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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꽁스땅스 Jan 24. 2021

육아도우미 이렇게도 찾아요

고운 상아색 한복을 입고

시어머님이 돌봐줄 수 없게 되어 첫째를 데리고 온후 도우미 할머니를 구해야 했다. 회사일이 바빠 친정엄마가 집에 와 계시면서 아이를 돌봐주셨고 언니는 동네 아는 인맥을 통해 사람을 찾았다. 아파트가 처음 지어질 때부터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던 언니. 늘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의지가 되어 언니가 사는 옆 동으로 이사한 지 이틀째.  우연히 놀이터를 지나가다 항상 놀이터에서 아이와 함께 오시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그 할머니는 동네 어느 집에 상주하시면서 육아도우미로 일하셨고 워낙 싹싹하셔서 동네 엄마들에게 육아 관련 이야기로 나누실 정도로 친화력이 좋으셨다.  급한 마음에 언니는 할머니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가만히 들으시더니  친한 육아도우미 할머니가 길 건너 아파트에 있는데 그 집에서 나와야 하는 상황이라며 일자리를 알아보신다며 소개해 주고 싶다고 하셨다. 언니는 친정엄마와 함께 우리 집으로 방문해 주실 것을 요청드렸다. 할머니 두 분이 우리 집에 오셨고 친정엄마와 첫째, 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회사에서 일하던 중에 친정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 수빈 엄마야, 좀 전에 도우미 할머니 한 분 집에서 뵈었다. 아이를 많이 키워본 경험이 많으시더구나. 사람을 더 알아볼 수도 있지만 어차피 엄마가 키우지 않는 한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어. 엄마 생각엔 그냥 이 할머니가 오셨으면 좋겠다. 그리 알고 저녁에 자세히 이야기하자"


"네? 난 아직 얼굴도 안 봤는데. 좀 더 알아보지 않고요? 아.  알았어요. 집에 가서 얘기해요. 엄마"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도우미는 구해야는데 여력이 안되었다. 엄마 말씀에 납득이 가면서도 찾아보려는 노력도 못하고 괜히 내 생각만 고집하나 싶기도 했다. 대충 일 마무리를 하고 퇴근을 서둘렀다. 환경이 바뀐 첫째는 그래도 친정엄마와 언니와 잘 지낸 것처럼 보였다. 식사 후 아이를 보며 언니, 엄마와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사람을 쓰는 건 아니건 같은데. 물론 언니가 오래 봐온 할머니 소개라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 소개해 준 할머니도 이 동네에 오래 사셨고 친구분도 그래. 그리고 이름만 대면 아는 국회위원네서 오래 육아며 집안일해 오셨대.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에서 나오게 되셨는데 마침 우리 집이랑 연결이 된 거야. 언니가 생각했을 때 나쁘지 않은 거 같아. 그 집 막내가 초등생인가 그런데 할머니를 아주 잘 따른다고 하더라. 기본적으로 아이를 좋아하시는 분으로 느껴졌어"


" 그래 수빈 엄마야. 별 사람 없다. 아이를 예뻐하면 된 거야. 음식은 좀 못하면 어때? 청소는 또 어떻고? 아이 비위를 잘 맞추면 우린 그걸로 감사한 거지. 더 사람 찾지 말고 그 할머님 오시라고 하자. 어차피 야근도 많고 출장도 잦으니 출퇴근 도우미는 아이도 너도 힘들어. 수빈 아빠도 그래. 아이를 맡아줄 상주 도우미가 있어야 너희 부부가 마음 편히 일할 수 있어’


" 잘 모르겠어. 알아볼 여력도 안되고. 이사하고 짐 정리도 다 못했고 아이는 봐야 하고 일은 해야겠고. 시어머님 건강 걱정도 되고. 갑작스러운 변화로 심란하네. 암튼 엄마랑 언니 생각에 따를게"


"일하면서 애 키우는 거 쉽지 않아. 한 가지 엄마가 해주고 싶은 말은 일을 계속할 거라면 절대 도우미 할머니께 싫은 내색하지 마라. 마음에 안 드는 게 반드시 있을 거야. 살림부터 아이를 돌보는 방법까지. 네 스타일이 아니더라도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수고하신다는 말씀만 해야 해. 엄마가 키워도 부족한 부분은 있어. 맘 크게 먹고 일에 집중하고 집에 와서는 아이에게 집중하고. 알았지"


" 알았어요. 맘에 안 드는 거 말도 못 해? 엄마가 하는 말 알아들었어요."





며칠 후 할머니는 우리 집으로 이사를 왔다. 방 하나를 할머니께 내드렸다. 그렇게 네 식구가 살게 되었다. 밤에 아이는 내가 데리고 자겠다고 말씀드렸다. 낮 동안 아이랑 씨름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고 푹 주무시는 게 아이한테도 좋을 것 같았다. 주말에는 할머니가 외출하시도록 했다. 토요일 아침만 챙겨주시고 개인 시간을 가지시라고 했다. 낯선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환경이 바뀌었는데도 잘 적응해 주었다. 물론 밤마다 몇 번씩 깨서 남편과 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할머니는 아침잠이 없으셔서 일찍 일어나셨다. 아이랑 실랑이를 하다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부엌에서 소리가 들려 시계를 보면  새벽 네다섯 시 일 때가 많았다. 남편이 일찍 출근하기도 했지만 부엌살림을 파악하시느라 싱크대 여닫는 소리, 아침 식사 준비하는 소리에 우리 부부는 잠을 깨는 날이 많았다. 거침없이 손놀림으로 음식을 만드셨고 새벽부터 가스레인지에는 아기 옷 빨래를 삶는 솥이 올라가 있었다. 부부 사이에도 서로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듯 낯선 할머니와 우리 부부는 조금씩 서로의 스타일을 알아갔다.


감사한 것 중 하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른 출근하는 남편의 아침밥을 챙겨주신 것이다. 새벽 수영을 다니는 나에게 푹 자고 일어나서 운동을 가도록 배려해 주셨다. 할머니가 만드는 음식은 토종 한식이었다. 경상도가 고향이라 가끔 사투리 섞인 말씀도 하시기도 했다.  늘 싱크대에 한가득 벌여놓으시며 음식을 하시지만 맛은 참 좋았다. 내가 주로 주말에 장을 봐 드리면 있는 재료에서 된장국, 나물류를 잘 만드셨다. 할머니 덕분에 처음으로  배추전을 맛보기도 했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봤는데 보기와는 달리 맛이 일품이었다. 할머니께 월급을 드리면 주말에 외출하고 돌아오시는 길에는 늘 과일 한가득 사 오셨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철마다 다양한 과일을 맛볼 수 있었다. 할머니는 아파트 주변 상가 사장님들과도 친분이 있으셨다. 할머니가 외출한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상가에 빵이라도 사러 가면 아이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이 덕에 오히려 '수빈이 엄마 시구나'며 먼저 인사를 받았다. 야근으로 늦는다는 전화를 드릴 때면 언제나 상냥한 목소리로 "엄마 씨, 집 걱정 말고 일 천천히 잘 마무리하고 와요, 우리 엄마 힘들어서 어떡해?" 하며 다독여 주셨다. 어색하기만 하고 낯설기만 했던 할머니와 우리 부부, 첫째는 할머니와 점점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첫째는 30개월에 처음 동네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다.  할머니를 통해 동네에서 엄마들 사이에 인기 있다는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고 상담 후 신청했다. 유난히 낯가림이 심했던 첫째는 적응하는데 한 달가량 걸렸다. 출근길에 손을 잡고 어린이집 문 앞에만 가면 안 들어간다고 서럽게 울어댔다. 결국 할머니는 출근하는 데 엄마도 아이도 마음이 안 좋다며 본인이 잘 달래서 보낼 테니 걱정 말고 출근하라고 하셨다. 아이는 한 달 정도 할머니와 등원을 했고 어린이집 안에 들어가더라도 맨 뒤쪽에 혼자 떨어져 앉아 보기만 했다. 할머니는 어린이집 원장님과 선생님께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물었고 선생님들도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다. 할머니의 노력 덕분인지 어느 날 아이는 어린이집 활동에 참여했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었다.


어린이집이 끝나면 삼삼오오 아이들끼리 놀이터에서 노는데 할머니는 젊은 엄마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첫째도 함께 놀 수 있도록 했다. 늘 아이가 우선이었고 아이에 관해서는 엄마인 나보다 더 아이의 시선에 머무르셨다. 그렇게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랐고 어린이집에서 단짝 친구를 사귀기도 하며 씩씩해졌다. 어린이집 졸업식을 앞두고 원장님과 선생님께 편지를 쓰면서 엄마로서 짠해지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날 저녁 퇴근 후 집에 도착하니 할머니는 첫째에게 무한 칭찬과 건강하게 잘 다녀주어 고맙다는 말씀을 반복하셨다. 처음 적응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할머니의 기다림과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뒤로 태어난 둘째도 돌봐주셨고 첫째는 유치원 졸업을 맞이하게 되었다. 졸업식에 참여하기 위해 오전 반차를 내고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둘째는  돌이 지나 아직 아기여서 엄마를 많이 찾았다. 첫째를 챙겨 먼저 보내고  둘째 아침을 먹이고 있었다. 분명 새벽에 남편 출근할  할머니가 계셨는데 인기척이 없으시다. 잠시 밖에 나가셨나 싶어  세수도 못하고 둘째랑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유치원 졸업식을  시간 정도 남았고 머리라도 감고 얼굴에 뭐라발라야 하는데 그날따라 할머니는 어딜 가신 건지  혼자 동동거리고 있었다. 현관 번호  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어머나 우리 할머니 미장원에 다녀오셨다! 허걱!


" 엄마야, 오늘 우리 수빈이, 내가 키운 수빈이 유치원 졸업식이라 멋 좀 내려고 미장원 다녀왔다"


" 아 네 할머니. 잘하셨어요. 근데 저 아직 씻지도 못했어요. 말씀이라도 하고 가시지"


"저 좀 준비하게  둘째 좀 봐주세요"


" 그래요, 내가 둘째 옷 입힐게요"


할 말을 잃은 나는 생각할 겨를 없이 옷을 입고 거실로 나왔다. 또 한 번 깜놀 상황! 우리 할머니. 고운 상아색 한복을 입고 어서 가자며 서 계시다. 엄마야!


" 엄마 갑시다. 곧 유치원 졸업식 시작합니다"


"아 네, 가시죠. 할머니 한복 잘 어울리네요. 제가 둘째 손잡고 갈게 조심히 나가셔요"


정작 엄마인 나는 잘 말리지 못한 추레한 머리에 입술만 벌겋게 칠하고 둘째 신경 쓰며 걸어갔고 할머니는 우아하게 우리 앞을 사뿐사뿐 앞장서 가셨다. 졸업식장에서도 둘째는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첫째 사진을 찍으면서도 진땀을 뺐다. 우리의 할머니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며 의자에 앉아계시고. 졸업식 후 할머니는 첫째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셨다. 자기 손녀딸 졸업식이라고 하시며 연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셨다. 땀범벅이 된 나는 할머니와 첫째 사진을 찍어드렸다. 할머니와 두 아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나는 회사로 향했다.


돌아보면 할머니와 웃픈 에피소드들이 많다. 그렇게 귀여운 아이 같은 할머니와 8년이란 시간을 함께 했다. 우리 집에서 떠난 신 후에도 첫째 생일날에 전화를 주시고 동네 상가 빵집에 케이크 배달 선물을 보내주셨다. 작년 첫째가 대학 합격 소식까지 전할 수 있었다. 주기적으로 전화를 주시고 나 역시 안부차연락을 드렸다. 사람의 빈자리라는 게 그 사람이 떠난 후에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라는데. 할머니가 안 계시고 출퇴근 도우미가  왔다. 그동안 할머니의 거친 손놀림 덕분에 여유로운 아침을, 우리 가족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이 느껴졌다. 할머니와의 소중한 인연으로 힘든 육아 시기를 잘 지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디에 계시든 건강히 오래오래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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