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웨이 위고(Away We Go)> (2009)
작은 방들이 건물에 촘촘하게 박혀있습니다. 산책하며 지나치는 골목 골목에서 만나는 건물들은 마치 포도알이 알알이 매달린 포도송이같습니다.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저 작은 한칸 한칸이 하나의 집을 이루고, 그 칸칸마다 한명의 사람이 들어가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한구석에서 씁쓸한 애잔함이 퍼져나옵니다. 저 작은 공간에 현재를 담고 미래를 꿈꾸며 살고 있을 사람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저 작고 답답해 보이는 공간이 혹시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안락한 휴식처, 즉 집(Home)이 되어 주기는 하는 걸까 라고.
일반적으로 영어단어 House는 건물 자체를 의미하지만, Home은 건물 자체뿐만 아니라 그 건물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집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죠.
그래서 그런건지 집에 대한 정의를 묻는 질문에 선뜻 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집에 대한 필요와 감정이 다양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집이란 무엇인가?
샘 멘데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완전한 집을 찾아 여정을 떠나는 커플을 통해 집이란 이래야 한다는 나름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 역시 나름의 답을 얻게 될까요? 누군가 우리에게 완전한 집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우리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요? 베로나와 버트가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형태의 집을 보며 각자 답에 대한 나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는, 집. 간단하지 않은 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웨이 위 고(Away We Go)는 샘 멘데스 감독의 2009년작입니다. 샘 멘데스감독하면 연극계와 영화계를 오가며 다양하고 훌륭한 작품들을 배출한 명장이죠. 1987년에 연극에서 감독데뷔를, 영화는 1999년 '아메리칸 뷰티'로 데뷔했습니다. 데뷔작으로 단박에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수상해버린 멘데스는 가장 성공적인 007 시리즈라 평가받는 '스카이폴(2012)'를 거쳐 친할아버지의 전쟁 무용담에서 일부 아이디어를 얻은 '1917(2019)'을 2019년 세상에 선보임으로써 그의 저력을 다시한번 입증했습니다. 어웨이 위고는 다양한 가족 혹은 집의 모습을 담은 영화인 만큼 많은 배우들이 나오는데, 특이한 것은 주연배우들 보다 조연배우들이 더 많이 알려진 배우들이라는 점입니다. 커플역의 두 배우 마야 루돌프(베로나역)와 존 크라신스(버트역)외에, 버트의 부모님역에 제프 다니엘스와 캐서린 오하라, 친한 동생역에 매기 질렌할, 베로나의 예전 직장상사역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이기도 한 앨리슨 재니가 나옵니다. 그밖에도 많은 배역들이 어디선가 많이 봐온 익숙한 얼굴들로 포진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베로나의 임신으로 시작합니다. 베로나와 버트는 함께 살며 처음으로 아이를 갖게 되고, 출산이 두세달 남은 상황에서 근처에 살고 있는 버트의 부모님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도움을 구하고자 그들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러나 버트의 부모님은 출산 한달전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멋진 집에 세를 주고 벨기에로 떠나 2년간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합니다. 애초에 아이를 갖으면 도움을 받기위해 버트 부모님이 사는 동네에 정착했던 두 사람이었기에, 버트의 부모가 없는 이상 그 동네에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어진 두 사람은 그곳을 떠나 아이와 함께 정착할 수 있는 완전한 집을 찾아 여정을 떠납니다. 육아에 도움도 주고, 적적하지 않게 이웃이 되줄만한 사람이 필요 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사는 동네로 목적지를 정해 길을 나섭니다. 그러나 막상 여정에 올라 만나본 여러 가족들은 자신들이 기대하고 원했던 모습으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거쳤던 모든 곳에서 실망한 두 사람. 여정의 끝에서 마지막 목적지로 베로나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을 떠올리며,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던 그집을 방문하게 되고, 바다가 보이는 그 집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이 꿈꾸었던 완전한 집을 발견하게 됩니다. 완벽한 이상을 찾아 혹은 집을 찾아 여러 목적지를 거치며 다양한 시련을 헤쳐나가는 주인공들을 그린 이 서사는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나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후 빛을 발해온 서양문학에서의 전통적인 서사, 즉 역경에 찬 여정을 이겨내고 결국 자신들이 원하던 이상향에 도달한다는 플롯을 가지고 있고, 이런 익숙한 플롯에 익숙한 개념인 집이라는 내용을 담음으로써 시너지를 내고 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I have a dream,” he said slowly. “I persist in dreaming it, although it has often seemed to me that it could never come true. I dream of a home with a hearth-fire in it, a cat and dog, the footsteps of friends—and YOU!”
("난 꿈이 있어", 길버트는 천천히 말했다. "난 계속 그 꿈을 꾸고 있지. 비록 절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던 때도 있었지만 말야. 난 어떤 집을 꿈꾸고 있어. 벽난로가 있고, 고양이와 개가 있고, 친구들이 오가고...그리고 네가 있는!" )
위 내용은 캐나다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쓴 빨강머리 앤시리즈 중 세번째 시리즈 'Anne of the Island (앤의 대학시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길버트가 자신이 그리던 꿈의 집에 대해서 말하며 앤에게 청혼을 하는 장면입니다. 집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싶은 우리에게 이보다 더 따듯하게 그러나 정확하게 다가오는 예문이 있을 까 싶을 정도로 집의 정수가 잘 묘사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money)은 모두에게 무한한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실상 돈이란 눈으로 보여지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죠. 편리함을 구현하는 것은 추상적 개념인 돈(money)이 아니라 각 사회에서 통용되는 돈(won, dollar 등), 물리적으로 존재해서 직접 만질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나 집의 경우는 이와 다릅니다. 우리에게 행복과 안정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단순한 장소이자 건물인 집(house),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집이 아니라, 가치와 감정이 투영된 물리적이고 상징적 공간으로서의 집(home)을 말합니다. 즉, 공간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house)이 아니라, 의미있고 소중한 사람들로 채워져서 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속에서 개인에게 스토리를 만들어 주고, 그렇게 만들어진 스토리를 담고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궁극의 공간, 이런 곳을 우리는 집(home)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 완전한 집을 느낀다는 것은 그 장소를 채우는 사람들간의 진정성 있는 관계, 즉 가족이라는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가치들이 응축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영화역시 이런 관점에서 다양한 가정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완전한 집의 최우선조건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해주는 행복한 가족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건축의 기억 능력을 고려할 때 세계 문화의 많은 곳에서 가장 초기의 가장 의미 있는 건축 작품들이 장례와 관련이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약 4천 년 전, 펨브룩셔 서부의 산비탈에서 우리의 신석기 조상 한 무리가 맨손으로 거대한 돌들을 쌓아올린 뒤 그 위에 흙을 덮어 그들의 친족이 묻힌 곳임을 표시했다. …. 우리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해 건축을 하는 것을 기억하고 싶은 욕망때문이다. …. 우리 집안의 그림과 의자들은 신석기 시대의 거대한 무덤과 같다. 다만 우리 자신의 시대, 산 자들의 요구에 맞추어 줄여놓았을 뿐이다. 우리의 집안 설비들 역시 정체성의 기념물이다.” -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건축의 목적은 과거를 살았던 이들을 기억하기 위함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담아, 우리가 사라진 이후 우리를 기억하게 만들기 위함일수 있습니다. 이 생각을 개인차원에 적용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집입니다.
우리의 일생동안, 우리는 하나의 집 혹은 여러 개의 집에서 머물며 그 머문 시간에 해당하는 만큼 그곳에 우리의 삶의 기억을 남겨두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일생을 완전하게 기억한다는 것은 여러곳에 흩어져있는 모든 기억을 모아야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하나의 장소는 특정한 시간대의 나를 기억하고 있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와 나의 특별한 공간은 필요충분조건이란 사실입니다. 나의 기억을 담고 있는 공간이 나에게 특별하다면,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는 나역시 그 공간에는 특별한 존재라는 의미입나다. 따라서 개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공간이 사라진다면 그 개인은 삶의 일부분을 상실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 공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개인이 없다는 것은, 그 공간 또한 그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이 됩니다. 한마디로, 개인과 개인에게 특별한 공간은 상보적이며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공간과 사람, 기억의 관계는 영화 고스트 스토리(2017)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사랑했던 두 사람이 채웠던 공간에서 한 사람이 사라져버리고 난 뒤 한 사람이 덩그러니 둘이었던 공간에 남았습니다. 공간의 모든 곳에 깃들어있는 두 사람의 스토리는 한 사람이 온전히 지기엔 너무나 커다란 짐이었습니다. 혼자인 그녀는 특별했던 그 공간을 떠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슬퍼하고 버티며 그 공간에서 누렸던 삶을 추모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작은 쪽지하나를 문틈에 끼워넣고 그 공간을 영원히 떠나버리죠. 그런 그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원래 그 공간에 살았던' 고스트는 오랜 시간 그 공간에 혼자 머물며 그녀의 쪽지를 꺼내보고자 노력하다 마침내 손에 잡힌 쪽지를 열어보고는 사라져버립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고스트는 왜 사라져 버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쪽지의 내용을 끝까지 밝히지 않은 감독의 의도탓에 정답이 명시적이진 않지만 전체 맥락을 보며 추측해볼수 있습니다.
의미있는 공간은 결국 그 공간이 의미있음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사람들이 그 공간에서 사라져버리면, 그 공간은 더이상 그들의 공간이 아닙니다. 그리고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머무르게 되면 그때부터 그 공간의 특별한 의미는 그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고스트가 그 공간에 있었던 것은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 혹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그 공간이고, 그 사람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던 곳도 그 공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간이 자기정체성 자체였던 것이죠. 그러나 공간의 의미를 함께 부여했던 그 사람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그 시점부터 그 공간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고, 고스트역시 자기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더이상 기억할 수 없을 때 고스트는 더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어웨이 위고의 버트와 베로나가 감격하며 정착하게 된 베로나의 옛집은 행복한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고스트가 베로나를 기다리고 있던 집이었는 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돌아옴으로 인해서 그 공간의 특별함은 다시 생명을 갖게 됩니다. 베로나의 가족들이 남겨놓은 행복한 기억이 여전히 맴도는 그 공간은 다시금 '집(home)'이라는 의미를 회복하여 베로나와 버트, 그들의 아이를 완전하게 보듬어 줄 것입니다.
당신은 어디에 살고 있나요? 혹시 어린시절에 살던 집에서 살고 계시나요? 아니라면 그 시절 살던 집에 가본것은 언제가 마지막 이었나요? (운좋게도 어린 시절의 집이 남아있다면 말이죠.) 부모님, 형제, 자매들과 투닥거리며 살았을 그 집에는 그 시절 우리의 시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헐떡거리며 현재라는 궤적을 따라돌다가 어렵게 방문한 어린 시절 살던 집의 구석 구석에서, 우리는 가슴한켠 통증같은 그리움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시간들의 무엇이 그토록 그리운 걸까요? 현재의 나에겐 없지만 어린 시절의 나에게 있던 것은 무엇일까요?
다시 촘촘히 건물에 박혀 불빛을 내고 있던 그 집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 불빛안에 있을 사람들을 그려보며, 그들이 머무는 그 공간에 새겨지고 있는 그들의 시간은 어떻게 기록되고 기억되어도 소중한 것들임을, 그들이 너무 멀지 않은 미래에 깨닫기를 소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