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힐빌리의 노래'를 봤다. 도널드 트럼프가 지명한 미국 공화당 부통령 후보 J D 밴스의 동명 에세이가 원작이다.
영화 그 자체보다 이제 막 40세가 된 젊은 정치인 밴스가 궁금해서 찾아봤다. 밴스가 누구냐. 러스트 벨트(쇠락한 공장지대)의 가난한 백인 노동자 계층 집안에서 자라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 실리콘 밸리 등에서 대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른바 '개룡남'이다.
J D 밴스와 도널드 트럼프
정치에 발을 디딘 후 행보도 재미있다. 처음에는 트럼프를 아주 혹독하게 비판하다 이후 완전히 입장을 바꿔 열렬한 '충성파'가 됐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인물인데, 부통령 후보가 된 이후 '비호감'의 내리막길을 썰매 타고 고속 질주하는 느낌.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등을 겨냥해 "자식 없는 '캣 레이디'"라고 한 과거 발언 등이 알려지면서다. 해리스와 팀 월즈 민주당 부통령 후보가 예상외로 거세게 치고 올라오기도 했고.
자, 그래서 영화는 어땠느냐.
어려운 집안 환경 탓에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예일대 로스쿨을 다니고 있는 밴스(가브리엘 바쏘)가 중요한 면접을 앞두고 누나의 전화를 받는다. 약물 중독인 엄마베브(에이미 아담스)가 또 문제다. 어쩔 수 없이 고향 오하이오에 내려간 밴스. 그가 이곳에서 자신의 아픈 과거를 마주하며 가족의 의미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깨닫게 된다는, 뭐 그런 얘기다.
연출은 '뷰티풀 마인드' '다빈치 코드' '하트 오브 더 씨' 등으로 잘 알려진 론 하워드 감독이 맡았는데, 이름값에 비하면 평타 수준이다. 과거와 현재를 계속 교차해 보여주는데 이 방식이 내게는 좀 지루했다. 그것이 어떤 종류든 '격렬한' 이야기를 원한다면 심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영화를 기록하는 이유는 '힐빌리의 노래'를 둘러싼 맥락 때문이다. 영화 자체의 재미나 밴스라는 인물의 성장사보다, 러스트 벨트의 절망이 뚝뚝 묻어난 부분들이 오히려 인상적이었다는 얘기다.
가령 영화 초반부에 이런 씬이 있다. 한 젊은 부부가 꿈을 안고 시골(켄터키주 잭슨)에서 오하이오로 상경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활기찬 도시의 풍경, 사람들의 들뜬 표정, 공장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연기. 불안감에 흔들리던 부부의 눈에 설렘이 차오른다. 이들 눈에 비친 오하이오는 당시 제조업이 활황이던 부유한 미국 그 자체다. 이 부부가 바로 밴스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다.
그러나 이 짧은 장면이 곧 90년대 오하이오로 전환되며 분위기는 급격히 씁쓸해진다. 폐허가 된 공장터, 빈민가가 되어버린 마을들 그리고 무력한 사람들. 그 끝에는 밴스의 발목을 잡는 그의 엄마 베브가 있다. 가난에 부딪히고 부딪히다 마약에 중독되고 만 베브.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그녀와 밴스 사이에 오가는 절망을 보다 보면 조금이나마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풍족한 나라에서 러스트 벨트 지역에 사는 힐빌리, 즉 '저학력 백인 노동자 계층'의 절망감이란 짐작보다 꽤 큰 것이었겠구나, 하고.2016년의 트럼프는 이 절망감을 제대로 건드렸던 거다. 지금도 흔들고 있고.
'저학력 백인 노동자 계층'이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 주요 키워드가 된 지금, 미국 정치에 관심이 있다면 챙겨볼 만하다. '강추'까지는 아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