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맞는 거야?
내 직장은 대전에 있었다.
그 때문에 아무 연고도 없는 대전에서 10년 넘게 살았다.
경기 남부에서 나고 자란 남편은 직장도 그곳이라 결혼 후 내가 퇴사하여 함께 모여 살기 전까지 어머님과 함께 살았다. 그러니까 결혼하고도 어머님 그늘에서 편하게 지냈다는 뜻이다. 그는 집안일과 육아로부터 자유로웠다. 빨래, 청소, 식사까지 모든 집안 일은 어머님이 다 해주시니, 남편은 결혼하고 아이까지 생겼지만 자신의 책임이 그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 남편이 주말에 집에 오면 어떻게 지냈는지는 뻔했다.
빨래가 세탁기에 쌓여 있어도 세제 넣고 버튼 눌러 세탁기를 돌리지 않고, 건조기가 다 끝났다는 음악이 울려도 굳이 꺼내와 빨래를 정리하지 않았으며, 거실에 머리카락이 굴러다녀도 내가 시켜야만 청소기를 돌리는, 그러니까 집안일의 습관이 전혀 잡히지 않은 바보 남편이 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우리 가정에서 메인으로 하는 업무는 운전이었다. 나는 면허가 있었으나 운전은 하지 못했으므로. 하지만 그것도 둘째가 태어나 내가 운전대를 잡음으로서 그의 필요는 내게서 점점 사라져갔다.
내 고향은 경기 북부이고 지금은 엄마가 동생과 살고 계신다.
첫째 아이를 낳고 엄마 집에서 두 달 가량 함께 있다가 아이와 둘이 대전에 내려와 복직 전까지 지냈다. 복직 얼마 전부터 엄마가 대전으로 내려오셔서 1년 6개월 동안 아이를 봐주시고, 어린이집도 보내주시고, 살림도 해주시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셨다.
엄마와 성격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지 않던 나는 엄마와 알게 모르게 감정 상하는 일이 잦았으며, 주말부부이기 때문에 온전히 내가 아이와 아이를 돌봐주시는 엄마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견뎌야 하는 상황이 점점 힘에 부쳤다. 원래 첫째를 낳고 엄마 집에서 3개월은 몸조리를 하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엄마와 자꾸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엄마와 나는 잘 안 맞는다. 하지만 복직을 앞두고 시터를 구해야 되나 어쩌나 고민할 때, 감사하게도 엄마가 선뜻 아이를 봐주시겠다고 해서 엄마와 나는 서로에게 조심하며 1년 6개월을 지냈다.
회사 생활은 또 어땠나. 엄마가 계실 때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회식에 참석할 수 있었고 어린이집에 서둘러 가야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아이가 아프면 모든 것이 멈췄다. 밤새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를 돌보며 시간 맞춰 해열제를 먹이고,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아 열을 내리는 일련의 모든 당연한 '부모'의 일들. 특히 복직한 지 얼마 안되어 아이가 열경련을 했을 때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아이가 입원했을 땐 아픈 아이도 걱정이지만, 회사에 휴가를 또 어떻게 쓰나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업무를 하다 말고 급히 휴가를 쓰고 집에 가서 아이를 병원에 데려 가야 하는 일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안다. 멀리 있는 남편은 생사가 걸린 문제가 아니고서야 오지 못할 것이란 것을. 그래도 그 때는 그렇게 남편의 자리가 아쉽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둘째가 태어나자 나는 더 이상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