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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미술사학도 May 05. 2020

부석사 오불회 괘불도

법당 밖에서 보는 부처의 세계


사진 12-0. 부석사에서 그려진 두 괘불 - 왼쪽은 1745년 작, 오른쪽은 1684년 작


미술사에서 회화는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장르이다. 미술품이라 하면 그림만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친숙한 주제이기도 하다. 오랜 옛날 알타미라 동굴에 그려진 소 벽화부터 이중섭의 소그림까지 그 역사도 상당히 오래되었다. 회화는 단순히 사물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종교적인 목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바티칸 대성당에 그려진 천지창조나 아잔타 석굴 벽화 혹은 돈황 막고굴 벽화 등은 그 화려함으로 인해 교회나 사원의 격을 높여줌과 동시에 경전의 내용을 쉽게 설명해주는 역할을 겸한다.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교화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아잔타 석굴의 연화수보살 벽화, 바티칸의 천지창조




괘불에 관하여

이번에 살펴볼 괘불은 불교 회화의 한 장르이다. 괘불이란, 법당 바깥에서 큰 행사가 있을때 설치하는 그림이다. 야외에서 수륙재나 영산재 등의 법회 등을 할 경우, 법당 안에 있는 붓다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별도로 괘불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찰에 괘불이 있다면 나름대로 사세가 번창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있다.


우리나라에서 언제 괘불이 처음 생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고려후기 원나라(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생겼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티베트 불교는 티베트인이나 몽골인 같은 유목민족들의 불교이다. 따라서 그들은 벽화보다는 벽에 걸었다 뗄 수 있는 탕카를 선호하였는데, 이것이 고려에 영향을 미쳐 괘불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티벳 불교의 탕카


아쉽게도 현존하는 괘불 전부 조선시대 작품이라 그런 가설을 뒷받침 할 근거는 부족하다. 가장 이른 시기의 괘불은 1622년 죽림사 괘불도이다. 조선 전기의 작품들은 임진왜란 도중 타버린 것인지 한 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나고 어느정도 나라가 안정되자, 사찰의 재건불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전쟁이나 기근, 역병 등으로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천도재 같은 법회도 많이 열렸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발맞추어 괘불 또한 이 시기에 많이 만들어졌다.



부석사 괘불의 조성배경

부석사에서도 1684년과 1745년 두차례에 걸쳐 괘불을 그렸다. 두 차례에 걸쳐 괘불을 그린 것으로 보아 18세기까지 부석사의 사세는 상당히 좋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현재 부석사에는 1745년 작품만 남아있고 1684년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괘불 한점이면 충분했을텐데 왜 두점이나 그렸을까? 1684년 작의 화기(하단에 불화에 관한 정보를 적은 부분)를 읽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乾隆拾年乙丑四月日 건륭십년을축사월일

重修移安于 중수이안우

忠淸道淸風地月岩山神勒寺 충청도청풍지월암산신륵사 

<건륭10년 을축 4월에 이 괘불을 중수하여 충청도 청풍 월암산 신륵사로 이안하였다>



화기에는 1684년 작을 보수하여 청풍 신륵사로 이안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청풍 신륵사는 지금까지 사세가 이어지고 있는 사찰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있듯이, 신륵사에 괘불을 넘겨주고 그 대가로 무언가를 받지 않았을까 싶은데,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어찌되었든 괘불이 없으면 사찰 운영이 안되므로 다시 괘불을 제작하게 되는데, 이것이 현재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1745년 작이다. 

 

청풍 신륵사의 극락전. 청풍은 지금의 제천시에 위치한다.



괘불에 드러난 사상적 배경

1745년 작품의 정식 명칭은 <부석사 오불회 괘불도>이다. 1684년 작과 비교해 보았을때 도상에서 큰 차이는 없으나 하단부에 작게 노사나불이 추가된 점이 특징이다. 노사나불에 대해서는 앞선 글에서 설명한 바 있으므로 넘어가도록 하겠다.(참고 : https://brunch.co.kr/@a232355/32)


전체적으로 보면 상단부에 세 분의 부처가 그려져 있다. 우리가 보기에 왼쪽부터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약사여래불의 순서대로 자리해 있고, 비로자나불 아래로 크게 묘사된 부처가 한 분 계신데 바로 석가모니불이다. 그 아래로 작게 묘사된 노사나불이 있는데 두 손을 어깨 높이 만큼 올린 상태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엄지손가락과 중지손가락을 맞대고 서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각각의 부처들 주위로 여러 보살 및 제자, 신중들이 서있는 모습인데 마치 설법을 듣는 모양새다.(사진 12-1, 12-2 참조)

 

12-1. 상단의 삼세불(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약사불) - 각각 중품중생, 지권인, 약기인을 하고 있다.(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12-2. (좌측)석가모니불과 그 아래쪽에 작게 묘사된 노사나불(우측)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왜 다섯명의 부처가 그려져 있을까? 하나의 부처만 그려도 충분했을텐데 그것도 다섯씩이나. 이부분에서 조선시대 불교의 특징이 드러나는데, 바로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비롯된 통불교적 경향이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시대엔 국초부터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 일환의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 종단의 통합이었다. 태종때 여러 종단을 통합하여 7개로 만들었고, 세종대에는 이마저도 선종과 교종으로 이원화시켰다. 조선 전기에는 교종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조선 후기들어 선종에 흡수되어 버린다.


이러한 경향은 자연스럽게 불교 회화에도 반영되었다. 선(禪)에 필적하는 경전으로 여겨진 화엄경의 삼신불(법신, 보신, 화신)과 대중성이 강한 법화경의 삼세불(아미타, 석가, 약사)신앙이 합쳐진 도상이 그려지게 되었는데, 이 작품에도 이러한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다. 


중단에 묘사된 석가모니불은 왜 다른 부처에 비해 크게 표현되었을까? 바로 삼신불과 삼세불에 공통적으로 포함되는 존재가 석가여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관념을 연결해주는 공통분모로서의 석가불이 강조된 것이라고 보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같다.(사진 12-0의 좌측 사진 참조)



도상 살펴보기

이 불화는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중심축으로 아래로는 노사나불, 위로는 비로자나불을 위시한 삼세불이 연결되어 있고 주위로 보살과 승려, 신중들이 에워싸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이 가장 크게 그려진 탓에 그가 설법하는 것을 다른 부처들과 중생들이 듣고 있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달리 말한다면 기존에 많이 그려진 영산회상도(영축산에서 석가모니부처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불화)에 다른 세계의 부처를 추가로 그린 도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사진 12-0 참조) 


노사나불은 하단에 매우 작게 묘사되어 있어 얼핏보면 옆에 있는 보살이나 사천왕보다 못한 존재로 느껴질지도 모르나 엄연히 두광과 신광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머리에서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기운이 양갈래로 뻗어나가 석가모니불의 무릎으로 향하고 있다. 양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채 어깨 높이로 올려서 중품중생인을 취하고 있다. 마치 보살처럼 화려한 영락으로 신체를 장식했으며 보관도 쓰고 있다.(사진 12-2 참조) 


석가모니불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우견편단(한쪽 어깨를 드러냄)을 하고 있다.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으며 입고 있는 붉은 색 가사에는 금색의 장식 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광배는 키형광배를 하고 있는데 신광과 두광의 구분이 따로 없이 통으로 그려졌다. 광배의 묘사는 단순하지 않고 여러가지 층을 나누어 다채롭게 표현되었다. 머리 꼭대기의 정상계주 위로는 노사나불이 그랬던 것처럼 상서로운 기운이 양갈래의 직선으로 뻗어 올라가서 비로자나불에 닿는다. (사진12-3 참조)


12-3.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는 석가모니불과 그 위로 그려진 삼세불(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불), (좌측-석가불, 우측-삼세불)


비로자나불을 포함한 삼신불은 석가모니불에 비해 작게 표현되었다. 얼굴의 묘사는 거의 비슷한데 수인은 다르다. 비로자나불은 지권인을 하고 있으며 서쪽의 아미타불은 하품중생을 하고 있으며, 동쪽의 약사불 역시 아미타여래와 동일한 수인을 하고 있으나 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는 것이 차이점이다. 


광배의 표현 방식도 다르다. 비로자나불의 광배는 삼신불의 일원임을 암시하는 듯 (두광과 신광이 합쳐진) 연봉형 광배로 되어있다. 광배의 내부는 오색찬연한 색으로 표현되어 마치 무지개 같으며, 바깥쪽은 석가모니불과 비슷하게 붉은 색의 테두리로 마무리 되었다. 반면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원형의 두광과 신광이 개별적으로 그려졌다. (사진 12-4 참조)

12-4.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 약사불의 광배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비로자나불의 광배 위로는 석가모니불과 같이 상서로운 기운이 양갈래로 뻗어나가고 있다. 나머지 두 부처의 두광 위로도 무언가 신비로운 기운이 향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퍼지고 있다.(사진참조 12-3 우측, 12-5 우측)

12-5. 비로자나불 머리 위로 피어나는 신비로운 기운. 약사불 주위의 신장들과 설법을 들으러 찾아온 타방불


석가모니불 주위로는 영산회상도를 보는 것 같이 8대 보살과 제자들, 제석과 범천, 벽지불, 사천왕, 야차들이 경건하게 합장을 하고 서있다.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도 각각 백의관음과 대세지보살,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협시로 거느리고 있으며, 주위에 아수라, 긴나라 등의 팔부신중과 그밖의 권속들이 작게 표현되어 있다. 그 위로는 작게 표현된 여러 부처들이 보이는데, 석가모니불의 분신불 내지는 설법을 들으러 찾아온 타방불로 생각된다. 괘불의 양 옆과 상단의 테두리에는 범어로 장식이 되어 있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밀교적인 주술적 의미가 아닐까 추측된다.(사진 참조 12-5)


이것으로 부석사에 대한 글이 어느정도 마무리*가 된 듯하다. 부석사에 대해서 공부도 하고 답사 정보가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도 드릴 겸해서 겸사겸사 쓰기 시작했는데 쓰면 쓸수록 얄팍한 지식의 밑천이 드러나는 것을 느꼈다. 보통사람들에 비해 불교와 문화유산에 관하여 많이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나 그러한 믿음이 근거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앞으로 계속 공부에 정진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추후에 부석사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알게 되면 업데이트 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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