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흔적을 여행하다
가끔은 여행지를 고를 때 대단한 자연경관이나 볼거리가 없다고할지라도, 특정 누군가가 나고 자란 곳이 있다면 괜시리 그 터의 기운을 느껴보는, 인문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있다. 어찌 보면 평범한 땅일지언정 역사적 거물이 이 자리에서 한 시절을 보냈을 것을 상상하면 그 평범한 공간은 사연을 품으면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품게 된다. 그 자리에서 작은 기념관이라도 하나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어쩌면 S들은 이해하기 힘든 N의 취향일 수도 있지만..
충남 홍성군에서는 역사적 거물을 무려 3명이나 만날 수 있는 공간들이 있다.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대표적인 독립군 장교 김좌진 장군, 민족대표이자 문학인이자 사상가였던 만해 한용운, 그리고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거대한 족적을 남겼던 이응노 화백까지. 한 명만이라도 감지덕지인데 무려 3명의 흔적이 깃든 곳이라니 당장에라도 안 갈 이유가 없다. 이렇게 인문의 자취를 밟으러 봄날의 홍성을 찾아본다.
홍성역에서 홍성시내까지는 차량으로 5분 정도 소요된다. 홍성 시내에는 오일장으로 열리는 홍성전통시장이 있고, 홍성전통시장에는 홍성소머리국밥거리가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한우'하면 횡성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홍성의 한우도 그에 못지 않게 홍성의 자랑스러운 대표 특산물이다. 억울하게 발음이 비슷한 횡성 한우의 독보적 명성 덕에 인지도가 다소 뒤쳐지지만, 두 지역은 서로 다른 이유로 한우가 발달하였다. 우선 횡성은 조선시대 가장 큰 우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소를 활용한 음식문화가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반면 홍성의 한우는 인파가 몰리는 인기 때문이라기보단 홍성의 생계에서 비롯하였다. 흔히 내포평야라 부르는 당진~예산~홍성 일대에서는 오래 전부터 여러 목장들을 운영하며 한우를 목축해왔다. 그래서 당진~예산~홍성 일대는 소 요리로 낸 국밥거리가 일찍부터 조성될 수 있었다.
국밥거리가 늘 그렇듯 한 가게가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지는 않다.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곳, 현지인들이 단골이 되는 곳 등등 저마다 다른 매력을 갖는 인기맛집들이 즐비하다. 나는 나만의 기준에서 '홍흥집'이란 식당을 찾았다. 인기식당이라지만 거창한 건물로 새단장하지도 않고, 시장 안에서 자연스럽게 옛 모습을 이어가고 있는 정겨운 식당이다. 국물의 깊고 진한 맛과 함께 마치 꽃향기마저 나는 듯한 향, 그리고 미식가가 아니더라도 좋은 고기임을 단번에 맛볼 수 있는 푸짐하고 든든한 소머리국밥이었다. 덕분에 기력도 보충하고 좋은 기분으로 여행을 시작할 수 있겠다.
홍성 시내에는 옛 조선시대 당시의 시내 모습도 유지되고 있다. 오늘날의 홍성은 조선시대에는 홍주와 결성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각각의 지역에 홍주읍성과 결성읍성을 두었다. 결성읍성은 그 흔적이 전해지지 않지만, 홍주읍성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전해지고 있으며 그 일대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조선 시대의 홍주성이나 오늘날의 홍성군이나 행정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옛 홍주읍성의 정문이자 남문이었던 조양문 뒤로 홍주성의 터는 공원이 되어 있고, 몇 채의 관아들이 복원되어 있다. 홍주성의 전체 모습은 공원 안에 있는 역사관에 모형으로 전시되고 있다.
홍주성은 조선시대에 충주, 청주에 이은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조선의 13대왕 명종 때는 문정왕후의 정적들 가운데 충주 사람이 많다 하여 문정왕후는 충청도의 이름에서 충주를 빼고 홍주를 넣어 충청도의 이름을 일시적으로 '청홍도'로 바꾼 적도 있었다. 그만큼 충청도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홍주성이 전장이 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전투가 구한말 3대 의병들의 거병 사건 중 하나였던 을사의병의 홍주성 전투다.
때는 러일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05년. 1905년 7월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테프트 밀약으로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것에 서로 합의를 봤으며, 8월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해 영국은 인도를,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것에 서로 합의해주었다. 그리고 9월 일본은 러시아와 포츠머스 강화 조약으로 러일전쟁을 마무리했습니다. 러시아는 포츠머스 강화 조약으로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 제국의 지도, 보호, 감독권을 승인해주었다. 조선을 식민지화할 수 있는 국제적 인정까지 받은 일본은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식민지화 수순을 밟았고, 그 첫 단계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가는 것이었다. 일제는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음이 공표되자 전국적으로 엄청난 반발이 잇달았다. 전국의 수많은 유림, 유생들이 만국공법(국제법)을 내세워 을사늑약의 백지화를 요구하고 을사늑약에 동의한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 5명을 을사오적이라 맹비난하며 처벌하라는 상소문이 빗발쳤다. 민영환, 이한응,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송병선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규탄하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끝내 유림계 대표였던 최익현이 움직였다. 최익현은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기도 하여 성리학을 고수하는 당시 가장 대표적인 보수적인 위정척사파였다. 최익현은 “오백 년 종사가 드디어 망하니 어찌 한번 싸우지 않겠는가?”라며 일흔이 넘은 나이에 정읍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유림계에선 최익현의 입김이 굉장히 강력했고, 최익현이 전국적으로 의병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뿌리자 전국단위로 의병들이 궐기하였다. 그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의병부대는 홍성에서 형성된 민종식의 부대였다. 민종식은 큰 재산을 보유하고 있던 명망가문 출신으로, 의병을 만들기 위해 가산을 다 팔고 군자금 2천원을 마련했다. 처음엔 600명으로 예산에서 궐기하여 서천을 점령하였다가, 홍성으로 넘어가 일본인 관리를 처단하면서 활동범위를 더욱 넓혔다. 점점 의진의 병력이 부쩍 늘어나자 민종식의 부대는 홍주성 점령을 목표로 진군했다. 의진 병력은 1000명이 조금 넘는 병력이었고 구식이긴 하지만 나름 화포까지 사용하며 1906년 5월 홍주성을 함락하였다. 홍주성을 함락하자 주변에서 훨씬 더 많은 의병들이 합류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충청도 공주에 주둔하던 대규모 병력을 홍주성에 투입하였고 홍주성에서 3일간 격전이 벌어졌다. 비극적이게도 민종식의 의진이 패퇴하고 홍주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홍주성을 탈환한 일본군은 홍주성에서 잔인한 살육을 자행했다. <대한매일신보>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일본군대가 의병을 습격할 때 의병은 기미를 알고 흩어져 모두 제거하지 못하고 무고한 거주민을 남기지 않고 도륙하고 일로전쟁시 만주를 점령함과 같이 일본인민을 점차 이주케 할 계획이라 하니 한 사람의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천하를 얻어도 사람들이 참지 못하는 바이거늘 하물며 한 주(州)의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고 한 성을 점령했으니 이를 가히 참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너무나 비참하고 눈물이 흘러내려 할 말을 잇지를 못하겠다.”
이 전투가 을사의병 당시 제일 규모가 컸던 홍주성 전투이다. 민종식은 숨어있던 중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지만 훗날 순종황제 즉위와 더불어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고 대신 진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홍성은 고암 이응노 화백이 태어난 곳이다. 그의 생가터에 가보면 어린 시절 고암 이응노가 나고 자랐던 자그만 초가집이 있고, 그 뒤로 기념관이 놓여 있다. 기념관은 전통적인 색채가 묻어나는 황갈색 외벽과 현대적인 감성을 자아내는 콘크리트 내부 디자인이 공존하는, 멋진 현대 건축물이라 건축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예술적 세포들이 살아난다.
"우리 집 남쪽으로 월산이라고 불리는 산이 있었고, 북족에는 용봉산이라고 불리는 바위투성이의 봉우리가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그리고 계절에 따라 이 산들의 모습은 그 이름처럼 보였다. 즉 월산이 아름답고 수수하고 우아하여 한 마디로 여인의 자태를 보여준다면, 용봉산은 강인하고 위엄 있게 우뚝 솟아있었다. 선인들은 어찌 이리도 잘 어울리는 이름을 지었을까. (중략) 나는 열 일곱 살까지 이러한 자연 속에서 자라났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지만 그런 나를 도와 주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나를 방해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했지만, 나는 남몰래 가벼운 마음으로 줄곧 그리고 또 그렸다. 땅 위에, 담벼락에, 눈 위에, 검게 그을린 내 살갗에... 손가락으로, 나뭇가지로 혹은 조약돌로... 그러면서 나는 외로움을 잊었다. 아득히 지나가 버린 시절이 이렇게 또렷이 떠오르다니! 오늘도 내 손은 붓을 잡고 내 눈은 당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지금도 그때처럼, 그린다는 것으로 나는 여전히 행복했다." - 고암 이응노
고암 이응노 화백은 한국현대미술의 2세대에 속한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고전미술에서 현대미술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만들었던 1세대에 이어, 2세대 현대미술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한국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고암 이응노는 '전통회화'라는 고전미술의 정체성을 유지해가는 가운데 서양의 현대미술을 접목하는 그룹에 속했다. 따라서 그는 모든 그림을 서양의 캔버스가 아닌 동양의 종이에 그렸다. 그리고 그는 동양의 붓과 먹을 사용했다.
이응노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나, 다소 보수적인 아버지는 화가라는 아들의 꿈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19살 뛰쳐나가듯이 이응노는 집을 나와 서울로 유학하며 그림을 배웠고,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풍죽>을 발표하며 입단하였다. 초기의 이응노의 그림은 대나무를 소재로 한 동양화였다. 1935년부터 이응노는 일본과 식민지 조선을 오가며 서양화를 접하였다. 이응노는 서양화로 넘어가긴 했지만 그가 언제나 관심을 두었던 건 동양의 정신론이었다. 동양의 정신론을 접목한 이응노의 서양화는 추상예술로 확장하였다. 해방과 전쟁 이후 이응노의 작품을 본 프랑스 미술평론가가 이응노에게 파리 유학을 제안하였고, 그렇게 이응노는 그의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파리로 넘어갔다. 프랑스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응노는 작은 비용으로나마 구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재료로 추상화를 제작해나갔는데, 그 모든 재료들은 역시 동양의 재료들이었다. 프랑스 미술계에서 점점 이응노의 입지는 잘 다져졌으며, 그의 명성에 힘입어 이응노의 작품세계는 인간의 율동과 인간이 사용하는 문자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이후 '율동'과 '문자'는 이응노의 작품세계를 상징하는 두 가지 단어가 된다. 60년대 군사정부의 간첩 조작 사건이었던 '동백림 사건'의 억울한 희생자가 되어 이응노는 귀국 후 힘든 투옥생활을 해야만 했다. 언제나 예술은 잔인하듯, 출소 후 이응노는 민중의 힘을 더 크게 느끼면서 그의 작품세계가 담고 있는 동양의 정신론은 한층 더 그 깊이가 깊어졌다. 1989년 민주화가 된 이후에서야 이응노의 개인전이 한국에서 최초로 개최되었다. 그간 군부독재의 낙인이 찍혀 출소 이후에도 이응노는 유럽에 거주하였는데, 마침내 그의 고국에서 갖는 첫 개인전으로, 영광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귀국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 비극적이게도 이응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결국 고국에서 열리는 그의 첫 개인전은 작가가 없는 상태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응노는 정통 동양화가이면서 한편으로는 누구도 따르기 힘든 현대적인 조형세계를 다양하게 추구했다. 그의 화풍은 프랑스로 건너가기 이전의 구상, 반추상의 구상화, 빠삐에꼴레(papier colle), 문자추상, 인간 시리즈 등으로 이어졌지만 그 작업의 기본은 종이에서 이루어졌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이응노가 이룩한 예술은 아직도 사회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으나 그는 지필묵의 달인이자 그것을 현대적 조형으로 끌어올린 우리의 귀중한 화가임에 틀림없다." - 미술사학자 유홍준
이응노의 생가에 세워진 '이응노의 집'이란 이름의 미술관에는 이응노의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지는 않다. 홍성의 '이응노의 집'보다는 대전에 있는 이응노미술관에 이응노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충청도에는 이응노와 관련한 여행지들이 있는데, 우선 이응노의 생가였던 홍성의 '이응노의 집'과 대전에 있는 이응노미술관과 더불어 충남 예산에 이응노와 그의 아내가 운영했던 수덕여관이 있다. 향후 대전과 예산을 다룰 때마다 이응노의 작품세계와 생애를 다각도로 다룰 예정이다.
두 번째로 소개하는, 홍성이 낳은 역사의 거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전쟁의 별이라고 할 수 있는 김좌진 장군이다. 홍성 갈산면에는 김좌진 장군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그 옆으로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방금 갔다 온 이응노의 생가가 말그대로 초가삼간의 작은 초가집이었어서 그런지 김좌진 장군의 생가가 확연하게 호화스러워 보인다. 김좌진 장군의 생가는 전형적인 양반가의 멋드러진 기와집이다. 김좌진은 매우 유복하게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선 말 세도정치기를 이끌며 막대한 권력과 재산을 누렸던 신 안동 김씨(장동 김씨)였다. 부정적인 이미지만 가득한 안동 김씨 집안에서 어떻게 이런 영웅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어릴 적 김좌진의 모습은 그가 태어난 가문과 달리 반골 중의 반골이었다. 부유하게 나고 자란 건 맞지만 김좌진은 15살 때 집안의 노비들을 전부 풀어주었고, 집안의 땅들을 소작농에게 아무런 대가나 값을 받지 않고 그냥 선물해주었다. 전근대적인 제도, 관례 등을 끔찍이도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18살 때 거대한 집 중 일부를 학교로 만들어 인근 마을의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근대식 교육을 제공하기도 했다. 학생 수가 100여 명에 달했다고 하니 홍성에서 꽤나 이름을 알리던 학교였던 것이다. 10대의 나이 때 그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나이 20대 초반 우리는 주권을 일제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김좌진은 망설임 없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당시 신민회 회원들이 서간도 지역에 독립군 양성을 위해 무관학교를 설립하려고 하자 김좌진은 경성으로 올라와 자금 확보 활동에 나섰다. (아마 이맘때쯤 김두한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밀고자로 인해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된 후 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출옥한 뒤 김좌진은 국내에선 독립운동을 이어가기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1918년 만주로 넘어가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였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국내 대구에서 허위, 박상진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비밀결사단체로, 독립운동단체 중 최초로 공화정을 지향하던 단체였다. 조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닌 공화정에 기반한 새로운 국가를 만들자는 기치였다. 대한광복회는 만주에도 지부를 두어 친일 부호를 습격하거나 해외에 독립군을 결성하기 위해 군자금과 무기들을 공수했다. 하지만 대한광복회는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할 무렵,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못한 채 1918년 조직이 발각되어 와해되고 말았다.
이후 김좌진이 몸을 담은 곳은 '대종교'라는 종교단체에서 조직했던 중광단이라는 조직이었다. 중광단은 북간도 지역에서 독립군부대를 양성하고 있었는데, 이때 김좌진을 장교로 초빙하였다. 다만 중광단의 상당수는 공화정이 아닌 고종 혹은 순종을 복귀시키자는 복벽주의를 지향했는데, 철저한 공화주의자였던 김좌진은 중광단 내 다른 공화주의자들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따로 조직하였다.
한편 봉오동 전투에서 패전한 일제는 만주에서 중국인 마적단을 매수하여 일본인을 살해하는 자작극을 펼치곤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본군 대병력을 만주로 도강시켰다. 그리고 일제는 만주의 중국 군경에게 만주 내 한국인 무장단체를 체포하라고 압박하였다. 중국 군경은 독립군 부대에 근거지를 옮겨 주면 굳이 추격하지는 않겠다는 제안을 했고, 만주의 독립군 부대들은 상대적으로 한인 거주 비율이 높았던 연길현이나 화룡현으로 모이고자 움직였다. 이즈음 북로군정서는 이동 준비를 하던 와중에 러시아 내전에 투입되었던 체코슬로바키아 부대로부터 각종 신식 무기를 값싸게 구입하면서 무기적 증강을 이루어냈다.
1920년 하반기에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거의 모든 독립군 부대들이 북간도 연길현과 화룡현으로 모여들었다. 이후 전개될 전쟁은 사실상 당시 모든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하여 일제 정규군과 벌이는 전쟁이 될 예정이었다. 일제 첩자들의 정보 기록에 의하면 당시 모였던 독립군 규모는 약 2,500명 정도였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5개의 사단 병력을 간도로 연이어 파견했다. 그 규모는 약 25,000명이었고, 작전명은 ‘간도지방 불령선인 토벌계획’이었다. 첩보들을 통해 화룡현 일대 독립군 부대의 동태를 파악한 일제는 곧바로 병력을 파병해 토벌 작전을 감행했다. 10월 21일 김좌진 장군과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250명이 백운평에서 일본군 추격대 90여 명을 급습하며 청산리 대첩의 서막을 올렸다.
다음 날인 22일 북로군정서는 현지 한인들로부터 천수평에 일제의 기병대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그들을 기습했다. 점차 일본군이 밀리는 상황에서 일본 측 예비대가 조금씩 투입되기 시작했고, 김좌진은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반격하며 점진적으로 후퇴했다. 이 퇴로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지원을 와주었고, 김좌진과 홍범도가 함께 전선을 지휘하며 어랑촌 야계골에서 이이노 대대와 결전을 치렀다. 어랑촌은 고지를 점령한 독립군과 밑에서 올라오는 일본군 대대와의 싸움이었다. 독립군의 군량미가 부족하다는 말이 전해지자, 현지 한인 부녀자들이 광주리를 이고 식량을 직접 조달했다. 어랑촌 전투 승리 후 독립군 부대는 23일부터 24일까지 맹가골, 천보산, 만기구, 쉬구 전투에서 모두 전과를 올렸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계곡 일대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 난전을 통틀어 청산리 대첩이라고 한다. 청산리 대첩의 피해 규모와 성과 역시 정확히 알지 못한다. 국적을불문하고 자료마다, 학자들마다, 참전했던 용사들마다 다 제각각이다. 하지만 청산리 대첩의 쾌거는 얼마나 많이 죽였는가에 있지 않다. 열악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압도적인 화력을 갖춘 일본 군인의 포위를 뚫어 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배경에는 독립군 부대가 보여 준 적극적인 유격 전술과 대대적인 매복 작전의 활용, 그리고 비전투 조선 민간인들의 목숨 건 지지가 있었다. 봉오동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준비하고 공격한 일제의 기를 우리 독립군이 확실하게 꺾어 버렸다는 점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전쟁에서 보여 준 독립군 연합부대의 합동작전은 가히 눈부신 활약이었다.
청산리 대첩 패전 후 조선인과 독립군 부대를 향한 일제의 보복심은 광기를 불러일으켰다.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간도 지역에서 27일간 일어난 만주 주둔 일본군의 민간인 무차별 학살을 ‘간도참변’, 혹은 ‘경신참변’이라 한다. 당시 약 3,400명 정도의 조선인이 희생당했다고 집계됐지만, 실제 사상자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살해당하지 않더라도 강간, 약탈, 방화 등 비인륜적 행위가 도처에서 벌어졌다. 간도참변으로 독립군 부대들은 더 이상 간도에서 훈련이나 군대 양성을 이어 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독립군 부대들은 전부 간도를 떠나 북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청산리 대첩에 참전했던 부대들은 물론, 참전하지 않았던 부대들까지 전부 중국과 러시아 국경 지대로 거처를 옮겼다.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간도국민회·대한신민회·의군부·혈성단·광복단·대한정의군정사 등 10개의 독립군 부대가 헤이룽장성의 밀산부에 이르렀을 때였다. 10개의 부대들이 모여 통합 부대 를 만들기로 합의하고, 1920년 12월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총재는 중광단 단장 출신이었던 서일, 부총재는 김좌진, 홍범도, 조성환이 맡았다. 여단장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서로군정서를 이끈 경험이 있는 지청천이 임명되었다. 그 규모는 약 3,500명 정도였다.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 내부 더 깊숙이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백군과 적군의 내전에 시달리고 있던 러시아의 코민테른 정부는 대한독립군단이 러시아로 들어와 코민테른 군대를 돕는다면 물질적 지원과 무기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이유가 숨어 있었다. 바로 독립군 중 한 세력인 고려공산당의 내분이었다. 고려공산당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나뉘어 있었고,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 코민테른 정부를 활용해 상해파를 약화시키고자 했다. 공산당 계열이 아닌 서일, 김좌진 등의 민족주의 계열 군 장교들은 당장의 물질적 지원이 시급했기에 러시아로 함께 북진했다. 대한독립군단이 러시아의 약속만을 믿고 지금의 달네레첸스크에 도착했을 때, 무장한 공산주의 조선인 단체들도 속속 이곳에 모여들었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러시아 측은 이 상황을 조선 사회 내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러시아가 대한독립군단에게 보급과 지원을 확실히 약속할테니 우선 무장을 해제하라고 요구하며 독립군 부대를 자유시까지 유인했다. 일본군을 자극하지 않아야 한다는 명분이었지만 대한독립군단 소속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약화시키려는 속셈이었다. 대한독립군단 내 비공산주의 장교들은 공산당끼리의 세력 다툼에 개입하지 않고 싶다며 무장 해제를 거부하며 서일, 김좌진 등의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에서 빠져나와 다시 만주로 남하했다. 러시아에 남아 있던 대한독립군단의 독립운동가들은 오늘날의 러시아 아무르주의 스보보도니에 해당하는 '자유시'까지 북진하는데, 이때 결국 독립운동가끼리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눈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고 말았다. 일찍이 러시아를 나와 다시 간도로 향했던 비공산주의 대한독립군단 세력들은 내려가는 길에 자유시 참변 소식을 들었다. 한때 생사고락을 함께 한 부하들이 무의미하게 죽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대한독립군단 서일 총재는 자결하고, 김좌진은 잔여 세력을 이끌며 무사히 간도로 돌아왔다.
김좌진과 부하들은 주로 목단강 혹은 영안 일대 등 북만주에서 세력을 회복하고 있었고, 현지 독립군 단체 혹은 무장단체들과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1925년 김좌진의 주도하에 대한독립군단 출신의 민족주의자들 약 200여 명이 모여 북만주 일대에 신민부를 결성했다. 위원장으로 북만주 일대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던 김혁이 선출되었다. 김좌진은 군사부 위원장 겸 총사령관이 되었다. 김좌진은 성동사관학교를 세우고 신민부의 군제를 5개의 대대와 1개의 별동대로 편제했다. 신민부는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표방했고 김좌진은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국내 진공 작전은 비록 실행되지 못했지만 신민부는 친일파를 피살하고 친일단체 여럿을 습격하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1930년 김좌진은 현 헤이룽장성 하이린시 산스진 다오난촌을 지나던 중 공산주의자에게 저격을 당해 암살되고 말았다. 범인은 '박상실'이란 사람으로 공산주의자였다는 것만 알 뿐 그의 개인적인 역사에 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많지 않다. 범행동기는 김좌진이 독립운동가 세력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멀리 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박상실의 김좌진 암살은 정확한 이유나 배경은 밝혀지지 않은 채 설만 무성하다. 김봉환이라는 공산주의자가 박상실에게 김좌진을 음해하여 박상실에게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과 박상실이 혼자서 벌인 일이라는 설, 김좌진이 사실은 친일파였다는 밀정의 무고로 박상실이 오해했다는 설 등 다양하다. 박상실은 이후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그 배후가 누구였는지는 진실 저 너머에 있다.
김좌진은 죽기 직전 이런 말을 남겼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지금 죽는 것이 한스럽다"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 끝에 찬 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는구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쓰러버릴 길 없고나
칼머리 바람이 센데
관산 달은
왜 밝은가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그리운 고국이여!
삼천리
무궁화동산에 왜적이 왼 말이냐
내 쉬임 없이 피 흘려 싸워
왜적을 물리치고
진정 임의 조국 찾고야 말 것이다.
- 김좌진 <단장지통>
홍성시내와 홍주성 공원, 이응노 화백의 생가를 거쳐 김좌진장군생가지까지. 사실 이 동선은 홍성역에서부터 남당항으로 오기까지의 동선이었다. 특정 누군가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인문기행은 어느 계절에 찾아도 큰 상관은 없지만 괜히 홍성의 여행은 봄철마다 찾게 되는 건 남당항에서 봄의 생명력을 먹기 위함이다. 봄이 되면 남당항은 새조개와 쭈꾸미를 어획하는 어부와 그것들을 파는 가게들과 그것들을 먹기 위해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서해로 나갈 수 있는 홍성 천수만변의 남당항엔 일찍이 새조개와 쭈꾸미로 샤브샤브를 해먹는 식문화 겸 관광상품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조개야 어디가서나 먹을 수 있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새조개의 경우 다르다. 새조개는 양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부 바다에서 직접 어획해올 수밖에 없는 자연산이다. 더군다나 새조개는 생육조건이 까다로워 그 맛이 좋을 수밖에 없으며 공급량이 풍부하진 않다. 회로도 먹을 수 있는 깨끗한 조개다. 물론 다른 항구에서도 새조개를 찾는다면 찾을 수 있겠지만 새조개를 가장 쉽고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맛볼 수 있는 곳은 남당항이다. 속살이 새의 부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 '새조개'는 조개라고 하기엔 그 크기가 굉장히 큰 편이라 씹는 맛이 아주 일품이다. 새조개의 산란기간이 2~3월이라 3월이 가장 살이 많이 오를 시기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작합'이란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다.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은 새조개다] 큰 것은 지름이 4~5치다. 껍데기는 두껍고 미끄럽다. 참새와 같은 색깔이고 무늬가 참새의 털과 비슷하여 참새가 변한 것 같다. 북쪽 지역에서는 천하게 여길 정도로 많지만 남쪽 지역에서는 희귀하다. 보통 껍데기가 양쪽으로 합쳐진 것을 '합'이라고 하는데 모두 진흙 속에 숨어 살고 알을 낳는다. - 정약전 <자산어보>
남당항의 또다른 맛은 쭈꾸미다. 우리 세대는 쭈꾸미를 철판에 강한 양념과 볶아 먹거나 치즈를 얹어 먹는 게 익숙하지만 본디 쭈꾸미는 샤브샤브로 먹는 게 쭈꾸미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쭈꾸미의 제철은 봄과 가을이다. 쭈꾸미의 살이 가장 오르는 시기는 가을이지만 봄철에 쭈꾸미가 알을 품고 있기 때문에 미식가라면 환장하는 쭈꾸미의 알까지 먹고 싶다면 봄에 쭈꾸미를 먹어야 한다. 쭈꾸미는 문어, 낙지처럼 다리가 8개이지만 크기가 문어와 낙지에 비해 더 작은 편이다. (낙지와 쭈꾸미의 가장 쉬운 구별법은 쭈꾸미는 낙지와 달리 몸통이 매우 크고 다리가 짧다는 신체적 특징이다) 더 작은 만큼 식감이 더 조직적이고 쫀득하여 식감만 따지고 보면 개인적으로 문어와 낙지보다 쭈꾸미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쭈꾸미는 타우린 함량이 많아 피로회복에 좋은 음식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준어'란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다.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은 죽금어다] 크기가 4~5치를 넘지 않는다. 생김새는 장어와 비슷하다. 다만 다리가 짧아서 겨우 몸길이의 반 정도만 차지한다. - 정약전 <자산어보>
남당항의 가게를 찾으면 대부분 새조개 샤브샤브와 쭈꾸미 샤브샤브를 따로 판매하고 있지만, 적당히 섞어달라하시면 쭈꾸미를 먼저 그리고 그 이후에 새조개를 내어주신다. 상다리 꺾어질 것만 같은 풍부한 해산물 반찬에, 각종 채소로 육수를 푹 고아낸 깔끔한 국물에, 쫄깃한 쭈꾸미와 새조개를 먹고 나야 홍성에 왔다고 할 수 있다!
둘째날 향하는 마지막 인문기행은 만해 한용운이 태어난 곳이다. 만해 한용운의 생가지는 남당항에서 다시 홍성 시내로 가는 길목에 있기에 동선상 편하기도 하다. 만해 한용운의 생가지에는 한용운이 나고 자란 초가집을 복원해두었고, 그 옆으로 만해의 일생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만해문학체험관이 조성되어 있다.
한용운은 몰락 양반 가문 집안 출신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하급공무원으로 동학농민운동 당시 진압관군에 소속되어 있었다고도 한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10대 후반이었던 한용운은 이미 사회와 국가가 대혼란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잘 자각하고 있었고, 어지러운 속세로부터 벗어나고자 들어간 곳이 설악산의 백담사였다. 처음엔 오세암이라는 작은 암자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불교교리를 공부했다. 1905년 대한제국은 굴욕적인 을사늑약을 강요받아 외교권이 박탈되는 등 대한제국의 미래가 사실상 정해져 있던 상황에서 부친이 의병들에게 살해되는 일까지 벌어지자 한용운은 다시 백담사로 찾아가 공식적으로 승려가 되었다. 한용운의 본명은 한정옥이며, 은사 승려에게 '용운'이라는 법명을 받고 '만해'를 법호로 정하였다. 백담사의 승려로 있으면서 한용운은 원론적인 불교경전에만 몰두하지 않고, 불교교리를 넘어서 다양한 근대사상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한용운은 종교계가 더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에 참가해야한다고 생각했고 기존의 사회참여적이지 못했던 불교계를 탄식했다. 만해 한용운은 당대 불교계의 타락상을 안타까워 하며 강력한 사회의식을 스스로 각성시켰다. 그리하여 만해 한용운은 사회로 나와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몰두했고 불교계의 개혁과 혁신을 주장하는 이른바 <조선불교유신론>을 1년 여만에 탈고하여 1910년 발표하였다.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만해 한용운은 더 강도높은 불교계의 친일행위를 경계하고 근대적 민중불교의 대중화를 꾀했다. 왕성한 종교활동으로 종교계는 물론 민족운동계에서도 만해 한용운은 이름을 알렸고, 1919년 종교계 대표들이 모인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여 3.1운동을 기획하기도 하였다. 3.1운동 당시 낭독되었던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이 바로 한용운의 작품이다. 3.1운동 때 투옥된 한용운은 몇 년 후 석방되고는 방향을 살짝 틀어 종교개혁운동보다는 문학활동에 전념하였다. 한용운은 다시 인제의 백담사로 들어가 약 88편의 시를 집필한 후 경성으로 돌아와 '회동서관'에서 시집을 출간하니 <<님의 침묵>>이다.
지난 '서울 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인제 편]'에서 불자로서 만해 한용운의 종교관 및 사상을 소개했다면, 이번엔 만해 한용운의 문학세계에 대해 주목해보고자 한다. 만해 한용운이 <<님의 침묵>>에서 보인 놀라운 표현법은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이어 두 번째 주자로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더욱 고양시켜주었다.
한용운의 가장 뛰어난 문학적 업적은 서정시를 만드는데 있어서 관념적인 개념들을 섬세하고 유려한 단어와 표현들로 즉물화했다는 것이다. 당장에 <님의 침묵>에 나오는 표현만 봐도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 ‘차디찬 티끌’, ‘날카로운 첫키스’, ‘연꽃 같은 발꿈치’,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등 형이상학적인 어려운 관념들은 이해하기도 쉽고, 감정적으로 느끼기에도 아름다운 단어들로 육체화 되고 있다. 황현산은 <<님의 침묵>> 속 시편들을 일컬어 “우리의 몸을 표현한 한 절대의 드라마를 현대시의 형식으로 기록한 최초의 한국어 텍스트”라고 평론했고, 오세영은 “비교적 관념적 표현이 배제되고 사물화된 언어로 표현한 <님의 침묵>과 <알 수 없어요>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라고 평했다.
그럼에도 한용운의 시세계에서 그의 특장 하나만 꼽으라면 역시 역설법일 것이다. 한용운의 시 속에서 예술성의 핵심은 어느 한 시인의 말마따나 ‘의미를 이루려는 충동과 의미를 이루지 않으려는 충동 사이의 긴장tension’에 있다. 한용운의 시에서 자주 쓰이는 논리적 어구와 역설적 표현이 가지는 시적 의미는 상반되는 두 개념의 팽팽한 긴장으로 인해 풍부해진다. ‘이별과 재회’, ‘떠날 때와 만날 때’, ‘님을 보낸 화자와 님을 보내지 않은 화자’, ‘복종과 자유’, ‘감각과 관념’, ‘물질의 자연과 형이상학적 임의 세계’, ‘나룻배와 행인’ 등 두 어구의 대립은 시 자체의 강렬한 에너지를 만든다. 한용운의 시 구절에는 부정형 어미가 많이 등장한다. 부정형 어미는 논리성을 암시한다. 한용운은 시라는 예술에 논리를 끌고 왔다. 논리적인 시는 예술성이 결여되기 마련인데 한용운은 역설법이라는 긴자을 통해 논리가 가지는 한계가 아니라 논리의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한용운의 시는 1차원적으로 보면 그리움이 주된 정서로 한 사랑의 서정시다. 대부분 그의 시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서한체 형식을 띄고 있다. 단 한용운은 의미가 모호하고 또 반대로 의미가 풍부한 '임'이라는 형이상학적 존재를 서정시로 끌고 왔다. 형이상학적 존재는 한용운 이전엔 전혀 시도되지 않았다. 시 속에 형이상학, 즉 理智의 개입은 ‘센티멘탈 로맨티시즘’이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당시에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용운은 시의 영역을 형이상학의 영역까지 확장시켰다. 서정주는 ‘한용운의 문학 의식은 문학을 철학·종교와 병행시켰다는데 있고, 재래 동양인의 문화의식과 일치한다’라고 표현했다. 시사에서 한용운이 가지는 의의를 ‘시의 영역을 사상사로까지 확장시킨 최초의 시인’으로 규정한다면, 시 속에서 理智를 반영한 사상시의 계보가 한용운의 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리얼리즘 근대시의 효시로도 인정받고 있다. 불교적 용어를 빌리자면 한용운은 중생의 구제를 위해 <<님의 침묵>>을 발간했다. 3·1운동 실패 이후 희망을 보지 못하고 절망적 정서가 지배하던 한국의 민중, 중생을 위해 한용운이 택한 방식이 시(詩)였다. 즉, 시집 <<님의 침묵>>은 목적성이 다분한 참여문학으로서 성격이 뚜렷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 선승, 불교사상가, 진보적 불교 개혁가,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 등등 만해 한용운에게 수많은 수식어가 붙듯이 그의 시도 여러 가지 방향으로 읽힌다. 그 자체로 한용운은 시라는 예술의 폭을 넓혔다. 비록 한용운을 시인이라고 규정지을 순 없지만 그가 한국시사에서 이룬 업적은 기념비적이다. 그러고보니 한용운의 삶 자체도 긴장의 구도라고 볼 수 있겠다.
홍성역으로 가기 전 홍성여행의 마무리로 홍성의 기념품을 사가기 위해 중간에 다른 곳을 들렀다. 홍성 최고의 기념품 시장은 두말할 것도 없이 광천의 토굴 젓갈시장이 아니겠는가! 마트에서 김을 구입하면서 가장 먼저 접했던 지역 '광천'. 도시화가 된 이후로 광천의 규모가 다른 도시들에 밀리게 되었지만 예전부터 여러 시장이 많았던 광천에는 상업으로 돈을 번 부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괜히 김 시장을 석권한 것이 아니다. 광천의 전통상업은 광천의 젓갈시장으로 이어져, 광천이 홍성에 편입되고는 '반드시 가봐야 하는 한국의 전통 시장'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광천의 젓갈은 독특하다. 바로 토굴에서 숙성시켜 탄생한 젓갈들을 내놓는다.
여러 종류의 새우들 중 젓갈에 사용하는 작은 새우 '젓새우'는 서해 바다에서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데, 그래서 서해안을 끼고 있는 해안도시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젓새우를 숙성시킨 새우젓갈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곤하였다. 다만 여름철 새우젓갈을 만드는 것이 곤혹이 아닌 곤혹이었다. 여름철 무더위로 인해 젓갈들이 쉽게 부패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산업화 이전에는 여름철에 새우젓갈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1954년 새우젓갈을 만들던 윤병원 씨가 1954년 광천에 남겨져 있던 일제강점기의 금광 폐광에 새우젓갈을 숙성시켜보았는데, 광산의 서늘한 온도 덕에 여름철에도 젓갈이 부패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자연적인 냉장시설을 발견한 것이다! 이후 새우젓갈을 만드는 상인들이 토굴을 만들어 토굴에서 새우젓갈을 숙성시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여름철에도 젓갈을 먹을 수 있는 광천의 젓갈시장을 찾으며 광천의 토굴새우젓이 유명세를 떨쳤다.
젓갈에 쓰이는 젓새우는 5월에 잡히는 오젓, 6월에 잡히는 육젓, 가을에 잡히는 추젓 등으로 분류되는데, 이중 가장 살이 토실토실한 육젓을 최고로 치긴 하지만, 오젓-육젓-추젓 모두 용도에 따라 다르게 쓰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가장 맛있다고 감히 단언해버릴 수는 없다. 광천토굴시장에는 새우젓 외에도 다양한 젓갈들을 판매하고 있다. 홍성의 광천토굴시장을 다녀온 뒤로 지금까지도 배달을 받고 있는 가게가 생겼을 정도로 광천토굴시장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역시나 젓갈이야말로 한식의 근본이지 싶다.
홍주성역사관에 들어갈 때 입구에 걸려있던 한 글귀가 참 인상적이었다. 천고낙지(天鼓落地)의 땅 홍주. 옛 홍성을 묘사하던 수사적 표현이 '천고낙지(天鼓落地)'였다고 한다. "하늘에서 북이 떨어지는 천혜의 명당"이란 뜻이다. 실제로 땅의 기운이 있다는 비과학적인 말을 절대적으로 믿는 편은 아니다. 사실 유명인사 배출하지 않은 땅이 어디 있으며, 홍성 출신의 역사적 거물들도 하나의 일관된 공통점이 있는 것도 아니라 각계각층의 다양하고 훌륭한 분이 있으니 말이다. 다만 홍성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홍성의 상징성과 의의가 결코 작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조선시대 홍성은 굉장히 큰 규모의 도시였다. 8도로 구성되어 있던 조선시대 행정구역은 그 아래로 행정구역단위가 등급화되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높은 단계의 행정구역단위는 '목'이었다. '목'에 파견되는 지방관을 '목사'라 불렀으며 품계가 부려 정3품이었다. 충청도에는 단 4개의 목이 있었고, 4개의 목은 충주, 청주, 공주, 그리고 홍주(옛 홍성)였다. 충청도를 책임지는 곳 중 하나였으며, 오늘날에는 충청남도청이 홍성의 내포신도시에 자리하여 충남의 행정적 중심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홍성의 내력과 역사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땅의 기운이라는 건 모르겠다만 어쨌든 이 정도 내공의 역사를 훑으니 대단한 역사적 거물들이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김좌진, 만해 한용운, 고암 이응노 세 사람을 소개하긴 했지만 세 사람 외에도 홍성 출신으로는 공민왕이 불교개혁을 위해 모셨던 보우 스님, 조선시대 사육신 중 한 명인 성삼문,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김사홍 대감의 모티프가 되었던 고종과 순종 황제의 스승 지산 김복한 등이 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한용운 <님의 침묵>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이자, 지사이자, 승려이자, 문학가인 만해 한용운의 유일 시집 <님의 침묵>입니다.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이지적이고 형이상학적이긴 하지만, 내용이 마냥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건 특유의 섬세한 감성이 아리따운 표현법으로 구체화되어 오롯이 독자에게 잘 전달되기 때문인 듯 싶습니다. 특히나 한용운이 자주 쓰는 역설적 표현은 작품의 깊이를 아주 심오하면서도 시격을 향상시켜주어 참 품위가 있는 시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어떻게 해석을 해도 다양하게 해석되는 풍부하고 입체적인 한용운의 시. 한용운은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시를 잘 쓰는 시인 중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한용운은 독자에게 남기는 말에서 자신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 코에 대이는 것'과 같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저 수사적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말로 저런 감정이 드는 시인지 직접 88편의 시를 읽어보시고 느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벼랑 위의 포뇨>
지브리 스튜디오의 16번째 장편애니메이션이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10번째 장편애니메이션입니다. 인간은 바다에 대해 아름답다고 여기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감정을 모두 갖고 있다고 봅니다. <벼랑 위의 포뇨>는 바다에 대한 이러한 인간의 양가적 감정을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톤으로 만들어낸 영화입니다. 잔잔하고 태양빛을 반사시키는 시적인 바다와 거친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대자연으로서 바다가 '포뇨'라는 캐릭터로 상징화되는데, 천재적인 애니메이션 아티스트가 '포뇨'라는 캐릭터로 자연과 인간의 순정어린 관계를 승화하는 방식이 훈훈하고,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가 딱 창작자의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적확한 표현방식이었다고 느껴지죠. 남당항에서 비단 같이 수려한 바다를 보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고, 소략하고 부드러운 파도소리를 듣고, 맛있는 제철 해산물 샤브샤브를 먹은 뒤, 이 영화로 바다를 완성하심이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