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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Oct 09. 2024

이제야 말할 수 있는 거칠었던 그 밤

라라크루 수요질문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아이들을 보며 '나는 저 나이 때 어땠지?'라는 생각을 내가 별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득 놀라운 오늘이다. 


내가 속한 글쓰기모임인 라라크루에는 매주 담당작가가 수요질문을 만들어 다른 크루들에게 제시한다. 이번주에 던져진 질문은 첫 수련회가 어땠는지 그때의 추억을 나눠보자는 것이었다. 수련회라... 요즘의 아이들에게 수련회나 극기훈련은 아주 생경한 개념이다. 현재의 학교에서는 전 학년을 한꺼번에 한 장소로 데려가서 하루 이상을 재우는 행사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신 체험학습이란 이름으로 하루 반나절정도, 그것도 대부분은 에버랜드나 롯데월드 등의 장소를 선택하여, 학교에 따라 전 학년이 버스를 대절해서 가거나 몇 개 반씩 묶어서 간다. 이런 현실에 익숙해진 나였건만 수련회라는 단어를 들으니 신기하게도 오랫동안 잊고 살아서 기억 속에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어떤 밤의 사건이 금세 소환되었다. 


그렇다. 나에게는 수련회의 어느 밤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 절대 잊혀지지 않는 그날 밤. 다만 그 밤의 특별함은 특별히 나빠서 특별하게 되었음을 미리 말해두고 싶다. 




예전에 수련회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의 연례행사였다. 우리 학교 역시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련회를 진행했는데 며칠 동안 진행되었는지, 가서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다만, 일정 중에 생겼던 '사건'으로 인해 그 사건이 생긴 그 밤의 시간과 감정을 기억할 뿐이다.


사건은 이러했다. 여자아이들 뿐인 우리 반 아이들은 저녁을 먹고 밤이 되자 집에서 준비해 온 카드를 꺼내어 왁자지껄하게 판을 벌리기 시작했다. 조용히 각자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자야 하는 그 시간에 우리 방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수다가 뿜어내는 소음의 수치가 도를 넘기 시작한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당시 학급의 반장이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규칙에 매우 충실한 다소 고지식한 아이였다(규칙에만 고지식했단 의미이니 오해하지 마시길). 아이들이 게임을 시작하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했는가 하면, 특별히 준비한 새 잠옷을 꺼내 갈아입고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일기에 담고 있었다. 교사로서 당시의 나를 보았다면 웃음이 나올 것 같긴 하다. 수련회에서 레이스가 딸린 땡땡이 잠옷 한벌을 입고 일기를 쓰는 아이라니 말이다. 아무튼 나는 나대로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나 이미 아이들은 임계점을 넘어 위험한 수위에 다다랐고 반장이었던 나는 게임을 하던 아이들의 곁으로 가서 아이들을 만류했지만 당연히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반장이 너무 순진하다며 놀리기까지 했다. 그래, 말릴 수 없으면 차라리 그들과 함께 하면서 통제를 해보자는 생각에 나는 아이들에게 불을 끄고 랜턴불빛으로 놀면 내가 랜턴을 들고 있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불을 끄고 나니 랜턴불빛을 받은 카드판은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그곳만이 부각된 무대처럼 변해버렸고, 이미 낯선 곳에서 해방감으로 풀어진 아이들에게 조명까지 은은하게 더해진 분위기는 더한층 자극제가 되어주었다. 이것도 모자라 카드게임에 참여하지 않은 아이들은 심지어 어둠 속에서 베개싸움까지 벌이기 시작했으니, 망연자실한 상태의 나는 아비규환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숙소를 돌며 점검을 하던 학생부장님과 체육 선생님, 그밖에 다른 선생님들이 우리 방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라고 고함을 치셨다. 내 심정이 어땠겠는가. 통제가 안 되는 여자아이들 틈에서 좌불안석이었던 나는 선생님들의 등장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잘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차피 걸릴 거였는데 걸려버렸으니 불안해할 일이 없어졌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신 선생님들은 방 한복판에 펼쳐진 이불 위에 널브러져 있는 카드와 베개싸움으로 터져서 속에 있던 솜이 엉망으로 삐져나온 베개를 번갈아보시며 무어라 화를 내셨고(정말 내용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들이 매우 분개했었다는 것 이외에는), 당장 숙소 1층에 있던 운동장으로 모이라 하셨다. 나는 기껏 차려입은 잠옷 위에 후드티만 걸쳐 입고 아이들과 함께 급하게 운동장으로 향했다. 아이들 중 몇 명은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방의 아이들은 그렇게 10시가 다 된 시간에 운동장에 집합했다. 뭐, 잘못을 한 것은 맞으니 야단도 맞고 혼도 나고 운동장을 몇 바퀴쯤 뛰려나 보다라고 우리는 짐작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벌어진 일은 이것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었다. 


사건을 풀어놓기 전에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하고 가겠다. 먼저, 학교에서의 체벌 혹은 벌칙에 대한 문제다. 학교에서 체벌이나 벌칙이 사라진 것이 언제인지 아는가? 서울과 경기도를 기준으로 보면 2010년부터였다. 그러니 그전에 학교를 다녔던 세대에게 체벌이나 벌칙은 늘 옵션에 들어가 있는 항목이었다. 물론 아이들에게 체벌이나 벌칙은 당연히 반감의 대상이었고, 교사와의 관계를 멀어지게 한 원흉이기도 했다. 그래도 여자아이들은 거의 체벌이나 벌칙을 많이 받지는 않았었다. 어쩌다 손바닥 정도가 전부였고,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으면 몽둥이로 허벅지를 때린 우리 담임선생님 정도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했다. 


또 한 가지. 교사 중에는 비호감 빌런이 있기 마련인데 통상 모든 학교에 한두 명은 되는 것 같다. 교사가 보는 입장과 학생이 보는 입장은 천양지차이겠지만, 당시 나는 학생이었고 내 눈에 그는 분명한 빌런이었다. 그가 누구냐고? 그는 우리 학교 체육선생님이었던 40대 후반~50대 초반의 남교사였다(나이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중년을 꽉 채웠던 것만은 분명하다). 수업시간에 늘 늦게 운동장으로 나와 반장인 내가 그를 찾아 학교 안을 헤매게 만들었으며, 여자아이들을 백허그하거나 귀를 만졌고, 대놓고 아이들의 외모평을 하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그중 가장 최악은 보건실에서 중년의 여성이었던 보건선생님과 문을 잠가놓고 했던 시시닥거림이었다. 수업시간 중에 이런 행동을 한 것은 물론이었다(그가 수업에 늦게 나온 날의 대부분이 이 경우에 해당했다).


내가 왜 이 두 가지를 언급했는가. 이 두 가지 상황이 한 점에서 만나 사건을 촉발했기 때문이다. 다시 그 날밤으로 돌아가보자. 우리 방 아이들은 운동장에 모여있었고, 학생부장님과 예의 그 체육선생님이 근엄하게 등장해 우리를 위협적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모두가 예상했던 학생부장님의 분노의 훈계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다소 쌀쌀했던 기온을 버텨가며 죄인답게 고개를 숙인 채 경청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학생부장님의 훈계가 끝날 무렵 그의 곁에서 내내 아무 말 없이 서있던 체육선생님이 우리를 향해서 고함을 쳤다. 대충 이런 식으로.


"전원 엎드려뻗쳐!!!"


우리는 일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순순히 시키는 대로 차가운 바닥 위에서 엎드려뻗쳐 자세를 하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들이 이런 자세를 얼마나 해봤겠는가. 여기저기서 끙끙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그만하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아이들이 속출했다. 이때였다. 그 빌런 선생님의 극악 무도한 짓이 행해진 것이 말이다. 


"이것들이 반성을 못하네. 기집애들이라고 봐줬더니 안 되겠어, 아주."


이 말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그는 자신의 바로 옆에서 팔을 후들거리며 무너지려는 아이의 배를 걷어찼다. 배를 걷어찼다. 그것도 여자아이의 배를. 그 아이는 신음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졌고, 그것을 곁눈질로 지켜보던 나는 분노에 사로잡혀 벌떡 일어났다. 평소에도 그가 선생님 같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였는데, 그 말도 안 되는 폭력행위를 보는 순간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화가 났다. 내가 벌떡 일어서자 학생부장님과 체육선생님은 나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왜 일어났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답을 했다. 그들이 물어보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지금 선생님께서 여학생의 배를 차신 겁니까? 우리가 잘못을 했으니 반성을 하고 있는데 왜 폭력을 행사하시나요? 그리고, 여학생들의 배는 그렇게 차시면 안 되는 부분입니다. 이 아이가 나중에 아이를 못 가지면 선생님이 책임지실 거예요? 사과하세요."


지금 생각해도 매우 당찬 행동이었으나, 위에서 말하지 않았나. 난 규칙에 매우 고지식한 사람이라고. 내 상식과 배움으로 그의 그런 행동은 말도 안 되는 위법이었다. 게다가 난 반장이었다. 아이들을 잘 이끌고 보살피고 도와주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한 이 고지식한 반장의 눈에 그는 선을 넘어도 너무 넘은 것이었다. 


"반장, 너 선생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그렇지. 그의 입에서 나올법한 고루한 말. 


"제가 선생님께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예의 없는 줄은 알지만, 선생님의 행위는 잘된 건가요? 어른이시잖아요. 우리 아빠보다 나이도 많으신데 어린 여자아이의 배를 걷어차셨잖아요. 저 징계받아도 좋습니다. 사과하세요. 그리고 저 이 문제를 엄마에게도 말씀드리고 교장선생님한테도 말씀드리고 학생회 회의시간에도 건의할 거예요. 빨리 사과하세요."


역시나 지나치게 당찼던 패기 넘치던 나. 뭐, 다시 돌아가도 난 저 말을 할 것임은 분명하다. 내가 저렇게 선생님과 그것도 소문난 원톱 빌런이었던 체육선생님과 맞서고 있으니 아이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배를 걷어 차인 아이는 아까부터 이미 한쪽에 앉아 울고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씩씩거리고 있는 나를 당황한 표정의 학생부장님과 멍한 표정의 체육선생님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당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카드판을 주도했던 일명 날라리였던 우리 방의 아이가 앙칼지게 체육선생님에게 따지기 시작했고, 그제야 마음 졸이며 이 순간을 함께 하던 대부분의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나 역시 '우리' 날라리(그날 이후 친해졌으니 이렇게 부르겠다)의 협공에 힘을 받아 다시 한번 사과를 촉구했다. 


"그래, 얘들아. 선생님이 생각이 짧았다. 그래도 내가 배를 찬 건 아니야. 그냥 찬 시늉을 한 거지. 내가 찼겠냐. 미안하니까 어서 들어가자."


당시 체육선생님의 수준에서는 이게 최고였을까 싶다. 나는 한번 더 제대로 된 사과를 받고 싶었지만, 분노가 조금 진정되자 학생으로서의 예의가 생각나 그만두고 아이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날 밤, 우리 방은 축제분위기였다. 비록 배를 차인 아이가 있었지만 심하게 아프다고는 안 했었고, 무엇보다 우리가 똘똘 뭉쳐 빌런을 무찔렀다는 뭉클함때문이었다. 그날 밤 나는 어땠을까? 아이들이 나를 둘러싸고 내 뺨에 뽀뽀를 하고 껴안고... 부끄러우니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지옥 같던 수련회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학교에서 일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대충의 사과를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나의 고지식함을 재차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운영위원회 회장이었던 엄마에게 말했음은 물론, 교장실도 찾아갔으며 학생회 대위원회의에서도 1학년 학생임에도 당당하게(이것이 중요하다) 선배들과 선생님들 앞에서 그간 저질러왔던 그 선생님의 온갖 만행을 고발해 버렸다. 


시간은 흘렀고 그 체육선생님은 다른 학교로 전출되었다. 이상하게 보건 선생님까지 덩달아 나간 걸 보며 뭐가 있긴 있었구나라는 카더라 통신이 한참 동안 아이들 사이에서 1순위 화제로 자리 잡기도 했다. 암혹했던 그 날밤, 그보다 더 암혹하고 거칠었던 수련회 사건은 그렇게 잘 매듭이 지어졌고, 나는 다시 선생님들께 예의 바른 반장이 되어 평화로운 학교생활을 이어나갔다. 

            


기억에 관해서라면 누구도 그 앞에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마르셀 프루스트는 기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유일한 열쇠다.                                  

가볍게 던져진 오늘의 질문은 뜻하지 않게 기억 저너머에 존재하여 잃어버린 것 같았던 시간을 나에게 되돌려 주었다. 


19세기,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여전하던 빅토리아 시대에 남성필명을 사용하면서까지 자신의 생각을 정교하고 깊이 있게 담아냈던 소설가 조지 엘리엇은 기억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기억은 우리에게 존재했던 삶을 확인시키는 증거다       

맞다. 나에게 그 시절은 엄연히 존재했었고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시간의 주름'이란 작품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미국의 소설가 마들렌 렝글의 말을 전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우리를 형성하고,  그 기억은 다시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나란 무엇인가. 나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나의 기억의 총합이다. 그러나 나의 기억은 때로 시간에 의해 희미해지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나의 기억이 나를 말해주는 분자라면 나는 나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라도 되도록 많은 것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 그 기억의 양만큼이 나일 것이기 때문에. 


오늘의 나는 한 시절에 일어났던 사건을 통해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해 냈고, 지금의 내가 그때에도 여전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의 나보다 지금의 나는 나은 사람이 되었을까? 시간에 주름이 접혀 혹시라도 그때의 나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 아이에게 당당할 수 있을까? 


좋은 질문은 사유를 낳고 성찰을 이끌어낸다. 좋은 질문을 만난 오늘은 드물게 운이 좋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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