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짐, 일어섬의 또 다른 얼굴

릴리와 찌르레기 (2021)

by 무비 에세이스트 J

여느 날과 다름없었다. 부단히 하루 일과를 마치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누워 단잠을 청하면 그뿐인 그런 보통의 날이었다. 그리고 대게 생각지도 못했던 불행은 그런 보통의 일상에 느닷없이 찾아온다. 불행과 가장 거리가 멀거라고 생각했던 그런 날, 아니 어쩌면 최고의 행복에 가장 근접했을지도 모른다고 가슴 두근거렸을지도 모를 그런 순간에 이미 우리 곁에 와있었을지도 모른다.


상실. 절대적으로 불가역적인 상실은 우리의 삶을 한순간에 뒤엎어 버린다. 하루 24시간은 더 이상 전과 같은 속도로 흘러가지 않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상실의 파편들은 24시간 나를 지배하며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순간을 지옥으로 바꾸어 버린다. 되돌릴 수 없는 그 상실의 고통은 나 자신의 파괴로써만 상쇄될 수 있을 것만 같다. 눈앞에 펼쳐진 어떤 장면도 인식하지 못하며 나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멀쩡하게 돌아가는 세상이 원망스럽고 분노스럽다. 그리고 나는 더욱더 상실의 순간으로 빠져들고, 이제는 시간의 흐름도 거스르며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된다. 결국 남은 선택은 하나다. 이 고통을 느끼는 주체, 즉 나를 완전히 파괴하여 제거하는 길만 남아있다고 느낀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나를 파괴해버릴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나의 사람들.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느라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내 주변에는 나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고통에 파묻혀 철저하게 나만 생각하던 그 모든 시간에 그들 역시 그런 나를 바라보며 함께 고통받고 슬퍼하고 있었음을 인지하게 된다. 그들의 존재가 위안이 되면서도 더한 고통을 안겨준다. 포기라는 결정을 방해하는 것 같아 거추장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나를 믿지 못할 때 '우리'라는 관계가 갖는 의미의 크기이다.




릴리와 잭은 아기의 방을 꾸미고 있다. 행복에 겨워 딸의 방을 꾸미는 그들은 불행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밤중에 돌연 아기가 사망해버리면서 그들은 한순간에 불행의 한가운데로 떨어져 버린다. 충격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심리치료를 받기 위해 요양원에 입원해버린 잭을 돌보며 일을 하고 살림을 하고 있던 릴리는 차도가 보이지 않는 잭을 보며 점차 자신 역시 고통받고 있었음을 깨달아간다. 절망 끝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던 그 순간에 앞마당으로 날아든 찌르레기 한 마리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마주하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용기를 갖게 된다. 그녀의 의지와 용기는 잭을 점차 변화시키게 되고 결국 그들은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를 확인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찌르레기의 상징이나 배우들의 연기력에 대한 이야기는 차치하자. 우리는 여기에서 상실의 본질과 극복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해보자.


아이의 돌연사와 같은 극적인 상실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에는 크고 작은 상실이 일어난다.

행복은 미리 준비하고 맞이할 수 없는 것이든 불행 역시 예상하고 기다리며 마침내 맞이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불행이다. 강도와 크기는 다를 수 있으나 행복도 불행도 결국은 우리 모두의 일상을 이루는 양극단적 요소이다. 최고의 행복과 최악의 불행을 양 끝에 두고서 우리 인생은 그 가운데에 어디쯤 존재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나 인생의 속성을 잘 알고 있지만 막상 행복과 불행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우리는 모든 이성과 지식을 금세 뛰어넘어 행복과 불행에 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이 우리에게는 다분히 감정의 영역에 매우 자주 속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햇살을 바라보며 그 햇살의 파장과 스펙트럼을 분석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저 한 덩어리로 쏟아지는 그 아름다운 찬란함에 감탄하며 그 햇살 속에 서있음을 행복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행복은 그런 것이다. 분석이 필요 없는 최종적인 결과물. 그냥 온전히 내 것이고 내 것이어야만 하며 내가 마땅히 향유해야만 하는 것. 아무런 조건과 의문 없이 냉큼 내 것임을 천명해야만 하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그러나 불행은 다르다. 예고 없이 찾아든 그 격동의 사건과 감정에 우리는 심하게 저항하고 처참하게 파괴된다. 이리저리 불행의 파고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외로워한다. 끝까지 절망하고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끝도 없이 자책하고 철저하게 원망한다. 그런데도 불행은 끝나지 않는다. 행복과는 달리 내 것일 수 없고 절대 갖고 싶지 않은 이 불행으로부터 우리는 한없이 달아나려고만 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찾아든 불행은 누구의 것인가


내가 부정하면 나의 불행이 옆사람에게 옮겨갈 수 있는가. 내가 쳐내면 나의 슬픔을 누군가가 가져가 줄 수 있는가. 버리고 싶어도 달아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불행 역시 이미 내 일상에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했던 명배우 로빈 윌리엄스는 생전에 심리적 고통으로 인해 현실을 외면하여 불행한 삶을 살지만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자신의 불행을 응시한 후 불행한 상황을 탈피하게 되거나 혹은 타인이 탈피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자주 했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1989)에서는 가족의 기대에 짖눌린 학생들이 자아를 발견하고 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멘토 역할을, 굿윌 헌팅(1997)에서는 천재 청년의 멘토일 뿐만 아니라 그와의 만남으로 자신 역시 고통을 응시하고 극복해가는 역할을 했었고, 앵그리스트 맨(2014)에서는 큰 아들의 죽음으로 삶의 의미를 잃고 괴팍해졌으나 결국은 상실의 고통을 극복하고 현재를 소중히 여기게 되는 아버지 역할을 연기했었다.

로빈 윌리엄스가 그려냈듯이 상실은 나에게 일어난 사건이고 그래서 그에 따른 고통은 내 것일 수밖에 없다. 내 것임을 확인하고 인정해야 정리할 수 있다. 내 옷장 안의 옷들을 나아닌 누가 내다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오래도록 입지 않지만 애착과 추억으로 버리지 않고 모셔둔 옷들은 나의 과거에 대한 증표가 될 뿐 더 이상 의복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쌓아둔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 고통과 슬픔에 따른 불행 역시 그런 불행한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증거이고 정황이고 사실일 뿐, 실제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가고 있는 과거이다. 옷과 우리의 감정을 비교한다는 것이 못마땅할 수 있으나 건조하게 바라보자면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생각에서 시작하여 끝나는 문제라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할 수 있다.


나는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나는 고통스럽다. 나는 절망적이다. 나는 슬프다. 그래서 외롭다. 맞다. 나는, 그리고 당신은 상실이 가져다준 온갖 감정을 다 느낄 수 있다. 그럴 권리도 있고 의무도 있으며, 그 관계가 소중했던 만큼 애도해야 할 책임도 있다. 잃어버린 관계에 비례하여 충분하고 완전하게 애도와 고통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여위어버린 내 앞마당에, 창백해진 내 창가에 찌르레기 한 마리가 날아들어온다면 우리는 그 녀석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작은 녀석이 들어온 그날이 나의 불행의 마지막 날일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