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스토리 (A Ghost Story, 2017)
요즈음은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밤하늘의 별들. 밤하늘에 흩뿌려진 보석 같은 별들은 그 신비한 아름다움으로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게 문학과 예술의 영감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 별들은, 잠시 이 지구에 머물다 떠나는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유구한 세월과 시간을 품고 있는 우주적 존재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우주의 시간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인간 개개인이 삶이라는 이름으로 머무르는 시간은 터무니없이 미미할 뿐이어서, 돌연 우리의 존재가 한없이 작게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엄연히 여기에 존재하고 있고, 내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을 진실로 확정 짓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곳에 존재하는 것이 "나"임을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지구별에 잠깐 머물다 가는 우리는 삶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요. 영화 고스트 스토리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영화 고스트 스토리는 2017년에 개봉된 미국 영화입니다. 33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세상에 선보이며 신선함과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영상과 독창적인 스토리라인, 깊이 있는 주제를 담고 있는 영화로 롤링스톤지에서 2017에 선정한 top 10에 들만큼 뛰어난 작품이기도 합니다.
고스트 역에는 케이시 애플렉, 연인인 M역에는 루니 마라가 캐스팅되어 감독인 데이빗 로워리의 의도를 완벽하게 스크린에 옮겼습니다. 케이시 애플렉이 사망 후 고스트가 되어 집으로 향하는 장면이나 루니 마라의 초콜릿 파이를 먹는 장면 등 많은 명장면에 더해 몽환적인 사운드 트랙까지 찬사를 받았습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한적한 교외로 이사 온 커플 C(남자)와 M(여자)는 미스테리한 새집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지만, 곧이어 C가 사고로 사망하고, M은 혼자 남아 상실의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C는 고스트가 되어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M을 지켜보지만 그녀의 상실의 아픔과 공허함을 채워줄 수는 없죠. 홀로 된 M은 상실의 공허함과 아픔, 슬픔을 겪으며 견뎌내기 위해 노력하고, 시간이 흐른 뒤 문틈에 쪽지 한 장을 끼워두고 그 집을 영원히 떠나버립니다.
M이 떠난 뒤 그 공간에 혼자 남아 아주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M이 남긴 쪽지를 꺼내려고 노력하는 C. 마침내 쪽지를 꺼내보지만 펼쳐보자마자 C의 고스트는 사라져 버립니다.
나는 여기에 지금 존재합니다. 그런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떻게 입증될 수 있을까요. 답은 뜻밖에 간단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나로 알아본다는 간단한 사실에서 말이죠. 다시 말해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나로 기억해서 인식하는 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일 수 없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타자론에서 ‘타자의 시선에 포착된 나의 모습은 그대로 나의 존재 근거가 되고, 따라서 내가 나에 대해서 알려면 반드시 타자를 통과해야만 한다’는 말로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속의 C는 고스트가 되어서 자신이 살던 장소로 되돌아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였던 M의 모습을 통해, 자신이 C로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아내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그 고통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게 해주는 거울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옆집에 머물던 다른 고스트가 사라져 버리는 것도 결국, 자신의 존재를 비춰줄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를 기억해주는 누군가가 있는 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나 이외에 나를 나라고 기억하고 인식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면, 내가 나임을 우리는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결국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나를 나라고 기억하고 인식해주는 타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 C가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 개척시대의 가족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아직 아무도 개척하지 않은 허허벌판에 짐마차를 세워놓고 집을 짓기 위해 터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죠. 그들 중 한 명인 어린 소녀는 공책에 무언가를 써서 찢은 후 돌덩어리 밑에 넣어둡니다. 마치 M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이 장면을 보여준 감독의 의도 역시 우리가 소녀의 행동에서 M의 행동을 떠올리도록 만드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 장면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여기, 서로 다른 시대에 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살았던 시대가 달랐던 두 사람은 우연히도 같은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은 우연히도 같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즉, 그 두 사람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했지만, 결코 자신이 남긴 흔적을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전 과정을 지켜본 것은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이 아니라, 오직 C라는 고스트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항상 쪽지를 남기는 일과 같은 작은 행위에서부터, 신전을 짓고 성당을 건설하는 거대한 행위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살았다는 흔적을 남기고자 유사 이래 한결같이 노력해왔지만, 때로는 우발적인 사고로 본인이 사망하거나, 때로는 몇 세대에 걸친 작업으로 인해 생전에는 볼 수 없거나, 때로는 애써서 남긴 유물이 파괴되어 버리는 등, 어차피 어떤 이유로든 볼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남긴 흔적 혹은 유물은 결국 파괴되어 사라지게 되어있고, 그 흔적을 남긴 우리조차 사라지게 되어있으므로, 인간의 이런 흔적 남기기는 공허하기만 합니다. 이것이, 영화에 등장하는 허무 주의론자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지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흔적 남기기를 되풀이하는 무한 반복의 루프 안에 존재해 있는 셈입니다. 마치 영화 속 C의 고스트가 그러하듯 말이죠.
모든 것이 결국 소멸하는 인간의 세계. 인간이었던 유령마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흔적이 사라지면 소멸해 버리는 세계. 이것은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주장이나 사실이 아닙니다. 영화 속 허무 주의론자가 말했듯,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그저 사실이며 과학일 뿐이죠. 다만 영화 속 허무 주의론자가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소멸에 이르는 한 점으로 수렴할지라도 소멸의 그 순간까지는 자의식이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매 순간, 나를 지배하는 나의 자의식은 우리가 소멸할 존재라는 이유로, 우리에게 두 손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예정된 소멸이나 기다리는 한가한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가진 무한한 아이러니를 아시나요?
자의식을 가진 인간은 이렇게 소멸할 존재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소멸의 그 순간까지 어떤 식으로든 나의 흔적과 기억을 남기기 위해 힘을 쏟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과 흔적은 한 존재의 소멸과 동시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각각의 존재가 소멸로써 빚어놓은 그 기억과 흔적들은 그대로 이어지며, 다음 세대에게 이전 세대의 목소리를 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한 명의 인간으로서 우린 한계를 가진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이런 한계를 가진 개인들은 각각 자신에게 부여된 시간 안에서 자신의 기억과 흔적을 남김으로써, 결국 하나의 거대한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현대의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예술작품과 유적들은 바로 이름 없는 누군가들이 쌓아준 그들의 시간의 합인 것입니다.
2014년에 개봉한 영화 ‘앵그리스트 맨(The Angriest Man in Brooklyn)’에서 주인공을 맡은 로빈 윌리암스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it's not the dates that matter...- it's the dash (태어난 날과 죽는 날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이이다.)
우리 모두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한부라는 단어에는 일정한 시간의 한계를 의미한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을 뿐인데도 어쩐 일인지 시한부라는 단어는 매우 짧은 시간이라는 촉박함을 주는 것 같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우리의 유한성은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말이죠. 그러니 주어진 시간이 짧든 길든 이미 그 시간의 루프에 들어와 있는 이상, 우두커니 과거의 슬픔과 분노의 기억만 지니며 고스트처럼 살아갈 순 없습니다. 슬퍼하든, 분노하든 현재에서 행동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행동을 해야 기억이 되고, 기억이 돼야 흔적으로 남길 수 있으니까 말이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