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 미륵으로 알려진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고교시절 교과서와 참고서로 국사를 공부할 무렵 접했던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일명 은진 미륵에 대한 수식어들이다(사진1). 상형 청자와 함께 고려 전기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의 소개치고는 굉장한 혹평이다. 이런 식으로 모욕을 줄 바엔 차라리 다른 불상이나 다른 장르의 미술을 소개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냉혹한 평가가 내려진 배경은 한 두가지로 특정할 수 없다. 한가지 확실한 점은 이 석상에 적용된 미감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아름다운 석불들 - 예를들면 석굴암 본존불 - 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국사 책에서 이 상을 소개한 이유를 추정하자면, 그만큼 강렬하고 남다른 인상이기 때문일테다.(개성이 뚜렷하므로 공부하는 입장에서 기억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는 어찌보면 시절을 잘못 만난 탓일 수도 있다. 과거에는 별볼일 없던 지역이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소위 핫플레이스가 되거나, 오랜세월 무명을 전전하던 연예인이 갑자기 뜨는 일처럼, 이 석상도 21세기 들어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우선 선입견 없이 이 상의 외형을 살펴보도록 하자.
관촉사 석조상은 외형적으로 매우 특이하다. 우선 머리에는 긴 고깔모자 같은 관을 쓰고 있다. 이처럼 존상의 머리에 착용한 관은 보관으로 칭하며, 주로 보살들이 착용한다. 보관의 상단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보개가 이중으로 올려져 있다. 보개의 모서리에는 금속 재질의 꽃을 달았고, 정상부의 중앙에는 보주를 달아 장엄하였다(사진2). 그리고 보개와 보관의 몸통이 맞닿는 부분은 연꽃을 조각하였다. 아래쪽 보개에는 8개의 연꽃 잎을, 위쪽 보개에는 4개의 연꽃 잎이 확인된다. 그런데 의외로 조각이 뚜렷하고 정교한 편이다. 또한 보개의 아래쪽을 사진기로 찍어 확대해보니 테두리가 안쪽 면보다 돌출되어있다. 안쪽을 살짝 깎아낸 뒤에 작업을 시작한 것인데, 이렇게 하면 낙숫물이 테두리 안쪽으로 흘러들지 못한다. 눈에 잘띄지 않는 사소한 조치이지만 오랜세월 빗물의 풍화로부터 불상을 보호하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보관의 몸통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멍들이 세로방향으로 뚫려있다. 자세히보니 구멍이 아닌 무언가를 금속으로 고정했던 흔적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이곳에는 본래 금동 화불이 설치되어 있었다. 화불의 존재는 관촉사의 석조상을 나타낸 조선 후기의 고지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사진3).
1949년 죽암문인협회에서 펴낸 『관촉사사적기』에 의하면, 1907년 어느날 한무리의 일본인들이 밤늦게 보개 꼭대기로 그물을 던진뒤 올라가 금동불을 탈취하였다 전한다. 기록으로 보아 당시 관촉사의 스님들이 금동불의 탈취 현장을 목격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사찰의 귀중한 성보를 내줬을까?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1907년의 대한제국은 이미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지 오래였으며 사실상 식민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이 저렇게 대담한 절도 행각을 벌일 수 있었으리라 본다. 총칼로 무장한 채 스님들을 겁박했을 가능성도 있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없다. 아무튼 이무렵부터 일제가 패망하는 1945년까지 무수히 많은 우리 문화재들이 훼손되거나 해외로 반출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앞으로 우리 문화재들이 겪게될 수난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던 셈이다.
이마에는 보랏빛의 백호가 있으며 그 아래로는 둥글고 깊게 파낸 눈 두덩이와 좌우로 길게 뻗은 두 눈, 낮은 코와 짧은 인중, 그 아래로 붉은 입술이 보인다. 눈썹은 별도로 조각하진 않았으나 눈 두덩이와 이마 사이의 굴곡을 만들어 그 경계 부위가 눈썹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였다. 눈썹과 콧대는 서로 이어지고 있어 뚜렷한 이목구비를 형성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넓은 입술에는 다소 옅게나마 붉은색 안료가 남아있는데, 과거에 칠한 것인지 근래에 새로 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추후 알게 되면 보충하겠다.
가늘게 뜬 두 눈은 위아래 눈 두덩이와 가운데 눈동자, 내외 안각(眼角)*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안면부에서 가장 공들여 조각한 부분은 눈이 아닌가 싶다. 두 눈동자와 안각은 현재까지 짙은 검정색이 잘 유지되고 있는데, 어떻게 조성한 것일까? 이는 관촉사 상을 연구하고 직접 조사까지 하셨던 최선주 전 경주국립박물관장의 책, '박물관 큐레이터로 살다' 에 소개되어있다.
그에 따르면, 관촉사 상의 눈동자와 안각은 흑색 점판암을 별도로 조각하여 끼워맞춘 것이라고 한다. 가까이서 찍은 사진을 보니 흰색 바탕의 화강암과는 별도의 재질임이 확인된다. 알고보니 이 관촉사 상, 생각보다 많은 정성이 들어간 듯하다.
정면을 보았으니 이제는 옆모습을 볼 차례다(사진6). 얼굴과 뒤퉁수가 다소 납작해 보이는 점은 논외로 하고, 이마 윗부분에서 내려와 귀를 세바퀴 감는 보발(寶髮, 머리칼)이 확인된다. 이렇게 보발이 귀를 감는 표현은 다른 보살상에서도 확인된다. 다만 몇번을 감느냐의 차이는 있다. 귓불은 구멍이 크게 뚫려있는데, 원래는 이곳에도 수식을 걸어 장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랫턱에는 한줄의 선을 음각하여 후덕한 인상을 나타내려 하였고, 목에는 삼도를 새겼다.
몸체는 유려하다기 보다는 거대한 석조 기둥을 연상케할만큼 단순하게 표현되었다. 상의 크기가 워낙 거대하다보니 중심이 되는 몸은 다소 밋밋하더라도 튼튼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큼지막한 보관과 거칠게 느껴지는 얼굴도 고려 대상이다. 만일 이 상이 가늘고 유려한 몸매를 지녔다면 얼굴과의 부조화가 심했을 것이다. 다소 험상궂어 보이는 인상을 지녔으니, 몸도 그에 걸맞게 거칠고 단순한 느낌으로 조각된 것이다.
한가지 특징이 있다면 통견의 *대의(大衣)를 착용하고 있는 점이다(사진7). 대의는 여래의 복식이다. 보살은 일반적으로 보관을 쓴 채 바람에 휘날리는 얇은 천의를 입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본래 인도의 재가 신도 중에서도 부유한 귀족 남성들을 모델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석으로 장식한 보관과 고급 옷감으로 만든 천의를 입는다. 그런데 관촉사 상의 문제는 보관을 착용하고 있으므로 천의를 입어야 마땅하지만 여래처럼 대의를 입고 있다는데 있다. 그렇다면 관촉사 상의 정체는 여래인가? 보살인가? 이 문제는 좀 더 살펴본 이후에 결론을 내자.
전면과 측면에는 거칠게나마 옷주름이 새겨졌다. 양 손 밑으로 세 차례 이어지는 U자형의 옷주름은 무릎 부근에서 양갈래로 나뉘어진다. 더 아래로 내려오니 다시 U자형의 두터운 띠자락이 한차례 묘사되었는데, 대의 끝자락의 표현이다. 발목 부근에 노출된 군의 자락은 바람에 살짝 뒤집힌 형상인데, 이 석상이 하늘에서 강림한 존재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맨 아래로는 육중한 크기의 발과 약간의 구름이 보인다. 뒷면에는 별다른 표현이 없다. 거칠게 돌을 쪼아낸 자국만이 남아있다.
무척이나 큰 두 손은 모두 손목을 꺾은채 엄지와 장지(중지)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사진8). 위로 향한 오른손은 철제 꽃가지를 지물로 잡고 있다. 손이 과도하게 큰 느낌이지만, 자세히보면 손가락 마디와 손톱을 새겨놓았다. 눈동자와 바람에 휘날린 옷자락, 손가락과 손톱까지, 의외로 섬세한 부분이 곳곳에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상은 거대한 암반을 대좌로 삼고 있는데, 주변으로 고랑을 파서 물길을 만들어놓았다. 우천시 뒷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불상에 직접 닿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다. 이 상을 조각한 장인들이 알게모르게 정성을 많이 들였음을 알 수 있다.
관촉사 상은 보관을 쓰고 있어 보살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대의를 착용한 탓에 여래인지 보살인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또 보살이라면 어떤 보살인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현재 미술사학계에서는 미륵 아니면 관음이라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는데, 최근들어서는 미륵이라는 주장이 좀 더 설득력을 얻어가는 추세다. 현재까지 논의된 내용은 대략 이렇다.
우선 도상적 특징을 바탕으로 해당 존상의 존명(정체성)를 규명하는 시도가 있었다. 이 작품의 도상적 특징으로는 보관, 보관에 설치되었던 금동불, 손에 든 연꽃가지, 대의, 바람에 살짝 뒤집힌 듯한 대의 끝자락 정도가 있다.
먼저 머리에 보관을 썼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살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보관에 작은 금동불이 있었다는 기록에 초점을 둔다면, 관음보살로 추론할 수 있다.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의 좌협시보살로 등장하며 항상 정수리에 아미타 화불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사진9). 따라서 이 상은 관음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관음만이 보관에 화불을 모시는 존재는 아니다. 사례가 많지는 않으나 미륵도 보관에 화불을 지닌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719년 김지성(金志誠)이 조성한 감산사지 출토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들 수 있다(사진10). 이 상의 보관에는 작은 화불이 모셔져 있는데, 광배 뒷편에 새겨진 명문으로 미륵보살임이 확인되었다. 그 외에도 중국의 돈황 막고굴 제 275굴의 교각 미륵상이나 운강석굴 제 7굴 및 11굴의 미륵보살좌상 등의 사례가 존재한다(사진11).
그렇다면 미륵보살이 보관에 화불을 모시는 근거는 무엇일까? 미륵보살의 외형을 묘사한『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에 그 단서가 있다.
"그때 미륵보살이 도솔천 칠보대에 있는 마니전의 사자좌에 홀연히 화생하여, 연꽃 위에 가부좌하고 앉을 것이다. 몸이 염부단금(閻浮壇金)처럼 빛나고, 키가 16유순(由旬)이며, 32상과 80종호를 다 갖출 것이다. 정수리에는 육계(肉髻)가 있고, 머리털은 검붉은 유리색이며, 머리에는 검붉은 석가비릉가(釋迦毘楞伽) 구슬과 백천만억 견숙가(甄叔迦) 보석으로 만든 관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 보관에서는 백만억 미묘한 빛깔이 나오고, 낱낱의 빛깔 속에 무량 백천의 화불(化佛)이 있으며, (각각의 화불들은) 무량백천의 화보살(化菩薩)들이 각각 모시고 있을 것이다."
손에 든 지물도 주목할만한 대상이다(사진8).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데, 만일 미륵이 맞다면 이는 용화수(龍華樹) 가지가 된다. 본래 용화수는 미륵보살이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된다는 그 장소에 심어져있는 나무이다. 그러나 미륵이 보살로 표현될 때는 용화수 가지를 든 모습으로 표현된다. 관음의 화불이나 대세지의 정병처럼 미륵을 상징하는 표식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용화수의 생김새가 어떤지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미륵이 든 용화수 가지는 긴 연꽃 줄기처럼 묘사되곤 하였다. 작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장곡사 괘불이 전형적인 사례인데, 인도의 미륵보살이 들고 있는 용화수 가지와는 외형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사진9).
앞서 사진7에서 보았던 복식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분명 보살인데, 대의를 입고 있다는 점은 이 상이 여래(부처)일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보살과 여래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존재는 미륵 뿐이다. 미륵은 성불 이전에는 도솔천에서 수행하는 보살이지만 지상으로 하강한 이후에는 성불한 여래, 미륵불이 된다. 사진7에서 제시한 발목 부위의 옷자락을 살펴보면 바람에 휘날려 뒤집힌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휘날리는 옷자락은 이 보살상이 방금 도솔천에서 강림한 미륵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요소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보살처럼 머리에 관을 쓰고 여래형의 복식을 착용한 점은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이런 어정쩡한 모습 때문에 보살인지 여래인지 분명하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지상으로 내려온 미륵보살이 성불하는 순간을 극적으로 도상화 한 것이라는 해석이 발표되었다. 또한『불설미륵대성불경』을 포함한 여러 미륵 관련 경전에서는 아래와 같이 가섭존자가 석존의 가사를 미륵에게 전달하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확인되므로 참고할 수 있다.
"이때 미륵 부처님은 사바세계에서 전생에 몸이 곧고 강했던 중생들과 모든 큰 제자들과 함께 기사굴산(耆闍崛山)으로 가서 산 아래에 도착하느니라. 편안한 모습으로 천천히 낭적산(狼跡山)에 올라 산꼭대기에 도착한 후 발을 들어 엄지발가락으로 산기슭을 밟느니라. 이때 대지는 열여덟 가지 모습으로 움직이고, 이미 산꼭대기에 오른 미륵부처님은 마치 전륜왕이 큰 성문을 여는 것과 같이 두 손으로 산을 치느니라. 그때 범왕은 하늘의 향유(香油)를 가지고 있다가 마하가섭(摩訶迦葉)의 머리 위에 향유를 부으니, 향유는 그의 몸으로 흘러내리었다. 큰 건추(楗椎)를 치고, 큰 법의 소라를 부니, 마하가섭은 즉시 멸진정(滅盡定)에서 깨어나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장궤(長跪) 하고 합장을 한 후, 석가모니 부처님의 승가리(僧伽梨)를 미륵에게 주며 말하느니라. ‘위대한 스승이신 석가모니께서는 열반에 임하실 때 이 법의(法衣)를 제게 맡기시면서 미륵부처님께 올리도록 하였습니다...(중략)"
이처럼 관촉사 상의 특이한 도상은 보살이면서 미래불인 미륵의 속성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문헌 상의 기록들 역시 이 상의 존명*이 미륵임을 증명한다. 고려 말 사대부를 대표하는 이색(1328~1396)은 임술년(1382년) 관촉사에서 열린 야외법회를 축원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 상을 미륵으로 밝히고 있다.
한산의 동쪽으로 백여 리쯤 되는 곳에 / 馬邑之東百餘里
은진현이라 그 안에 관족사가 있고요 / 市津縣中灌足寺
여기엔 크나큰 석상 미륵존이 있으니 / 有大石像彌勒尊
내 나간다 나간다며 땅속에서 솟았다네 / 我出我出湧從地
(중략)
조선 전기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불우(佛宇) 조(條) 에도 관촉사 상은 미륵으로 언급되었다.
"관촉사는 반야산에 있다. 돌미륵이 있는데, 높이가 54척이나 된다. 세간에 전하기를, 고려 광종(光宗)때 반야산 기슭에 큰 돌이 솟아오른 것을 중 혜명(慧明)이 쪼아서 불상을 만들었다 한다."
여러 사료에서 알 수 있듯, 관촉사 상은 고려 이래 오랫동안 미륵으로 인식되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 문헌 가운데 일부는 이 상을 관음으로 기록하여 관음이냐 미륵이냐는 논쟁이 일어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안각(眼角) : 위 눈꺼풀과 아래 눈꺼풀이 만나서 눈 양쪽에 이루는 각.
*대의(大衣) : 여래가 입는 복식. 보살은 천의를 입는다.
*존명(尊名) : 예배상의 명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