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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하기 Feb 15. 2024

마음이 무리를 해도 몸이 아프다


"요금은 모두 납부하셨고, 모두 해지해 드렸어요.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실까요?"




멍하니 서류처리가 끝나길 기다리던 내게 친절하게 안내해 주시는 상담원 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내 손에는 해지 서류가 들려있었다. 이로써 이 세상에 아버지 이름으로 되어있던 것 하나가 또 없어지게 되었다.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예년보다 길었던 크리스마스 연휴. 올 사람이 누가 있으랴 싶어 주위에 거의 알리지도 않고 장례를 치렀다. 너무 급작스러웠고 예고도 준비도 없던 쓸쓸하고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깊은 편은 아니었다. 늘 나와는 대립구도였고, 내가 하려는 것에 반대를 더 많이 하셨던 분이셨다. 어린 시절 피아노가 배우고 싶다 해도 성적을 핑계로 못하게 하시거나 중간에 그만 두어야 했다. 그래서 난 2년 넘게 피아노 학원을 다녔어도 체르니까지 배운 적이 없다. 유난히 공부에 엄격했던 터라 90점을 받아와도 80점을 받아와도 100점이 아니라 혼나던 어린시절의 기억은 사랑이 넘치는 것보단 불안과 위축이 많았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때의 내 부모의 나이를 지나감에 따라 당시 그 어린나이에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부모노릇하기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마음의 응어리가 풀린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술이었다. 술을 마시고 오신 날이면 유난히 감정이 격해지던 아버지는 실수를 많이 하셨다. 결국 그 술이 문제가 되어 우린 최근 몇년간 연락 한 번 하지 않는 부녀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다. 명절에도 생신에도 전화한통 드린 적 없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 염치로 슬퍼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나는 주변에 많이 알리지도 않은 채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삼우제를 치르고 49제를 치뤘다. 장례식장에는 대부분 동생 손님이 많았다. 회사생활을 곧잘 해 온 동생이 꽤나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짧은 장례 기간, 긴 연휴, 급작스러워 준비가 미흡해 어수선한 장례식장 등 손님을 길게 맞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우리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먼길 마다않고 달려와 준 이들, 밤 늦은 시간에라도 기꺼이 달려와 마음을 보태준 이들, 상황이 여의치 않아 못가봐서 미안하다며 전화로 함께 울어주는 이들 덕분에 '그래도 나 잘 살았구나'를 확인하게 되었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절에서 49제를 치르기로 했기 때문에 준비할 것은 없었다. 그저 내 마음이 심란했을 뿐이다. 그럴 자격이 내게 있겠냐며 뒤로 한 발 물러서 장례를 치르고 납골당에 안치를 하고 삼우제까지 치뤘지만, 이제부터 정리해야 할 자잘한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니 더는 물러나 있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비수기라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내가 자진해서 자잘한 일들을 맡기로 했다. 


아버지 집 인터넷을 해지하고 휴대폰을 해지하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날 새벽 경찰서에서 시체인도증을 접한 그날같았다. 낯선 서류, 낯선 단어들 틈에 섞여 있는 아버지 이름 석자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것처럼, 아버지 이름으로 되어 있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을 보는 상황이 너무 이상했다. 거부감이 들었다. 외면하고 싶었다. 세상에 아버지가 머물렀던 흔적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 얼마나 자주 우리는 아버지를 떠올리게 될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 날이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심란했다. 겨우 잡은 마음이 다시 흔들리는 날은 아버지 관련된 일을 처리한 날이었다. 


49제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이틀을 내리 잠만 잤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먹는 것도 잊은 채 잠결에 일어나 단지 밥과 물만 채워두고 다시 잠에 빠져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최소한의 활동만을 하면서 이틀간 잠만 잤다. 그리고 괜찮은 것 같았다. 


한결 몸이 개운하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었던 걸까. 연휴가 끝나고 아버지 서류를 들고 주 거래 은행과 증권사에서 지난 10년 간의 거래내역을 뽑아들고 들어온 날, 그 동안 밀려 있던 전기요금과 수도요금, 카드요금을 모두 납부하고 카드해지와 전기 수도 요금의 명의를 내 앞으로 돌리던 그 날부터 갑자기 몸살이 찾아왔다. 다시 꼬박 하루를 앓아 누웠다. 잠결에도 내가 앓고 있음을 알정도로 온 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게 앓았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고, 온 치아가 다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어떤 방향으로 누워도 침대와 마주닿은 살갗이 욱신거리고 이불에 닿은 감각과 그 무게가 버겁기만 했다. 이불을 걷어내면 춥고 덮으면 무거웠다. 가벼운 봄가울 솜이불인데도 말이다. 


'49제를 치르고 남은 연휴동안 충분히 쉬었는데 왜 아픈거지?' 싶었다. 

몸이 무리를 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무리를 한 것이었다. 


'나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빠를 사랑했구나. 나 사랑 받았었구나'


지난 시간동안 어떤 관계였든 아버지였다.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인 시절이 있지 않은가? 예고도 없이 준비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내 세상 중 절반이 사라진 것이다. 손 쓸 틈도 없이 말이다. 슬퍼야 마땅한 상황에 난 내 슬픔보다는 엄마의 슬픔과 동생의 상실감을 먼저 챙기려고 했던 것 같다. 눈물이 나오다가도 엄마 울음소리가 나면 신기하게 눈물이 멈췄다. 주차된 차 안에서 혼자 숨죽여 울다가 상주복을 입은 채 착찹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동생이 보이면 역시 눈물을 멈추고 부랴부랴 장례식장으로 뛰어들어갔다. 슬픔보다는 놀람이 컸고, 상실감보다는 죄책감이 큰 채로 장례를 치뤘다. 49제를 기다리는 기간동안 아버지 집을 정리하면서 조금씩 슬픔과 상실감을 마주보기 시작했고, 49제를 치르면서 비로소 슬픔과 상실감을 인정하고 표현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고 나니 그 동안 눌러놨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몸에 무리로 온게 아닐까 싶다. 


매일 일기를 쓰고 명상을 하며 내 감정들을 마주보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럭저럭 잘 흘려보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도 이 감정의 크기가 컸던 모양이다. 다행히 몸살은 하루만에 잦아들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마냥 꾹꾹 눌러담은 채 지냈다면 더 많이 그리고 오래 아파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루 앓고 끝낸 것이 참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여전히 안에는 슬픔이 남아있다. 얼마나 더 남아있을지 알 수는 없다. 안타까움도 있고,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부정하고픈 마음도 있다. 미안함과 그리움도 있다. 감정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외면하지 않고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흘려보낼 준비가 다는 것을 이제는 같다. 앞으로 어쩌면 사는게 바빠 잊고 지내가 무언가를 보고 코끝이 찡해질 수도 있고, 눈물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번씩 보고 싶어질 수도 있고, 그 크고 투박하지만 따뜻했던 손이 그리워지기도 할거다. 그때마다 내가 내게 해 줘야 할 말은 '그만해, 충분하잖아. 이제 잊어. 이런다고 달라지는 없어'가 아닌, '괜찮아. 울고 싶으면 울자. 실컷 울고, 그리워지면 그리워하고 미안하면 미안해하고.. 그러다 괜찮아지면 하루를 살고. 그러면 되지. 괜찮아'라고 말해야 흘려보내진 다는 것도 이제는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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