫은데 수박을 물과 섞어 갈아버린다? 최악이다. 긴말할 생각 없다. 수박주스는 절대 먹지 않겠습니다.

얼마 전에는 회의를 하며 상사들에게 수박 주스를 사다 드린 일이 있다. 100%로 내 선택은 아니고 팀 선배와 함께 사러 갔다가 팀원들 몫도 챙기게 되었다. 선배가 딸기랑 수박 중 뭘 살까? 묻기에 단박에 수박으로 하자고 했다.

선배: 나나가 수박을 좋아하던가?
나: 아니요 진짜 싫어해요
선배: 팀장님이랑 상무님 걸로 고른 거 맞지?
나: 네
선배: 미쳤나봐 진짜 웃겨


팀장님이 한 입 마시고 딸기가 아님에 실망하시는 모습을 보며, 회의 시간을 만개한 미소로 시작할 수 있었다.

거짓말은 나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박

하지만 사회생활을 위해 수박을 먹어야 할 때가 있다. 여름 하면 계곡, 계곡 하면 수박, 수박 하면 빠바 빨간 맛 궁금해 허니.

이렇게 1000자를 들여 싫어한다고 떠든 수박을 내 돈을 보태 사고 급기야 집에까지 데려온 날이 있었다. 작년 7월의 일이다. 친구들과 계곡으로 놀러 가게 되면서, 출발지에 있는 마트에서 수박을 한 통 샀다. 계곡에 가서 썰어 먹으려는 계획이었다. 함께 자리한 9명의 친구들 중 한 명쯤은 수박을 싫어했겠지. 안타깝게도 그 한 명이 나다. 다 같이 사 먹으니까 돈도 나눠 내고 반 통 댕강 썰어 나눠 먹고 백숙도 먹고 또 한 명이 생일이라 케이크도 먹고. 아주 그냥 즐거웠어.

모임을 파할 때쯤 가위바위보를 해서 한 명이 남은 수박을 가져가기로 했더랬다. 다행히 내가 안 걸려서 내심 환호마저 했다. 그런데 먼저 자리를 뜨는 네 명중 내가, 하필이면 집도 제일 가깝고 같이 먹을 가족이랑 사는 사람이더라...

저는 그렇게 수박 반통과 집에 왔습니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여름에 한 번쯤 먹지 않으면 어쩐지 아쉬운 수박.

그래도 있을 때 즐기라고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야지. 씨는 뱉으면 되고 과육은 단 맛을 기억하면 된다.

오늘 먹은 멜론은 달고 따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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