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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리 Mar 31. 2022

맞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

내가 그나마 잘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동대문에서 시작한 한 패션업체가 세계 최대 화장품 기업에 인수됐다는 소식을 들은 날이었다. 30대 중반인 대표가 수천억 원대 자산가가 됐단 얘기에 세상은 떠들썩했다.


그날 밤. 나는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썼다.


 “공부 따위 때려치우고 ‘스타일긴다’를 했어야 했는데. 나도 나름대로 소울 넘치는데. 그래도 난 공부를 좀 좋아했었어, 하는 생각에 이르니 그럼 역시 이런 길이었겠군. 잠이나 자자. 이렇게 되어버렸다.
김소희 대표는 여러모로 멋진 여자라고 생각한다. 특히 비서로 일하던 시절 사장이 ‘넌 사무직에 안 맞는 것 같아’라고 했을 때 바로 뛰쳐나와 엄마의 장사를 돕기 시작, 스타일난다를 창업한 대목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사장 비위를 맞춰보려 한 대신 ‘난 정말 안 맞는군, 내 길을 가야겠어’ 생각하는 것은 쉬워 보여도 절대로 그렇지 않으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맞지 않는다고 느껴져도, 어떻게든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우리 모두도 쉽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 난! 다시 기사를 쓰러 간다.”


사람들과 댓글로 희희낙락 노닐다가 나는, 내가 쓴 한 구절에 눈길이 머물러 조금 공손해지고 말았다.


-맞지 않는다고 느껴져도.


맞지 않는다고 느껴져도. 그래, 맞지 않는다고 느껴져도. 맞지 않는다고 느껴져도! 그럴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나는 기자 일이 내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 … 솔직히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과 맞지 않는 일을 하며 산다. 정말 맞지 않는 일인 걸 알면서도 그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만둘 용기가 없어서 월세를 내야 해서 집안에 돈이 필요해서 솔직히 다른 일에도 특별한 열정이 없어서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회사라 당장에 때려치우긴 왠지 아까워서 … 무수히 많은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지 못한다. 뭐 어찌 됐든, 그 일을 꾸역꾸역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많은 책과 잘 나가는 멘토들과 멋지고 섹시한 사람들은 단호하게 말한다.


“Quit It!”

“그만둬. 멀쩡한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해서 당신, 멀쩡해?”


그런 말을 들으면 ‘좋아, 나도 번듯한 퇴사인이 되어주겠어’라는 생각이 불끈, 들지만 곧 빌어먹을 패배감이 찾아온다. 때로는 손에 쥐는 것보다 손에 쥔 것을 놓는 일이 더 어렵다. 아무리 퇴사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해도, 퇴사한 사람들 제각각 다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도,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이유로 그냥 잠자코 다녀야 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다.


그런 사람들이 훨씬 많지 않을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만 보면 떠오르는 대사, 그거죠. “Quit It!”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10년 넘게 하며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 있다. 어느 직장에서든 그곳에서 필요한 능력은 아주 여러 가지가 있는데, 누구라도, 그중에서 적어도 한두 개 정도는 잘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그 일과 본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가령 기자에게는 취재원의 말에서 행간을 읽어내고 눈치로 ‘진짜’를 때려 맞히는 능력, 섭외가 안 돼도 될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능력, 취재원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원하는 말을 뽑아내는 능력, 상사의 지시를 따르되 아닐 땐 아니라고 하는 능력, 갑자기 떨어진 지시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능력, 동료들과 최대한 기분 좋게 지내려는 능력, 타사 기자와 친하게 지내면서도 특종을 터뜨리는 능력, 글을 조리 있게 쓰는 능력, 긴 기사를 짧게 후려치거나 짧은 기사를 길게 늘이는 능력, 열폭하게 하는 댓글들에 반응하지 않을 능력, 수많은 제보들 가운데 진짜 얘기가 될 만한 소스를 찾아내는 능력, 많은 글을 읽고 빠르게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 오탈자를 찾아내는 능력, 폭탄주를 잘 만들 능력, 술에 떡이 되어서도 다음날 제정신으로 출근해야 할 능력 등등이 필요하다. 기자란 직업이 엄청난 것이어서가 아니라 어느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종류만 다를 뿐 크고 작은 수십 가지 능력이 요구된다.


나는 이 중에 한두 개나 잘하려나. 여하튼 부족했다. 많이 모자랐다.


그래서 입사 후 몇 년 동안이나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건강검진을 하면 아무 이상이 없다는데 음식을 전혀 소화시키지 못해 2~3주간 죽으로 연명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심할 때는 죽 한 그릇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못 먹으면 우울했고 일에 집중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엉덩이뼈가 아플 정도로 살이 빠졌다가 회복하면 폭식하기를 반복했다. 이 모든 것이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많은 일이 힘들었지만 그중에서도 취재와 인터뷰를 위해 모르는 사람을 섭외하는 일이 나는 정말 싫었다. 무서웠다. 섭외 전화를 걸기 전에 할 말을 미리 다 써놓고 읽고 또 읽다가 정작 전화를 해서는 헛소리를 해댔다. 인터뷰하기 전날 밤에는 잠이 잘 안 왔고,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는 계속 웃고 있느라 입술에 경련이 났다. 누군가를 만난 날 저녁에는 잠이 안 왔다. 헛소리를 했을까 봐.


동료들은 새로운 사람, 세상을 이끄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게 기자의 특권이라며 잘만 하던데 내겐 왜 그렇게 벅찼을까.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일군 사람을 만나면 좋은 기운을 받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냥 그 사람이 쓴 책이나 만든 영화로 그 기운을 받으면 안 되는 걸까, 나는 지쳐갔다. 이런 나를 ‘기자에 맞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다. 좋은 일로 인터뷰하는 것도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뭔가를 캐묻는 취재를 해야 하는 날에 내가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특종 따위 한 적 없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열심히 했다. 나의 일이었으므로 밥값을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 생각했으므로. 그리고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인데 후지게 하기는 싫었기 때문에. 매일은 아니었지만 많은 날 최선을 다했다.


그런 나도, 잘하는 게 있었다. 나는 기사보다 칼럼을 잘 쓰는 부류의 기자였다. 다행히 그걸 눈여겨봐준 선배가 있어 3년 차에 칼럼니스트로 데뷔할 수 있었다. 호응도 제법 좋았다.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선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지만, 기사는 재미있게 쓰는 편이었다. 가장 자신 있었던 것은 르포 기사였다. 나는 누군가와 말을 섞는 것보다 현장을 세밀히 관찰하는 일이 더 좋았고 더 능했다. 성격이 꼼꼼하단 점도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엉덩이뼈가 쑤시도록 힘겨워했으면서도 내가 그만두지 않고 다닐 수 있었던 동력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1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너무나 많은 걸 못하는 나를 그나마 지탱해준 동아줄은 그것이었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수십 가지 능력 중에서 그나마, 정말 그나마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한 두 개를 찾아 그것만이라도 잘해보려고 노력했던 것. 그것이 나를, 비틀비틀 후들거리던 나를 아직도 이곳에 서 있게 해 줬구나 생각하면 자기 연민이라고 비웃겠지만, 조금 눈물이 난다.




맞지 않는 일이어도 해야 할 때가 있다. 멋지게 때려 치워 준다면 가장 섹시하겠지만,

-미안해요. 다녀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한다 해도 나는 당신을 완전하고 완벽하게 이해한다.


그러니 호흡을 가다듬고 더듬어 보는 거다. 조직이, 갑이, 상사가, 고객이 내게 요구하는 수십 가지 능력 중에서 내가 그나마 잘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가능하다면 한 두 개 정도 더. 그래서 어떻게든 그 부분만큼은 잘 다려서 입어보는 거다. 그러면 내 몸에 완벽하게 맞춤한 아이언맨 수트는 아니어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인피니티 워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맞지 않는 일인 걸 알면서도,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그 지긋지긋한 출근길을 걷는다. 어떻게든 한 구석이라도 다려 입어보려고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비록 수천억 원은 손에 없지만, 그런 우리 모두도 나는 멋지다고 생각한다. 진심이다.


*몇 년 전 한 출판사와 에세이 출간을 논의할 당시 쓴 글. 다시 읽어봐도 내 생각은 여전하다. 오늘도 어찌 됐든 꾸역꾸역 출근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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