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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향 Jun 19. 2023

누구냐 넌?

불청객이 된 사연

살면서 쪽팔렸던 순간을 적어보는 미션이 주어졌다. 쪽팔렸던 순간이라... 어라? 별로 없을 것 같았는데 낯부끄럽고, 심장 쪼그라드는 몇몇 순간들이 떠오른다. 입술에 우유 자국을 묻히고 버스를 탔는데, 옆자리 남자가 쳐다보는 걸 의식하며 혼자 김칫국 들이킨 사연, 미팅 자리에서 급작스러운 응가 신호에 울부짖으며 발을 동동거렸던 사연, 모르는 걸 아는 척했다가 결국 다 들통났던 사연 등...  생각을 끄집어낼수록 바통터치 하듯 사연이 계속 떠오른다. 수많은 쪽팔림을 경험하고 살았음에 새삼 놀라고 있는 중.  그중에서도 가장 어이없고 황당했던 그날의 기억을 꺼내볼까 한다.


대학생 시절, 용돈을 벌기 위해 집 근처 헬스장에서 아르바이트한 적이 있다. 집에서 5분 거리에 위치했던 헬스장에서 알바는 그야말로 꿀알바였다.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카운터에서 회원들에게 락카키를 전달하며 인포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비교적 단순한 업무여서 근무하기 편했고, 일의 강도에 비해 급여도 꽤 쏠쏠했던 터라 알바 자리로는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었다. 게다가 분기별로 등록하는 시스템이다 보니 고정적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던 회원들과의 친분도 꽤 두터워졌다. 문을 닫을 때쯤이면 두 관장님과 고정 회원들 모두 옹기종기 모여 야식을 주문하고 술판을 벌였으니...! 이건 뭐 헬스장인지 야식 포차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노는 재미도 쏠쏠했다. 


고정 회원 중에는 나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이 2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과 개그 코드가 잘 맞았다. 서로 말만 하면 빵빵 터졌고 워낙 웃기게 생기기도 했고... 엄마들도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데다 정말 허물없이 지내다 보니, 친동생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확히 언제인지 어떤 사연인지 생각나지 않지만, 연락이 뚝 끊어졌던 것 같다. 아마도 군대를 가고 제대하는 과정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오랜만에 그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묻고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만남은 특정 장소가 아니라, 같은 동네에 살다 보니 사거리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 어디 어디 사거리에 차를 타고 오겠다는 내용. 그 말에 나는 알겠노라 하며 약속 장소에 나갔다. 


저녁을 먹을 시간쯤 된 것 같다. 도로 한편에 비상 깜빡이를 넣고 대기 중인 검은 차가 눈에 들어온다. 옳지, 저 차구나! 싶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차에 올라탔다. "야~~ 이게 얼마 만이고! 그동안 잘 지냈나? 어째 이래 소식도 없었노?" 구수한 사투리를 쏟아내며 반가움을 마음껏 표현하는데, 어찌 반응이 심통치 않다. 운전석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그는 뒤통수만 보인 채 쭈뼛거리고 있었다. 이 녀석 오래간만에 만나서 어색하구나 싶어 나는 더욱 넉살을 부리며 말했다. "(등을 내리치며) 니 뭔데? 와그라노? 간만에 만나니 심장이 두근두근 하나? 히히히" 그런데 그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깐죽거렸던 내 얼굴이 한순간에 싹 굳어버렸다. 


"저... 저기... 누구신지?"

아뿔싸...!


생판 모르는 사람 차에 올라타서 농담을 쏟아내며 등까지 후려쳤던 나의 행동에 얼굴이 화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선뜻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뿐...  그 사람은 또 얼마나 황당했을까? 웬 모르는 여자가 갑자기 차에 타서, 등까지 후려쳤으니, 기분이 나빴을지도 모른다. 화를 낸다 해도 나는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 저... 정말 죄송합니다. 아는 동생인 줄 알고 그만... 아고..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거듭 사과를 하고 황급히 차에서 튀어나왔다.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진짜 동생으로 추정되는 차가 뒤에서 빵빵거렸다. "누나 거기서 머하노?"라고 말하는 녀석을 향해 '이시끼 @#$' 나도 모르게 조용히 욕을 읊조렸다.    


한동안 누군가의 차를 탈 때 얼굴을 확인하는 버릇 같은 것이 있었다. 불청객이 된 그때를 생각하면 쪽팔리다 못해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여전히 피식 웃음이 난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살면서 가장 쪽팔렸던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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