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좋은 소고기, 끊을 수 없는 유혹
조선은 고려와 달리 상업을 천시하고 농업을 숭상했다. 이 점은 오늘날 조선이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인데, 따지고 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고려였지만 이는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전제로 하는만큼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고려 말 육상에서는 원(元)이 무너지며 홍건적이 들끓었고, 해상에서는 왜구가 기승을 부렸다. 중원에 명(明)이 세워지며 홍건적은 사라졌지만, 북방에는 원(元)의 잔당인 북원과 여진족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바다에서도 왜구가 여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무역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또한 고려 후기 들어 농업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는데, 이는 상업 대신 농업을 경제의 근간으로 전환할 수 있게 만든 배경이 되었다. 당시 성리학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도 농업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
농사일을 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이 소이다. 소는 힘이 세고 성질이 온순하여 농사에 큰 보탬이 되었다. 소가 하는 가장 중한 일은 쟁기로 논밭을 가는 일(牛耕)이다(사진1). 쟁기로 땅을 갈아 엎어주면 크게 두가지 이점이 있다. 우선 양분이 많은 아래쪽 흙이 위로 올라오므로 작물이 보다 많은 양분을 흡수할 수 있다. 그리고 딱딱하게 뭉쳐있던 흙을 곱게 부수어주므로 뿌리가 쉽게 내린다. 물론 쟁기질은 사람도 가능하지만, 사람은 소만큼의 기운도 없고, 쉽사리 지친다. 그러므로 깊은 쟁기질이 불가능하다. 조선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고대 삼국 가운데 가장 뒤쳐진 신라가 뒤늦게 발전한 원동력도 지증왕대 보급된 우경 때문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다. 그만큼 소가 농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소는 농가의 교통수단으로도 쓰였다(사진2). 나이가 조금 있다면 소 달구지라는 말을 들어보았을테고 연세가 높은 분들은 어릴때 타 본 기억도 있을 것이다. 많은 짐을 싣고 어디론가 이동할때, 소는 유용한 동력원이 되어주었다.
직접 소를 타고 다니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 사진3처럼 소타는 장면을 그린 회화 작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짐수레 및 교통수단, 쟁기끄는 역할을 했던 소는 오늘날로 따지자면 농촌의 경운기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소 잡는 일은 농가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큰 손해였다. 소가 있어야 농사가 잘되고, 농사가 잘되어야 세금이 많이 걷혀 국정 운영이 원활하기 때문이다. 조선이 국가 차원에서 소의 도살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금령(牛禁令)이 자주 내려진 점으로 미루어, 실질적으로는 도살이 빈번하게 자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소의 도살은 조선시대 내내 자행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무슨 이유로 이토록 중요한 소를 잡았던 것일까?
우선 국가적으로 지내는 제례에서는 소 잡는 일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오늘날 전해지는 종묘대제의 상차림을 살펴보면 양과 돼지, 소가 생고기 그대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사진4).
국가를 다스리는 왕실의 제사인만큼 최고의 정성을 다한 것이다. 이는 평소에 거친 음식을 먹고, 비단 대신 무명 옷을 입을만큼 검소했던 영조도 마찬가지였다. 실록에는 영조가 어느날 종묘에 나아가 직접 희생으로 사용할 소를 살피고서 관련 책임자들을 크게 문책하는 장면이 기록되었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희생(犧牲)*을 살폈는데, 친히 임하여 희생을 살피는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중략)
"소가 살찌지 못하였다."
헌관 송인명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검은 소는 원래 몸집이 큰 것이 없으니, 비록 살찌지 않았으나 깨끗하면 쓸 수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번의 예(禮)는 관첨(觀瞻)**하기 위한 것이 아닌데 친히 살피는 것이 이러하니, 섭행(攝行)***은 알 수 있는 것이다. 대관(大官)이라 하여 용서해서는 안 되니, 해당 헌관을 파직하고, 해당 예조의 당상과, 해당 관서의 제조(提調)는 삭탈 관직하고, 소를 이끌고 와 살쪘다고 고하여 면전에서 임금을 속인 장생령(掌牲令)은 섬으로 유배하도록 하라." (중략)
- 영조실록 61권, 영조 21년 4월 7일 기사 -
*희생 : 제사에 쓰는 짐승.
**관첨 : 여러사람이 지켜봄.
***섭행 : 임금을 대신하여 제사 지냄.
소가 살찌지 않았다는게 처벌의 이유였다. 그런데 국왕들이 도살 금지령을 어겨가며 기어이 소를 희생으로 삼았던 것은 어떻게 봐야할까?『논어』팔일편 17장에는 이와 유사한 내용이 등장하므로 참고가 된다.
해석 : 자공이 초하룻날 태묘에 곡유하면서 바치는 희생(양)을 없애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賜, 자공의 이름)야! 너는 그 양이 아까우냐? 나는 그 예(禮)를 아까워한다!
잠시 부연설명을 하자면, 춘추시대의 제후국들은 천자(天子)에게서 달력을 받아 보관하다가 매월 초하루가 되면 조상의 사당에 고한뒤 (달력을) 반포하는 의식을 치렀다. 이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하였으며, 천자가 지배하는 질서에 순응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공자 당시 노나라는 이러한 의식을 제대로 거행하지 않는데도 애꿎은 양만 잡아다 바치고 있었다. 즉, 과거에 시행하던 의식이 흔적만 남아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에 자공은 양을 잡는 일도 낭비라 여겨 없애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양을 잡는 관습을 토대로 옛 의식을 다시 복원ㆍ계승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제자인 자공에게 양이 아깝다고만 생각하지말고 그러한 의례가 시행된 취지를 살펴볼 것을 촉구한 것이다. 눈 앞의 손해(양을 잡는 일)만 따지지말고 (예의)본질을 보라고 가르친 것이다.
공자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긴 조선시대였으니, 왕실의 제사에 귀한 소고기를 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지내는 사직제, 성균관과 각 고을의 향교에서 치러지는 석전제 등에서도 소고기가 올려졌으므로 제례용으로 소를 잡는 일은 필수였다.
그리고 왕실 구성원들은 소를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 어릴적부터 소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못했다는 세종대왕이나, 잔치를 열기 위해 소를 수시로 잡았던 연산군의 일화는 이미 유명하므로 따로 설명이 필요없다.
성균관 유생들도 소고기 반찬을 대접받았다. 성균관에서도 석전제를 비롯한 각종 제의식에 소고기를 사용하였고, 이곳 유생들은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촉망받는 인재들이었기에 나라에서 특별 대우를 해준 것도 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예외를 적용받는 특권층이 있으면 아랫사람들도 점점 따르지 않게되는 법이다. 현실에서는 힘깨나 쓰던 양반들도 소고기를 즐겨먹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먹었던 소고기는 어떻게 공급되었을까?
먼저 도성 안에서는 반인(泮人)들이 소를 잡고 고기를 팔 수 있는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반인은 성균관을 반궁(泮宮)이라 부른데서 유래한 표현으로, 성균관 인근에 형성된 반촌(泮村)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들 반인은 성균관 노비의 후손으로 성균관의 각종 잡역을 맡아보았다. 성균관에는 수많은 유생들이 기거하고 수업을 듣고 공부하므로 식사와 잠자리 등 각종 편의가 제공되며, 석전제를 비롯한 여러 행사가 자주 치러졌으므로 각종 실무를 담당할 사람들이 많이 필요했다. 이런 일을 맡았던 이들을 반인 또는 반민이라 불렸다. 반인은 노비였으므로 천한 신분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도성 안의 소고기 유통을 독점하면서 괜찮은 삶을 누렸던 것 같다. 18세기 실학자인 박제가는『북학의』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백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국가의 제사나 호궤(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함)하기 위해 도살하고, 성균관과 한양 5부(部) 안의 24개 푸줏간, 3백여 고을의 관아에서는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
박제가는 한양에 푸줏간이 24곳 있다고 언급했는데, 이들은 모두 반인들이 운영하였다. 조선 후기 한양 인구를 20만~30만 정도로 추정하면, 푸줏간 24곳은 적은게 아닌가 싶다. 보수적으로 당시 인구를 20만으로 잡고 계산해보면 푸줏간 한 곳이 약 8300명의 잠재고객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인구 대비 공급이 적으니 당시 푸줏간의 수익은 꽤나 짭짤하지 않았을까.
지방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지방에서는 도살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하지만 지방에도 사람이 산다. 그들이라고 서울 사람과 입맛이 다르겠는가? 이곳에서도 도살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다만 원칙적으로 수령의 허가가 필요했다. 조선시대 소 도살을 연구한 전경목 선생의 논고에 의하면, 서울대 규장각이나 박물관 등지에 소장된 고문서 가운데 상당수가 소 도살을 요청하는 청원서라고 한다. 아래의 문서는 전라도 함평현(咸平縣) 신광면(新光面) 덕산(德山)에 사는 윤씨(尹氏)의 사내종 덕쇠(德金)가 병자년 7월 고을 수령에게 제출한 것이다.
신광면 덕산에 사는 윤씨의 사내종 덕쇠의 발괄*(白活)
"농사는 백성의 살아가는 근본이며 소는 농사를 짓는 원동력입니다. 따라서 백성이 되어 농사에 힘쓰지 않을 수 없으며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소를 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중략)
대저 저의 상전댁은 농사를 직업으로 삼아서 그동안 소 한마리를 길러서 농사를 지어왔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모를 심은지 여러 날 지나 소를 부릴 일이 없어 숲 속에 방목했더니 소가 잘못해서 낭떠러지 밑으로 뛰어내려 허리가 휘고 다리가 부러져 끝내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농사를 짓는데는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도살하려고 하니 이 또한 법에 저촉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래서 그간의 경위를 밝히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헤아려 살펴보신 후 특별한 처분을 내리셔서 이 허리 휘고 다리 부러진 소를 거피입본(去皮立本)** 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금법(禁法)을 범하지 않도록 해주시고 아래로는 농가가 손실을 보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병자년 7월 일
(수령의 처분) 사실인지 확인되면 소장에 의거하여 처리토록 하라. 25일
*발괄 : 오늘날의 청원.
**거피입본 : 소의 가죽과 고기를 팔아 송아지를 사는 일.
위의 발괄은 나름대로 딱한 사연이다. 그리하여 수령은 덕쇠가 소를 잡아 고기를 파는 행위를 허락해주었다. 하지만 소는 비교적 온순하며 조심성이 많은 동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낭떠러지 밑으로 뛰어내려 다쳤다는 내용은 다소 의구심이 든다. 다른 문서를 보자.
서남면 현곡리에 사는 김생원댁의 사내종 복손의 발괄
"이와 같이 소지를 제출하는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의 상전 댁이 작년 겨울에 젖먹이 송아지를 구입하여 이를 잘 키워 농사의 자본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독한 돌림병에 걸려 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감히 수령님께 우러러 하소연합니다. 세세히 살펴서 헤아리신 후 특별한 처분을 내려 거피입본 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천만번 바랍니다..."
병자년 정월 일
(수령의 처분) 청원한 바가 이와 같으니 거피입본토록 하라. 14일
위 사연은 애써 마련한 젖먹이 송아지가 돌림병에 걸려 죽을 지경이 되었으니 거피입본 하게 해달라 요청하고 있다. 이런 경우 원칙상 병에 걸린 소는 잡아서는 안되고 파묻어야 했다. 다른 소에게 전염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소의 병명이 탄저병일 경우엔 사람에게 전염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이런 경우 수령들은 대부분 거피입본을 허가해주었다. 다른 사례도 보자.
천천면 시목동에 사는 화민 한경조
"이와 같이 소지를 올리는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90세인 저의 어머니는 노환으로 항상 병석에 누워계시는데 소원이 소의 뜨거운 피와 생간을 드시는 것입니다. 부모를 봉양하는 자식의 입장에서 한편으로는 이를 흔쾌히 이루어 드리지 못해 민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이루어 드릴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우러러 하소연하오니 특별히 일년생 송아지 한마리를 잡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천만번 바라옵니다..."
갑자년 12월 일
(수령의 처분) 고기로 부모 봉양하는 것을 아들이라면 누가 원하지 않겠는가? 너의 효행에 대해 익히 들었으니 특별히 작은 송아지를 잡을 수 있도록 허락한다. 초9일.
한경조의 사연은 딱해 보이나, 소를 먹는다고 병석에 누웠던 노모가 벌떡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노모는 이미 90세로 상당한 고령이다. 어린 송아지라도 고을의 입장에서는 향후 농사에 투입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다. 이렇게 중요한 송아지를 효를 명분으로 잡겠다고 청하는 백성이나 선뜻 허락해주는 수령도 합리적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앞서 본 사례들과 연계해본다면, 그저 소고기를 먹거나 팔고 싶은 욕심에 이런 저런 핑계를 대는 것으로 의심되는 부분이다.
이런 정황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있는데, 충청도 영춘현 유씨댁에서 거피입본을 요청한 청원서가 13건이나 남아있는 것이다(사진6). 이 13건은 26년간 요청되었다. 2년에 한번 꼴로 소를 잡았다는 말이된다. 어떤 해에는 두 차례나 요청하기도 하였다. 중간에 유실되었을 가능성을 감안하면 청원서는 더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유씨댁에서 작성된 거피입본 청원서들은 이들이 전문적인 도살업자 내지 그와 관련된 일을 하였을 정황을 의심케한다. 거피입본의 사유도 먹이를 먹지 않는다던가, 다른 소의 뿔에 받혔다던가, 스스로 고삐에 감겨 죽었다는 등 유사한 내용을 반복하고 있으며, 잡으려던 소 역시 대부분 1~2년 생의 어린 송아지였다.
이에 대해 전경목 선생은 수령이 빈번한 도살을 눈감아 주었으며 유씨 댁과 모종의 거래를 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나라에서 금한 소의 도살을 허가해주는 대신 무언가 받았으리라는 추측인데, 어느정도 합리성이 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입장도 생각해보자. 왕실과 도성 사람들이 편히 즐기는 소고기를 지방민들만 먹지말라는 법은 상당히 불합리적이다. 더구나 식욕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이므로, 쉽게 제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웃한 중국처럼 양을 많이 길렀다면 어느정도 대체가 가능했겠지만, 조선에서 소와 경쟁할만한 단백질 공급원은 없었다. 결국 소를 대체할만한 육류는 조선에 없었고, 소의 빈번한 도살은 필연적이었다. 조선이 선포한 우금령(牛禁令)은 실질적으로 지켜지지 않았던, 유명무실한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