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소년성을 여행하다
1983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오랜 시간에 걸쳐 해외여행이 유행이 되기 전까지 국내의 여러 곳이 대표적인 관광도시로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부모님이 가자고 하는 여행지는 그래서 대부분 국내에 한정되어 있었고, 부모님은 당신의 세대가 젊은 시절 자주 찾아 익숙한 곳으로 자주 나를 데리고 가주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정동진의 새해 일출을 봐야 한다며 어머니가 일찍 일어나는 게 싫은 나를 억지로 억지로 데리고 갔던 정동진의 바다였다. 늦은 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와 억수로 몰려든 인파로 짜증이 날 대로 났지만 고생한 만큼 기운 찬 새해를 본 기억이 선명하다. 물론 고생의 기억이 가득해 그 이후로 한번도 새해의 일출을 보러 간 적은 없지만 어릴 적 그 인파의 인상이 워낙 강렬해 나에게 정동진은 국내 관광지 중의 관광지라는 인식으로 남아있다. 산 쪽으로 설악산이 있다면, 바다 쪽으로 정동진이 있다고 해야 할까.
정동진이 동해바다라고만 알고 있었을 뿐, 강릉 남단의 바다였다는 지리적 정보까지는 알지 못했는데, 더 찾아보니 강릉의 남단에 정동진이 있다면 북단에는 주문진이 있다더라. 안 그래도 관광지로도 유명한 강릉에 남북 양 끝으로 정동진과 주문진까지 있다니, 강릉은 여행의 소스들을 참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이구나 싶었다. 강릉 시내는 강릉 여행만을 위해 별도로 가는 것이 좋고, 정동진과 주문진도 강릉 메인 못지 않은 여러 여행지들이 있기에 오로지 정동진과 주문진만을 위한 여행을 떠나보았다. 정동진과 주문진으로 가려면 강릉을 지나쳐야 하기 때문에 다소 동선이 효율적이라고 할 순 없지만, 강릉의 양 끝에서 항구도시로 갖는 고유의 매력이 있기에 정동진과 주문진을 묶어서 가는 것을 추천한다.
정동진과 주문진의 '진'은 '나루 진(津)'자로 강 혹은 바다와 접하고 있는 포구도시에 붙여지는 지명단위다. 본디는 어촌도시였지만 수려한 풍광으로 이름을 알리며 관광도시로 확장된 두 포구 마을은 다른 포구 마을과 또 어떻게 다르고 어떤 모습을 품고 있을까.
정동진 역은 아마 우리나라 모든 기차역 중에 가장 설레는 기차역일 것이다. 정동진 역은 우리나라 기차역 들 가운데 바다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역으로,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어 있다. 역사 자체는 소담하지만 광활한 자연 옆에 존재감을 적당히 내보이는 앉음새가 퍽 한국인의 정서와 맞아떨어진다. 본디 정동진 역은 광물을 실어나르는 역할을 했다. 산업화 시기에 정동진 근처 탄광소가 있었고 이 시기 때만큼은 정동진 사람들은 대부분 광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석탄의 시대가 끝이 나고부터는 정동진 마을은 어촌 마을이 되었고, 정동진 역이 바다와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기차역으로 소문이 나면서 정동진은 우리나라 대표 관광도시로 부상했다. 2020년부터는 정동진 역에 KTX도 지나치게 되면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정동진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정동진의 '정동'은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 정확히 동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대에 이것을 정확하게 계산해보았더니 한양보다는 도봉산에서 정확히 동쪽에 있다고 한다. 신라 시대부터 신라의 임금이 정동진에 와서 바다의 용왕에게 제사를 정기적으로 지냈다고 하니 정동진이 가지고 있는 터의 기운이 있기는 있나 보다. 괜시리 정동진의 바다가 더 의미심장하게 보이고, 그런 바다의 기운이 온몸에 와닿아 이 여행이 완벽하게 마무리될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정동진 역을 나오면 바로 앞에 정동진레일바이크가 있어 관광객의 발길을 묶지만, 레일바이크는 잠시 뒤로 하고 점심식사를 위해 차를 타고 시내 밖으로 벗어 심곡까지 내려간다. 심곡항은 정동진에서 떨어져 있는 작은 항구마을이긴 하지만 인파가 적어서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정동진의 비밀 여행지이기도 하다. 비록 나는 산책이 아니라 밥이 목적이긴 하지만! 점심메뉴는 강원도의 향토음식인 감자옹심이다. 이름부터 친근감 가는 '옹심'은 '새알의' 강원도 방언이다. 단순한 새알과는 물론 다르다. 요알못이라 음식을 만드는 방법까진 자세하게 모르지만 그저 쫀득쫀득한 것에 끝나는 게 아닌, 약간의 크리스피한 표면까지 더해지는 식감은 예술이다. 그리고 국물에 스며든 감자의 향은 이곳이 강원도임을 실감하게 해준다. 한국인은 국물이 필수라고, 감자옹심이 한 그릇 뚝딱하면 그 어떤 여행일정도 소화가능할 것 같은 체력이 생긴다!
점심식사 후 다시 정동진 시내로 돌아온다. 정동진레일바이크를 타러 가기 전 시간의 텀을 두고 가는 길에 들린 서점이 있으니, 영화서적을 전문으로 다루는 독립책방 '이스트씨네'다. 책방의 외관부터 극장으로 착각할 정도이고, 내부도 극장처럼 꾸며져 있다. 단순히 장식만 극장이 아니라 실제로 책방을 들리는 사람 누구나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몇 좌석 자리를 마련해두고 벽에 영화를 상시 틀어주고 있다. 귀로는 영화를 들으며, 눈은 책을 고르거나 읽고. 독립서점 특유의 냄새까지 맡으며 작은 책 혹은 소소한 굿즈 몇 개 사두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여행와서 예술적 교양까지 쌓아가는 충만함은 아는 사람만 아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이제 정말 정동진 역으로 돌아와 미리 예약해둔 정동진레일바이크를 타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본다. 열심히 패달을 밟으며 해변가를 누비다보면 바다에서 레져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 너머로 정동진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정동진의 썬크루즈 호텔까지 보인다.
하지만 이 레일바이크를 타면 보이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정동진의 얼굴이 있으니, 바로 해안단구 지형이다. 심곡항에서 정동진에 이르기까지 이 지형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해안단구 지형으로, 학창시절 한국지리 시간에 해안단구를 배우는 단원에서 언제나 선생님들이 해안단구의 예시로 꼽는 곳이 정동진이다. 바다 밑의 암석 지반을 '파식대'라고 하는데, 이 파식대가 파랑(파도)에 의해 지속적으로 침식이 되면서 절벽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 절벽이 단계적인 융기 과정을 거치면서 땅 위에 계단 모양의 언덕이 올라오고, 이 언덕을 해안단구라고 한다. 한때 바다 밑에 있다가 올라온 언덕이기에 해안단구는 언제나 끝내주는 경치를 앞마당에 펼쳐보인다. 정동진의 수려한 풍광의 비밀이 이 지형 속에 있었다. 역시 자연의 아름다움은 생성원리까지 파악할 때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정동진해수욕장 끝자락에는 정동진시간박물관과 대형 정동진 모래시계가 있다. 정동진은 이미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결정적으로 정동진이 국내 최고 여행지 반열에 들게 해주었던 건 역시 드라마 <모래시계> 덕이 컸다. 한국 드라마의 역사에서 가장 전설적인 시청률 기록을 만들었던 드라마 <모래시계>의 평균시청률은 앞으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을지도 모를 46%였다. 마지막회의 시청률은 무려 64%. 수많은 직장인들이 퇴근 후 <모래시계>를 봐야 한다며 야근과 회식마저 피하게 만들어서 '퇴근시계'라는 별칭까지 생겼고, 이 드라마의 주조연 배우들은 한순간에 탑스타가 되어버렸고, 배우뿐 아니라 <모래시계>의 배경이 되는 정동진마저 스타관광지로 부상시켰다. 정동진의 역사에 있어서 <모래시계>의 입지가 결정적인 만큼 그 인기를 회고하고자 정동진 해수욕장에는 시계와 시간을 테마로 한 여러 시설들이 조성된 것이다. 정동진시간박물관은 열차를 개조하여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의 각종 다양하고 이채로운 시계들을 전시하고 있다. 정동진 모래시계는 말 그대로 대형 모래시계로, 전세계에서 가장 큰 모래시계라고 하며 모래시계의 분량은 1년치라고 한다.
사실 '시간'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자연적 질서에 의미를 부여한 인간 인식의 산물이다. 실제 자연에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지구가 자전 1바퀴, 공전 1바퀴를 할 뿐이고 지구는 문자 그대로 억겁의 시간 큰 변동 없이 하루 그리고 1년 주기로 자전과 공전을 반복해왔다. 지구 입장에선 단순히 순회하는 패턴의 연속이지만, 우리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시간을 원형이 아닌 선형으로 인식한다. 자연의 시간은 언제나 순환할 뿐이라 시작과 끝이 없지만, 인간은 시작과 끝을 두고 시간을 만들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단어들도 비자연적 단어일 뿐이다. 실제의 시간은 시작과 끝이 없는 원형이지만, 우리 인간이 시간에 선형성을 부여하는 건 부질없음을 나타내는 건 아니다.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이 이 세상에 어떻게라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어떤 식으로라도 분투하며 살아가기 위한 숭고한 노력이다. 지구상 그 어떤 생명도 인간 만큼 시간을 잘게 조개어 인식하지 않았다. 아니 인간 이외의 생명들은 모두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자체를 인지조차 하지 않는다. 시간을 인지하고, 시간을 쪼갤 수 있는 단위 만큼 쪼개고, 그 쪼갠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시간관은 잠시 이 세상에 왔다가 사라지는 유한성 안에서 우리 인류의 역사가 찾아낸 치열함의 가치를 품고 있다.
사계절 언제 가도 아름다운 정동진의 바다이지만, 굳이 정동진을 갈 만한 시기를 추천한다면 8월이다. 무더운 더위를 이겨내면서까지 8월의 정동진을 추천하는 이유는 '정동진독립영화제' 때문이다. 1999년 1회로 문을 연 정동진독립영화제는 극장 하나 없는 정동진에서 오로지 야외상영만을 기획하는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영화제다. 그래도 더위가 조금은 사그라드는 초저녁에서부터 밤까지 지방의 작고 사랑스러운 정동진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독립영화가 상영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돗자리를 펴놓고 한 여름 밤의 영화를 즐기는 산뜻한 영화제다. 수상정보도 관객상 딱 하나만 있는 귀여운 영화제로, 관객과 가장 가까운 영화제라 할 수 있으며 많은 신인 영화인들이 등용문처럼 지나치는 곳이기도 하다. '대안, 독립, 낭만'의 키워드를 기치로 내걸며 정동진의 밤하늘과 미세한 바닷바람을 체감하며, 별빛 대신 스크린의 빛을 감상하는, 심지어 모든 행사가 무료로 진행되는 정동진독립영화제. 이 이유 하나로 정동진에서의 밤은 술에 취해있을 수가 없다.
정동진에서 숙소는 (예약하는 것이 힘들다는 건 알지만) 하슬라아트월드를 추천한다. '동화'를 컨셉으로 한 이색적인 숙소 디자인에, 바다뷰야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정동진에 왔으면 하슬라미술관을 꼭 관람해야 하기 때문에 다음날 체크아웃을 하자마자 곧바로 미술관을 구경할 수 있다는 동선상 극강의 효율성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슬라아트월드는 동화 <피노키오>를 테마로 한 미술관이다. '하슬라'라는 강릉의 순우리말이며, 어린아이들의 동화를 테마로 했다지만 성인들 방문이 더 많은 규모가 굉장히 큰 미술관이다. 어린아이들의 동화라기보단 어린아이들의 성장이야기라고 봐야 하는 <피노키오>는 피렌치의 소설가 카를로 콜로디가 19세기에 지은 이탈리아 소설이다. 카를로 콜로디는 피렌체 사람이지만 그가 로마에 머물 무렵 로마의 어린이 신문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소설을 연재하며 36회만에 완결을 내었고 연재부터 이탈리아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끌었다. (목수 제페토가 피노키오를 만든 곳은 피렌체가 있는 토스카나 지방이다) 원래 결말은 피노키오가 살해당하는 결말이었으나, 동심을 제대로 부서진 어린아이들이 부모들에게 투정을 부리자 부모들의 항의로 피노키오가 사람이 되는 결말로 바뀌었다는 일화가 있다. <피노키오>는 어린아이의 동화이지만 이후 신화, 철학, 정신분석학 등 다방면에서 분석적으로 다루어졌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설정, 사람과 같이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지만 인간은 아닌 존재, 어린아이가 고래의 뱃속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의 모티프는 이후 다른 소설, 만화, 영화, 드라마 등 수많은 이야기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피노키오를 통해 인간성에 대한 테제를 질문했다. 인간이 되고 싶지만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피노키오의 본질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피노키오는 인간의 육체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규정지을 수 없다지만, 그렇다면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피노키오보다 더 높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있는가? 인간은 아니지만 오히려 인간보다 인간 같은 존재가 피노키오라면? 이러한 철학적 자맥질은 결국 인간성에 대해 탐구하고 고민하기 위함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인간과 비인간으로 구분하려는 인간의 거만한 태도를 문제삼는다. 실은 우리 인간의 종인 호모 사피엔스도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종이며, 그저 포괄적인 개념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아이러니한 건 그런 인간 내에서도 우리 인간은 종 나누기를 한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러한 인간의 경계 구분짓기를 '인류학적 기계'라고 명명했다. 인간은 인류학적으로 '나'가 속해 있는 집단의 폐쇄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피노키오는 그러한 폐쇄적 경향을 전혀 띄지 않는다. 피노키오를 통해 우리는 인간다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그리고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내린 결론을 두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인류의 사회에서 배제시키는 행동 또한 경계해야 한다. 인간과 비인간, 피차의 구분, 이 모든 인류학적 기계들이 얼마나 무의미한 행동인지 우리 인류의 역사가 말한다. 비슷한 개념을 제시한 철학자 가운데 호주 출신의 철학자 피터 싱어가 있다. 생명윤리학자라고 불리는 피터 싱어는 인간 특유의 종 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종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시각은 현대철학과 현대윤리학에서 가장 이슈화 되는 분야이며, 생명윤리를 넘어 환경, 젠더 등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적용되는 테제다.
하슬라아트월드의 풋풋한 동화세계의 매력을 뒤로 하고, 이제 정동진에서 나와 북쪽으로 북쪽으로 이동해 이번 여행의 두 번째 목적지 '주문진'으로 향한다. 어느덧 주문진 시내에 접어들고 가장 먼저 주문진 성당부터 찾았다. 종교가 없어서 편한 건 여행할 때마다 각 종교별 사원 건축을 폭넓게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문진 성당은 비록 유명한 성당으로 잘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그 산뜻하고 화사한 노란색 색감이 아름다워 여행의 노곤함을 가볍게 털어주는 아기자기한 디자인을 자랑하고 있다. 무려 1920년대에 문을 연 역사 깊은 성당으로, 잘 알려지 있지 않아 아쉬우면서도, 또 나만 알고 싶은 양가적인 마음이 충돌하는 작고 예쁜 성당이다. 현재의 모습은 대화재를 겪고 난 뒤 1953년에 새롭게 단장한 성당의 모습이지만, 동화 같은 노란 색감에 반하지 않고 못 베길 테니 주문진을 온다면 꼭 한 번 들르기를 권하는 곳이다. 예쁜 색감에 취하고 기분 좋게 여행을 시작할 수 있는 주문진의 첫 여행지로 제격이다.
주문진은 정동진보다는 관광지로서의 색깔은 조금 덜한 편이다. 주문진은 오히려 아직까지 어촌마을로서 모습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주문진에는 정동진에는 없는 수산시장이 있다. 그리고 좌판풍물시장까지 다양한 어시장 가게들이 즐비해 있고, 당연하게도 거의 대부분 식사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에 맛집 천국이라 할 수 있다. 주문진항 옆으로 실제 어촌 마을 한가운데서 바다를 오감으로 느끼며 먹는 수산시장은 정동진보다도 정겹다. 주문진항은 동해바다의 항구 중에서도 꽤 규모가 큰 항구이며, 굉장히 많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문진항의 역사도 오래된 편이고, 주문진항에 빛을 밝혀주는 주문진 등대도 일제강점기였던 1918년 강원도 동해바다 등대 중 최초로 만들어졌다. 주문진의 '주문'의 어원은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조선후기 18세기 때 '주문리'라는 지명이 등장하고, 주문리가 점차 커져 현재의 주문진읍이 되었는데, 지명 끝에 '진'이 들어가는 걸로 봐서 조선후기 나룻터가 있던 곳은 확실해 보인다. 주문진의 수산시장과 풍물시장은 다른 해산물도 아주 싱싱하고 좋지만, 특히 오징어와 건어물로 유명하다. 오늘 하루 정동진에서 주문진까지 오느라 시간도 많이 썼고, 잠시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 뒤 저녁을 위해 풍물시장을 찾아 그곳에서 주문진의 다양한 회와 주문진에서만 먹을 수 있는, 내장과 먹물 소스까지 입힌 오징어통구이, 그리고 후식으로 맑은 지리탕까지. 2박 3일의 여행을 위해 둘째날 저녁으로 부족함이 없는 식사다. 예쁜 플레이팅을 기대할 순 없지만 억척스러운 플레이팅에 음식의 내공이 느껴지고, 맛은 내공을 넘어설 정도로 맛있다. 주문진 풍물시장에서의 해산물은 다른 바닷가에서 먹을 수 없는 독보적인 맛이 존재한다.
주문진을 대표하는 요리는 오징어가 단언 원톱이지만, 오징어의 뒤를 이어 주문진의 두 번째 대표요리는 곰치국이 한 자리를 하고 있다. 사실 동해안 어디서든 곰치 잘 하는 집이야 있다만 주문진항 뒷편에는 곰치국을 하는 식당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못생긴 생선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곰치는 공격적인 성향도 다분하고 아주 캄캄한 바다에서 서식한다. 곰치는 동해안에서만 잡히는 건 아니다. 다만 동해안과 다른 해안에서 잡히는 곰치의 종이 다소 다른데 동해안에서 잡히는 곰치는 물곰, 서해안과 동해안에서 잡히는 곰치는 물메기라고 부른다. 본디 곰치가 워낙 못생겼다보니 기피하는 생선이었지만 삼척에서 곰치로 김치를 넣어 김치국처럼 해먹은 뒤로 그 특유의 칼칼함과 시원함 때문에 곰치국은 삼척을 넘어 동해안을 대표하는 요리 중 하나로 입지를 다졌다. 곰치를 요리하면 물컹물컹한 식감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다고 하지만 단언컨대 그건 식당의 역량에 따라 달려 있다. 실력 있는 식당에서 곰치의 식감은 물컹물컹이 아니라 부드러움이고, 부드러운 식감과 다르게 국물맛은 아주 공격적이니 이만한 해장이 또 없다. 주문진항 뒷편의 곰치국 식당들은 웬만하면 다 기본 이상의 맛을 낸다고 자부하지만, 그중에서 내가 찾는 곳은 '주문진곰치국'인데 그저 참고만 하길 바란다.
정동진에서 그렇게 질리도록 바다 구경을 했어도 내 검은 동공에 바닷물의 색깔을 입히는 건 절대 질릴 수가 없다. 관광지로서 주문진의 명성은 정동진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주문진의 바다를 즐기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들이 몇 곳 있다. 먼저 주문진해수욕장 끝자락에 있는 BTS 버스정류장이다. 한때 버스가 다닌 버스정류장이지만 이제는 버스가 다니지 않아 정류장이 철거될 뻔 했는데, 대한민국의 대표 아이돌그룹 BTS가 정규2집 리패키지 앨범인 'YOU NEVER WALK ALONE'의 재킷사진이 되면서 핫한 스팟이 되었다. BTS의 정규2집 리패키지 앨범 'YOU NEVER WALK ALONE'은 <봄날>을 타이틀곡으로, <피 땀 눈물> , <Not Today> 등의 수록곡이 담긴, BTS가 한창 그 인기가 절정으로 향해 가던 시절에 발매한 앨범이다. BTS의 글로벌한 인기도 인기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BTS의 매력은 노래와 안무에 담긴 시적인 서정성이다. BTS만의 시적 서정성은 가사, 멜로디, 안무 등 음악 전반에 걸쳐 있고, BTS 버스정류장 역시 그 시적 서정성에 딱 걸맞는 분위기의 정취를 뽐낸다.
또 한 곳 주문진에서 사람들이 찾는 바다 명소는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다. 드라마 만큼이나 OST 전곡이 사랑받고 숱한 화제를 일으켰던 김은숙 작가의 <도깨비>. 이 드라마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의 촬영지가 바로 이 주문진이라는 곳이다. 생각해보면 인기드라마의 촬영지는 언제나 유명 관광지가 아닌 곳을 배경으로 촬영하고,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 그곳이 유명 관광지로 부상하는 패턴이 반복되는 듯하다. 드라마가 종영한 지도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줄지어 이 방파제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보면, 매체의 힘은 대단하다는 걸 새삼 실감한다.
드라마 <도깨비>의 인기를 더욱 실감할 수 있는 건, 표면적으로는 특별할 것 없는 이 해수욕장 뒤로 <도깨비>의 촬영지라고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리자 상권이 확 커졌다는 것이다. 해수욕장 뒤로 바다를 즐기거나 혹은 휴양 느낌 물씬 나는 카페들이 즐비해 있고, 이 카페거리에 '도깨비시장'이라는 이름까지 붙었다. 그중 꼭 들르기를 추천하고, 추천하지 않더라도 이미 SNS에서 핫한 카페가 있으니 강냉이를 디저트로 내는 '강냉이소쿠리'다. 구수하고 그윽한 멋을 내는 한옥 외관. 이 가게에 들어가보면 컨셉을 위해 억지로 만든 한옥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다. 작은 가게 안에 자리를 잡으면 테이블마다 메뉴판이 아닌, 이 가게의 스토리가 담긴 그림동화책이 놓여 있다. 사연인즉슨, 이 가게의 사장님은 어릴 적 할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이 가게가 옛날에 사장님이 어렸을 적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집이었던 것이다. 사장님이 디저트를 더 공부하기 위해 유럽으로 유학을 갔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귀국 후 사장님이 이 한옥집을 인수하시어 약간의 공사를 거친 뒤 지금의 가게를 차렸는데, 어릴 적 할머니가 입맛이 없을 때면 항상 강냉이로 음식을 많이 해주셔서, 그 기억에 강냉이로 디저트를 만드는 메뉴들을 개발했다고 한다. 훈훈하고 동화적인 사연을 가득 담은 이 가게의 달콤한 강냉이 아이스크림은 이번 정동진-주문진 여행에 마침표를 찍어주는, 말 그대로 내 여행의 디저트였다.
동해 바다는 딱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수많은 인파가 모여드는 축제 분위기의 바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은은하고 적요한 바다. 정동진의 경우 새해가 되면 축제 분위기가 되긴 하지만, 그 이외의 정동진과 주문진은 두 번째 부류의 동해바다 느낌이 강하다. 마을이 작아서일까, 경외감이 드는 바다라기보다는 어딘가 소박하고 아늑한 느낌의 바다다.
정동진과 주문진 모두 작은 어촌마을로 시작한 이래 시간의 누적에서 껴온 이야기의 층위들이 두 바다를 정겨운 바다로 만들어준다. 정동진의 영화제나 거대 모래시계나, 주문진의 수산시장이나 강냉이소쿠리의 이야기나 정동진과 주문진이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분위기의 기운에서 탄생한 귀여운 발상이 아닐까 한다. 시끌벅저하지 않고 차분하고 은은한 도파민의 바다가 필요할 때. 그럴 때 나는 정동진과 주문진을 찾는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음악 추천
- BTS 정규 2집 리패키지 <<YOU NEVER WALK ALNOE>>
대구여행 편에 이어 이번에도 책이 아니라 음악을 추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BTS의 정규 2집 리패키지 앨범인 <<YOU NEVER WALK ALONE>>입니다. BTS가 글로벌 대스타로 오르기 직전, 국내에서 가장 전성기를 달릴 때의 앨범이 아닐까 합니다. <<YOU NEVER WALK ALONE>>은 주문진해수욕장 끝자락에 있는 버스정거장을 배경으로 자켓커버를 찍은 앨범이죠. BTS의 팬은 아니라 전곡을 알진 모르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BTS의 노래는 <<YOU NEVER WALK ALONE>>의 수록곡인 <봄날>인데요, 아이돌의 특성상 보통 앨범의 타이틀곡은 퍼포먼스가 강렬한 노래로 정해지는데, <봄날>은 서정적인 멜로디와 가사에 아이돌의 전형적인 노래와 달리 '듣기에 좋은' 노래입니다. 긴 겨울을 끝나고 봄날을 맞이하는 설렘에 그리움의 정서를 더한, 멤버들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봄날> 외에도 퍼포먼스가 강력한 <피, 땀, 눈물> 그리고 <Not Today>도 아이돌 특유의 파워풀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노래죠. 앨범의 모든 수록곡을 알지 못하지만 저도 다른 수록곡들도 들어봐야 겠습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멕시코 영화감독 3대장 중 한 사람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영화입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주로 크리쳐 장르물을 만드는데, 대표작으로 <판의 미로>, <퍼시픽 림> <셰이프 오브 워터> 등이 있습니다. 크리처 장르물이라고 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의 모든 영화에는 순수한 동심 같은 것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첫 애니메이션 영화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피노키오를 원작으로 하여 기예르모 델 토로가 재해석한 영화죠. 전체적인 줄거리는 원작과 동일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는 2차세계대전이라는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을 가져와, 동심과 인간성이 파괴될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인간이 되고자 하는 피노키오를 다루고 있습니다. 설정면에서 스페인 내전이란 시대적 배경 하에 아이들의 사라져 가는 동심을 다룬 <판의 미로>와 비슷하죠. 인간성과 아동인권이 말살되던 전쟁의 시대에 피노키오가 좇는 소년성의 영원함이 서로 길항하며 우리가 피노키오를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간접적으로 고민하게 하는 냉혹한 동화랍니다. 원작과 또 어떤 지점에서 다른지 비교해보시면서 기예르모 델 토로는 피노키오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피노키오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고민해보시면서 보시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