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늦깎이 미술사학도 Feb 12. 2024

서울 청룡사 괘불탱화 특별전 관람후기

통도사 성보박물관은 작년 10월 21일부터 서울 청룡사 괘불(탱화)를 전시 중이다. 괘불은 사찰에서 영산재나 예수재 등 큰 법회가 이루어질 때만 볼 수 있는 대형불화이므로, 여간해서는 보기 어렵다. 청룡사 괘불 역시 평소에는 괘불궤에 넣어진채 대웅전의 후불벽 뒤편에 보관된다. 그러므로 불교회화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해당 전시는 오는 4월 14일까지 계속된다(사진0).

사진0. 최근 찍은 통도사 성보박물관 사진이 없어 과거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우측 사진은 청룡사 괘불 특별전 포스터.


서울 청룡사 괘불은 세로가 523cm, 폭이 332.5cm인 삼베 바탕에 채색을 입혀 제작되었다(사진1). 위아래로 나무로 만든 축을 달았고, 상축에는 쇠고리가 3개 달려 있다. 이렇게 축과 고리를 단 이유는 말고 펴기 쉽게 하기 위함이다. 바탕 천 가장자리로는 붉은색 테두리를 둘러 화면을 구획하였고 테두리 바깥은 별다른 채색을 하지 않았는데, 이를 변아라 한다. 

사진1. <서울 청룡사 괘불탱>, 1806년, 삼베바탕에 채색, 523x332.5cm, 보물



화면 구성

화면은 여느 불화와는 달리 비교적 단순한 구성을 보여준다. 거대한 크기의 세 부처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 채 서있는 모습이다. 화면의 여백은 대부분 붉은색과 녹색의 채운(彩雲, 색구름)으로 채워져있다. 세부처의 무릎 부근에 그려진 채운은 아지랑이처럼 위로 상승하는 운동감이 느껴지나 다른 부분의 채운은 허공에 두둥실 떠있는 인상이 들도록 묘사하였다. 화면 최상부의 여백은 군청색으로 칠하여 천공(天空, 하늘)을 나타냈으며 좌우로 길게 표현된 구름이 확인된다(사진2). 이렇게 긴 모양의 구름은 다른 불화에서도 흔히 보이는 표현이지만, 청룡사 괘불에서는 위치에 따라 구름의 형태를 다르게 표현하여 공간감이 느껴지도록 하였다. 


사진2. 화면 최상부의 여백에 표현된 천공과 구름.


천공의 좌우로는 둥근 원광(원형 광배)을 갖춘 작은 존재들이 등장한다. 좌측은 푸른색 사자를 탄 문수동자이며 우측은 흰색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이다(사진3). 동안의 모습인 문수동자는 총각머리를 하였으며 어깨엔 운견, 신체엔 천의를 걸쳤다. 뒤쪽으로 휘날리는 천의는 이동중임을 암시하며 양손에는 긴 꽃가지를 들고 있다. 오른쪽 손가락으로 건너편에 있는 보현동자를 가리키고 있다. 그가 타고 있는 푸른색의 사자는 사자라기 보다는 삽살개에 가까워보이는데, 흰색 구름 위에 올라타고 있다. 구름의 뒤편으로 긴 꼬리가 있는 것으로보아 지상에 착지하려는 듯하다. 사자의 앞에는 서기(瑞氣, 상서로운 기운)를 내뿜는 붉은 보주가 보이는데, 마치 사자와 동자를 이끄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 같은 인상이다. 반대편에는 흰색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가 확인된다. 전반적인 표현은 비슷하나 지물로 연잎 줄기를 들고 있다. 역시 앞쪽에는 녹색의 보주가 떠있다.

사진3. 원광 속에 그려진 문수와 보현 동자. 흔히 문수와 보현은 보살로 표현되나 여기서는 총각머리를 한 어린 아이의 모습이다.


세 부처는 황색 바탕의 배경에 붉은색 연화족좌를 밟고 서있다. 먼저 중앙의 여래는 머리에 나발과 육계를 갖추었으며, 중간계주와 정상계주가 확인된다. 정상계주에서는 서기가 솟아나와 좌우의 천공으로 흘러간다. 상반신에는 연녹색의 승각기와 붉은 가사와 녹색의 복견의를 갖추었으며 하반신에는 승각기보다 연한 색상의 군의를 착용하였다. 양 손은 모아서 변형된 형태의 지권인을 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비로자나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로자나불은 세 부처의 중심에 위치하며, 가장 크게 묘사되었다. 또한 가사에는 원형의 범자문을 그려넣었는데, 도식적인 원형 문양을 그려넣은 두 부처보다 우위에 있음을 드러내었다.(사진4)


사진4. 중앙의 (법신)비로자나불


(비로자나불을 기준으로) 좌측의 부처는 보살처럼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가슴에 많은 장식을 달고 있다. 양 팔은 어깨 높이로 들어올린채 흰 색과 붉은색 천자락을 걸쳤으며, 바깥으로 향한 양 손은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서로 구부리고 있다. 보살을 연상케하는 외양과 독특한 수인을 통해 이 부처는 노사나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편에 서있는 우측 부처 역시 복식만으로는 좌측의 노사나불과 구별이 어렵다. 다만 항마촉지인을 연상케 하는 수인을 하고 있어 석가모니불임 있다(사진5).

사진5.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의 수인은 모두 제각각이다.


세 부처는 무엇을 의미할까?

세 부처는 중앙은 비로자나불, 우측은 노사나불과 좌측은 석가모니불로, 모두 합쳐 삼신불(三身佛)로 일컬어진다. 사전적으로 삼신三身이란 부처의 세가지 몸을 가리킨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화엄경』을 바탕으로 신앙되는 부처로, 각각 부처가 깨달은 법(법신 비로자나불)과 수행으로 쌓은 공덕(보신 노사나불),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하러 사용하는 방편(화신 석가모니불)을 나타낸다. 삼신본래 이지만 중생구제라는 대의를 실천하고자 방편상 셋이 되었다. 이를 삼신일체(三身一體) 또는 삼신즉일신(三身卽一身)라고 한다.


첫째, 법신(비로자나)불은 우주만물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불변의 진리, 즉 법(法)을 인격화, 신앙화한 존재이다. 법이라는 개념은 추상적이어서 근기가 낮은 신도들은 이해하지 못하기에 이렇게 형상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석가모니 부처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얻은 깨달음을 의미한다고 보면된다. 법신불은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왼손으로 감싸쥔 지권인으로 쉽게 알 수 있는데, 이는 속세와 불세계(법계)가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둘째, 보신(노사나)불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오랜 세월 수행한 공덕으로 부처가 된 존재이다. 일부 백과사전에서는 아미타불이나 약사불을 보신불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보신불의 대표적인 예시일 뿐이다. 사실상 우리가 신앙하는 모든 부처는 보신불로 보면 된다. 석가모니불 또한 3대 아승지겁이라는 무수한 과거생을 살면서 쌓은 공덕으로 부처가 될 수 있었다.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수행이 대승불교의 수행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참선하고 경전을 공부하는 좁은 의미의 수행을 넘어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돕는 보살행 역시 수행의 범주로 포함된다.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싯다르타 태자였던 석가모니불이 부처가 된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자타카(본생경)는 그가 과거세에 쌓은 무수한 공덕을 소개하고 있다. 원숭이 왕이었을때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원숭이를 구한 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호랑이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보시한 일(사진6), 왕이었을때 불쌍한 비둘기를 위하여 자신의 허벅지를 베어낸 일 등 무수한 공덕을 쌓았기에 현생에서 부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노사나불은 보살형의 화려한 복식과 어깨 높이로 들어올린 양 손을 바깥쪽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선종에서는 석가모니불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룬 후 21일간『화엄경』을 설하며 노사나불의 모습으로 지냈다고 여겼다(사진7).


사진6. 호류지 옥충주자(玉蟲廚子)에 표현된 사신사호도. 석가의 전생인 마하살타왕자는 배고픈 호랑이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보시한다.


사진7. <예천 용문사 팔상탱(1709)>, 석가는 깨달은 직후 노사나불의 모습으로 화엄을 설하고, 이후 하근기의 중생들을 위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재등장했다 



셋째, 화신(석가모니)불은 중생을 보다 적극적으로 구제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한 부처를 의미한다. 원로 미술사학자이신 강우방 선생은 정각을 이룬 부처가 한량없는 중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삼세(三世, 과거현재미래)와 시방(十方, 무한한 공간)을 가리지 않고 나타내는 무한한 몸을 화신으로 설명하였다. 중생을 고통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현실세계에 실제 모습을 드러내는 부처가 화신불인 것이다. 오랜세월 불교의 교리가 발전하며 다소 복잡하게 되었으나, 일반적으로 화신불이라면 역사상 등장한 석가모니불을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2500년전 인도에서 등장한 부처). 그래서 화신 석가모니불은 보통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삼신불은 삼신일체(三身一體)의 원리에 의하여 석가모니불과 동일시된다. 법신은 석가의 깨달음, 보신은 석가의 공덕, 화신은 석가의 육신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괘불에는 석가모니불과 더불어 삼신불의 도상도 자주 활용될 수 있었다. 또한 동자로 표현된 문수과 보현은 본래 석가모니불의 좌우 협시보살이다. 삼신불은 사실상 석가모니불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다른 보살들 없이 문수와 보현만 등장시켜도 교리상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보살이 아닌 동자 형태로 조성된 이유는 현재로서 알기 어렵다. 이 부분은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청룡사 괘불에 그려진 삼신불은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바로 화신불이 보신불처럼 보살의 모습을 한 점이다. 일반적으로 화신불은 중앙의 법신불처럼 나발과 육계를 갖춘 여래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여기서는 머리에 보관을 착용하고 몸에 장식을 매단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보신불과 화신불이 같은 존재라는 교학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으나(삼신일체), 청룡사 괘불의 화승들이 남부지방의 화풍을 참고했을 가능성도 있다. 충청과 경상도 지역의 괘불에서는 석가모니불을 노사나불처럼 묘사한 사례가 다수 확인되기 때문이다. 



화기

청룡사 괘불의 화기에는 괘불을 조성한 시기와 봉안처, 조성에 참여한 이들의 명단이 기록되었다. 화기에 따르면 괘불의 조성시기는 가경(嘉慶) 11년 병인(丙寅) 5월 8일이며, 봉안처는 양주 도봉산 원통사(圓通寺)이다(사진8). 이 원통사는 현재 서울 도봉구에 있는 원통사로, 본래 원통암으로 불렸으나 19세기들어 사세가 확장되며 절의 명칭을 바꾸고 괘불도 마련한 것 같다. 그러면 본래 원통사에 있던 괘불은 왜 청룡사에 있게 되었을까? 이 또한 미스터리하다. 필시 어떤 사연이 있었을 법한데,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사진8. 청룡사 괘불의 화기 일부분. 가장 우측에 가경 11년(1806)에 조성하여 도봉산 원통사에 봉안했다고 기록하였다. 


화기에 적힌 화승들은 수화승 민관(旻官)을 포함하여 영탄永坦, 환감煥鑑, 보연普演, 의정義定으로 총 5인이다(사진9). 이 가운데 수화승 민관의 행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문효세자묘소도감의궤』(1786)에 처음 북한산 승가사 화승으로 이름을 올린 그는, 1790년 화성 용주사에서는 대웅전 단청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수화승으로 삼장보살도를 제작하였다. 그리고『화성성역의궤』에 양주목 승려로 기록된 점으로 미루어 경기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화승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진영(眞影, 승려의 초상)이 상주 남장사에 남아있다. 기록이 부실하여 자세한 내막은 알 수는 없으나, 미루어 짐작해보면 그가 상주지역의 남장사와 어떠한 형태로든 인연을 맺고 있었을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다. 

사진9. 오른쪽 다섯번째 줄에 '금어두타비구민관(金魚頭陀比丘旻官)'이라 적혀있다.



상주 남장사는 경상도 지역에 위치한다. 민관이 1806년 원통사 괘불의 제작 이전에 남장사에 머물렀다면 인접한 경상도 지역 사찰의 괘불들을 접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석가모니불을 노사나불처럼 표현한 괘불도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그가 경상도 지역의 도상을 원통사 괘불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봄 직하다. 또한 그가 1790년 용주사의 불사에 참여했을때 그곳에서 수화승으로 감로탱화를 그렸던 상겸(尙謙)이라는 화승과 조우하여 영향을 받았을 개연성도 있다. 상겸도 수도권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1788년 상주 남장사에서 진행된 불사에 초빙받아 수화승으로 괘불을 그린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사진10). 상겸이 남장사에서 불사를 진행하며 습득한 경상도 지역의 불화 정보가 추후 민관에게 전달됬을지도 모를 일이다. 관련된 기록이 빈약하여 현재는 추론에 머물고 있으나, 추후 관련 자료가 발견되어 명백히 밝혀지기를 바란다.


사진10. 상겸이 수화승으로 제작한 <상주 남장사 괘불>, 1788년 작품.


부족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동영상으로 만들어보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_CU5EJl6a8M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