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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꽁스땅스 Jan 15. 2021

베니스의 깊어가는 밤

가로등 불빛 아래 선율

해외출장은 일의 연속이라 늘 긴장상태다. 어학연수는커녕 국내 어학원을 다녔을 뿐. 외국계 회사에서 실무를 하며 익힌 생존 영어라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매 순간에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출장 중 모든 일정 후 잠시 나만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이곳 저것 기웃거리며 낯선 곳들을 경험할 때면 그 어느 때보다 신나고 즐겁다. 

기억에 남는 출장이라면 본사에서 진행하는 특별 세미나다. Creativity라는 주제로 토론도 하고 강연도 듣고 준비 중인 신상품 라인에 대한 소개도 하는 3일 동안 진행되는 세미나였다. 무엇보다도 나를 들뜨게 만든 건 세미나 장소가 바로 물의 도시 베니스!라는 사실. 긴장만 설렘 반을 안고 드디어 출발! 

한국에서는 나포함 총 3명이 참석했다.  현지에 도착해서 함께 수상 택시를 타고 세미나 장소로 도착하고 숙소 배정후 그날 저녁부터 일정이 시작되었다. 전 세계 모든 부서의 다양한 사람들과의 저녁식사로 세미나의 시작을 알리는 자리였다.  여독, 낯선 땅,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었지만 아내, 두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을 잊은 채 오롯이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저녁시간이 늦은 데다가 도착할 때까지 신경을 써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서빙된 식전 빵을 더 맛나게 먹었다. 뒤이어 나온 애피타이저로 푸아그라. 동료들 따라 빵에 발라먹었는데 세상 처음 보는 맛이었다. 진하고 풍부한데 먹을수록 느끼해지는 그런 맛. 메인 요리로는 송아지 고기 요리가 나왔는데 고기 위에 올려진 소스와 아주 잘 어울렸다. 고기도 야들야들 부드러워 맛있었다. 레드와인과 함께 하니 긴장이 풀리면서 노곤노곤해졌다. 바로 그때 마지막으로 나온 후식! 피곤함을 한방에 날려줄 달콤함 초콜릿 케이크. 식사 후 숙소로 돌아와서 완전히 뻗었다.  

다음날부터 3일간 정해진 주제 아래 그룹토론도 하고 베니스 구석구석을 다니며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미션을 수행했다. 베니스의 거리는 참 신기했다. 물 위에 지어진 도시. 자동차가 보이질 않았다. 여기저기 보이는 곤돌라, 걸어 다니는 사람들, 물 위를 다니는 수상버스. 산 마르코 광장에는 아기자기한 기념품들이 많이 보여 눈이 즐거웠다. 유리 장식품이 많았는데 무라노 섬이 유리공예로 유명하다고 했다. 비둘기며 관광객도 많이 보였다. 제일 많이 보이던 화려하고 다양한 가면들, 피노키오에 나올만한 나무공예 인형들, 다리를 지나다니다 운하쪽을 바라다보는 풍경이 참 멋졌다. 해산물이 유명해서 오징어튀김, 깔라마리를 먹고 싶었지만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그래도 미션을 수행하며 베니스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날 밤. 전기 미니 초를 들고 팀을 이루어 도보로 베니스 투어를 하는 일정이 있었는데 최종 코스는 성 마르코 광장에 있는 대성당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거리 곳곳의 은은한 가로등 불빛과 손에 든 초, 가게의 불빛들, 거리의 사람들, 간간이 보이는 곤돌라와 노랫소리, 유명하다는 카페 플로리안에서 흘러나오는 연주 소리들. 내가 이런 곳에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두리번거리며 맘속에 차곡차곡 담았다. 마르코 성당을 둘러보며 가이드분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조금씩 지쳐갈 무렵, 이제 투어가 끝나 숙소로 돌아가서 쉬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최종 집결지에 도착한 순간. 

피아노 소리와 굵직하면서도 힘이 있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성 마르코 성당의 마당에 원래 있던 건지 누군가 오늘 밤 이 순간을 위해 옮겼는지 모를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었고 연주자와 슈트를 차려입은 10명 남짓한 남자 성악가들이 피아노 곁에 일렬로 서서 멋들어진 노래를 하고 있는 거다. 까만 하늘에 비추는 것이라곤 성당 마당에 가로등 불빛. 그때의 황홀함이란! 동료들과 공연하시는 분들을 둘러서서 마치 나를 위한 연주인 양 한참을 푹 빠졌다. 서로 감탄하며 출장을 온 것도 잊은 채. 3일간의 긴장, 피로감이 은은한 가로등 불빛과 어우러진 피아노 반주와 아름답고 힘 있는 화음에 씻겨나가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감동의 눈물이 찔금. 회사의 일원인 게 자랑스럽기까지 한 밤이었다. 따뜻한 가로등 불빛이 우리 모두를 감싸며 아름다운 선율이 울렸다.  베니스의 깊어가는 밤을 잊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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