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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Jul 02. 2024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안동 편]

계승되는 전통을 여행하다




















집념과 집착의 차이는 무엇일까? 명확하게 구분짓기 어렵지만 어감상 한쪽은 긍정적으로, 다른 한쪽은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내가 고집을 부리는 과정과 결과가 나에게 뜻깊었다면 집념이고, 나를 포함 타인에게까지 상처를 주게 된다면 집착이 되는 걸까? 


역사적으로 전승되어오는 우리나라의 여러 전통문화 중에 가장 낡은 것으로 인지되어 타파되어야 할 무언가로 분류되는 것이 성리학적 유교질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까운 역사였던 조선은 500년 내내 성리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아 절대화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성리학은 천의무봉하고 완전무결한 원리이자 질서이기에 조금이라도 성리학 질서에 흠을 가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면 사회로부터 파문받아왔다. 본디 사상과 이념은 경계를 허물줄 알아 다양한 외부의 것들을 수용하면서 자기발전을 꾀해야 한다. 다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조선을 망친 건 그 성리학에 대한 과한 집착 때문이었다고도 말한다. 


우리나라의 도시들 중에 유독 고집스러운 곳이 있다. 바로 경북의 안동이다. 사대부와 선비의 정신이 응집되어 서려 있는 곳이다. 원래 경북 지역에서 우리나라의 성리학이 태어나고 자라고 개발되어왔다. 그중에서도 안동이 그 중심이 되는 것은 조선시대 명문 사대부가문들이 안동에 많이 몰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안동의 문화와 전통은 우리 한국 전체의 문화 속에 있으면서도 안동만의 문화를 같이 공유해왔다. 문화의 패러다임은 바뀌기 마련이건만 안동의 문화는 고집스러움을 추구했다. 이것이 조선시대에만 국한된 줄 알았거만, 정말 풍수지리의 기운이 있는 것인지, 아주 예전부터 안동의 고집스러움은 마치 전통처럼 내려왔다.


안동의 옛 이름은 고창. 후삼국 통일전쟁 당시 고려의 태조 왕건이 929년 견훤의 후백제군을 고창에서 무찌르고, 한반도의 동쪽을 안정화시켰다고 해서 지명을 '안동'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안정 위에 견고한 뿌리 박은 안동은 어떤 문화를 어떻게 고집해왔을까.



안동의 자존심, 안동소주

안동을 여행가기로 마음 먹은 날부터 서울에서 안동으로 가기까지 날 가장 설레게 했던 것은 안동소주였다. 20대 초반 학과 답사 때 선배들이 억지로 먹여 처음으로 맛 봤던 안동소주는 영 반갑지 않았지만, 언젠가 다시 먹고 나니 위스키에 흡사한 기품을 내는 맛에 흠뻑 빠져버리고 말았다. 우리나라 술의 고급짐을 이야기한다면 단언 안동소주가 아니겠는가. 안동소주전통음식박물관을 찾으면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인지라 무겁지 않게 안동소주에 관한 이모저모를 살필 수 있고, 박물관과 붙어있는 양조장에서 거의 모든 종류의 안동소주를 구매해갈 수도 있다. 가격비교를 해본 적은 없어서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도매가 아니라 소매로 구입하니 조금은 저렴하게 구입했던 게 아닐까 한다!

아무리 저렴하게 안동소주를 구입한다고 해도 안동소주에 대해 무지하다면, 아니 우리 전통증류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면 '그냥 도수만 높은 소주인데 왜 이렇게 비싸?!' 하고 볼멘소리로 투덜대는 사람들도 있다. 우선 우리가 시중에서 쉽게 사서 마시는 소주는 엄밀히 말해서 소주가 아니다. 소주는 증류주를 일컬으며, 시중의 소주는 증류한 술이 아니라 희석한 소주이기 때문에 사전적으로 '소주'라고 볼 수 없다. 역사적으로 (증류한) 소주는 쉽게 먹을 수 없는, 아주 값비싼 고급 술이었다. 


우리의 전통주는 크게 탁주와 청주가 있다. 곡물을 누룩으로 발효시켜서 첫 술을 만들면 탁주가 만들어진다. 바로 막걸리다. 탁주는 술지게미가 섞여 있기 때문에 탁할 수밖에 없고, 비교적 빠르고 간편하게 만들 수 있어서 서민들과 가장 가까웠던 술이었다. 탁주에서 '용수'라는 도구로 술지게미를 제거해 깨끗하고 맑은 술을 만들어내면 바로 청주가 된다. 용수로 술지게미를 걸러내는 일이 아주 정성스럽고 고된 작업이기에 탁주보다 비쌀 수밖에 없었고, 유교문화권인 우리나라의 역사에선 주로 제사용으로 사용했다. 청주도 발효를 몇 차례를 하느냐에 따라 격이 달라졌다. 가장 초보적으로는 1번만 걸러냈지만 일반적으로는 2번을 걸러내는 이양주가 보편적이다. 우리나라 전통주 중에서도 3번이나 걸러내는 삼양주들이 종종 있는데, 당연하게도 3번이나 걸러내면 손과 품이 많이 들어가기에 빚는 난이도가 상당하다. 이렇게 탁주와 청주만이 우리 한국의 전통주였는데, 고려 말 원나라를 통해 획기적인 주조 방식이 전해지니 바로 증류법이었다. 


증류주란 일반 술을 증류도구에 넣고 팔팔 끓여 기화시킨 뒤 다시 액화시켜 얻어낸 도수가 높은 술을 의미한다. 증류주는 이슬람 아랍 문화권에서 처음 개발되었고, 이 증류법이 몽골의 원나라를 통해 고려에 소개되었다. 증류법을 알게 된 우리 한국인들은 청주를 증류하기 시작했다. '소줏거리'라는 증류도구에 청주를 팔팔 끓이면 기화된 술이 소줏거리 천장에 붙는다. 이때 소줏고리 맨 위에는 차가운 물을 올려놓기에 기화된 술이 찬물과의 화학작용을 통해 증류된다. 이렇게 증류된 증류주가 소주다. 아주 고되고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고 수고로운 작업이다. 하지만 증류주의 고급진 기품은 그렇지 않은 술과는 천지차이가 난다. 그래서 옛 방식으로 만든 증류주는 약효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소주의 역사가 시작했는데, 왜 하필 안동이 소주로 이름을 알렸을까?


소줏고리

소주가 탄생한 곳은 개성, 제주, 안동이었다. 세 도시 모두 몽골의 원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들이었다. 우선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던 만큼 가장 많은 몽골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제주도는 원나라가 고려 내 반몽골 저항운동을 벌이던 삼별초를 진압했던 곳이자 일본원정 당시 사용했던 전진기지였으며 일본원정 이후로는 목마장을 경영했었다. 그렇다면 안동은 왜? 고려는 25대 충렬왕부터 본격적으로 원나라의 내정간섭을 받았던 원 간섭기가 시작했다. 원나라는 고려와의 우호동맹을 위해 원나라 황실의 공주를 고려의 왕과 혼인시켜 고려의 왕비로 두었다. 그 첫 몽골인 왕비는 충렬왕의 아내였던 제국대장공주였다. 이때 충렬왕인 일종의 혼수 개념으로 제국대장공주에게 안동 지역을 그녀의 탕목읍으로 선물해주었다. 탕목읍이란 사전적 의미론 왕비의 목욕비용을 부담하는 마을을 말하는데, 실질적인 의미는 왕실 여성에게 세금을 납부해야할 의무를 지닌 마을을 말한다. 탕목읍으로서 안동은 제국대장공주의 며느리인 계국대장공주에게로 이어졌고, 고려에 와 있던 몽골인 황실 여성들은 안동을 각별하게 여겼다. 그 과정에서 증류주가 안동에도 퍼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로 넘어가면 안동은 명문 사대부 가문들이 모여 살던 격식과 학식을 겸비한 마을이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제사에 쓰이는 술에서만큼은 아끼지 않았던 사대부들은 마을에서 양조할 수 있는 가장 고급스러운 술을 제사 술로 사용했다. 그리고 안동에서는 소주가 제사 술이 되었다. 증류식 소주는 당대 가장 값비싼 술이었고, 안동에는 명문 사대부 가문들이 있었기에 그 값비싼 술을 감당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가양주의 형태로 자리 잡은 안동소주는 어느덧 안동 사대부들의 자존심이 되어 대대로 전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일제의 무분별한 사케 도입으로 안동소주는 존폐의 위기에 처했다. 해방이 되어 이제 안동소주를 마음놓고 만들어 먹을 수 있겠다는 안도감도 잠시. 1962년 쌀 부족 현상을 타파하기 위한 정부의 양곡관리법으로 인해 더 이상 쌀로 술을 빚어먹을 수 없게 되었다. 쌀로 술을 빚지 말라니! 금주법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다른 유서 깊은 전통주들처럼 안동소주는 안동 내 일부 가문들에서 몰래몰래 전수되고 있었다.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1988년 올림픽을 거치며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안동소주도 부활할 수 있었다. 안동소주를 복원시킨 주인공은 바로 조옥화 선생이었다. 조옥화 선생은 시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안동소주 제조법을 기억해내어 안동소주의 명맥을 이었고, 식품명인으로 지정되었다. 조옥화 선생 외에 식품명인으로 지정된 분은 박재서 선생이 있으며, 안동에서는 두 명인 외에도 6개의 업체에서 안동소주를 만들고 있다.



안동의 맛 ① 안동국시

안동이 자부심을 갖는 그들의 고유 문화 중 안동의 음식 문화가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안동의 여행을 식도락 여행으로 테마를 잡아도 될 만큼 안동을 대표하는 음식들은 아주 많아서 1박 2일의 여행으로도 안동의 맛을 모두 경험하고 오지 못할 정도다. 그 첫번째로 소개할 안동의 맛은 나의 첫날 점심인 안동국시다. 국시는 국수의 남부지방 사투리다. 국수는 너무나도 흔한 음식이지만 '국시'라는 방언을 쓰니 괜히 무언가 특별한 것만 같은 어감이 산다. 국수는 우리 조상들의 아주 오래된 면요리로, 시대를 불문하고 그리고 장소도 불문한 보편적인 음식인데, 왜 하필 안동이 또 국수로 이름을 알렸을까? 아주 단순하다. 맛있기 때문이다. 


국수가 어디에서나 먹었던 음식이었지만, 어디에서나 먹는 음식으 늘 그렇듯 지방별 향토 차이에 따라 만들어 먹는 방식이 조금씩 달랐다. 그중에서 가장 맛있는 안동의 국수가, 아니 안동의 국시가 맛에서 1순위를 차지했을 뿐이다. 뭐가 그렇게 맛있길래? 안동국시는 양으로 승부했다. 안동에서 먹는 국시는 서민들이 가볍게 먹는 음식과 사대부 가문에서 지체 높으신 양반 분들이 먹던 음식으로 구분이 됐다. 지배층이든 피지배층이든 안동에서 만들어지기만 하면 안동국시라고 해도 사전적으로 틀리진 않지만, 일반적으로 안동국시라 함은 사대부 가에서 양반들이 해먹던 고급 국수를 가리킨다. 양반들도 일상적으로 먹던 국시 말고 제사나 혼례 등 집안행사가 있는 특별한 날, 특별한 기분을 내기 위해 돈을 아껴지 않아 가면서 정성드려 차린 국수가 안동국시였다. 안동국시는 면발의 두께가 얇은 게 특징이며 일반 국수와 달리 콩가루를 넣기도 하고, 육수를 내기 위해 고급 재료들을 아끼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안동국시 육수의 비결은 은어로 우린 육수다. 고명 또한 푸짐하게 내놓는다. 


이처럼 안동국시는 일반국수와 달리 고급 음식이었고 선망과 동경의 음식이었다. 푸짐함으로 승부를 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도, 부러움을 살 수도 있었다. 참 좋은 세상에 태어났다. 옛날에 태어났으면 안동국시를 구경도 못해볼 신분이었을지 어떻게 아는가.. 안동국시로 가장 유명한 식당은 안동의 시내 옥동에 있는 옥동손국수다. 미식에 통달하지 못해 은어로 내린 육수의 맛이 어떻고, 서울에서 먹는 국수와 본질적인 차이까지 아주 디테일하게 내 혀가 잡아내지 못하지만, 그 푸짐함 만큼은 입이 벌어질 정도이니 다들 배를 비우고 방문하기를 바란다!




우리네 아름다움 옆에 아름다움, 병산서원

점심을 해결하고 이제 안동 시내를 나와 안동의 서쪽 병산으로 향한다. 안동에는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서원이 두 군데나 있다. 그중 하나가 병산서원이다. 서원이라 함은 성리학의 사학을 담당했던 지방의 사립교육기관으로 특정 향촌사회의 사대부들 내지 선비들이 관리하며 성리학을 풍성하게 발전시키고, 유능한 학자들과 정치인들을 배출해내며, 성현에 대한 제사도 지내며 전통문화를 계승해가는 등 해당 지역의 여론을 모아 공론화도 시키며 사회적 역할도 수행해나갔던 다기능의 공공시설이었다. 이토록 중요한 곳이었기에 비록 사립운영이여도 국가에선 그 혜택을 많이 봐주었고 시간이 흘러 정치권이 부패해지면서 서원의 본질이 퇴색되어버리긴 했다. 하여 조선 말 흥선대원군은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조리 철폐해버리니, 이때 문을 닫은 서원의 수가 1000개가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상을 본질로 착각해선 안 된다고, 서원의 변질은 어디까지나 부패한 사회상으로 인해 훼손되었을 뿐 서원 그 자체의 원목적과 원취지까지 부정해버리기엔 서원의 가치는 대단히 소중한 자산이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았는지 한국의 서원들 중 대표적인 9개의 서원이 '교육을 통해 이상적 인간상을 만드려는 인류사적 보편성과 그 역사적 완전성과 진정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다. 9개의 서원 중 나의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에서는 영주의 소수서원, 논산의 돈암서원, 대구의 도동서원을 다룬 바 있다.


병산서원은 이순신의 친구로 유명한 서애 류성룡이 만든 서원이며, 서애 류성룡 사후에는 그 제자들과 후손들이 서애 류성룡을 모시는 서원이다.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은 험하다. 처음 병산서원을 방문했을 때 이토록 유명한 서원임에도 가는 길이 비포장도로인 걸 보고는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병산서원 주차장에 내려 병산서원까지 걸어가는 길에서 공업화의 손길이 조금이나마 최소화된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낀다. 병산서원은 내가 알고 있는 서원들 중 가장 경치가 수려하고 빼어난 서원이다. 주차장에서 서원까지 이처럼 기분좋은 길이 또 없다. 인적보다는 적요한 신록의 정지된 이미지와 단아한 낙동강의 작은 움직임은 아주 산뜻한 정중동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그 기분좋은 산뜻함을 소슬하게 만끽하다 보면 병산서원에 다다른다. 병산서원에 다다랐음에도 이 산뜻한 기분을 제공해주는 풍경에 등돌려 병산서원으로 들어가기가 아쉬울 정도다. 하지만 걱정 마라, 병산서원으로 들어가면 그 산뜻함은 극대화가 될 예정이니!

병산서원의 길

병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아주 좁다. 좁은 문을 지나고 나면 또 다시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계단 위의 풍경은 '만대루'라는 거대한 누각의 정면이 시야를 차단하고 있다. 만대루를 지나면 서원의 메인건물이자 학생들의 강학 공간 강당이 나온다. 그리고 뒤를 돌아 만대루의 뒷모습을 보면 병산서원의 진면목을 마주하게 된다. 병산서원의 아름다움이 온몸을 휘젓고 가는 나머지 그대로 강당의 툇마루에 앉아 넋놓고 만대루와 만대루 앞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하게 된다. 서원의 규모 자체는 그렇게 커보이진 않지만, 양옆으로 날개를 피듯 펼쳐진 만대루의 장대함은 감상자의 가슴을 뻥 뚫어버린다. 시원하다. 병산서원에서 만대루를 바라본 내 첫 느낌은 그것이었다. 역시 서원을 비롯한 사찰까지 한국건축의 멋을 제대로 느끼려면 건축물 자체를 보지 말고, 건축물의 시선으로 건축물이 바라보고 있는 풍경을 바라봐야 한다. 아닌게 아니라 병산서원의 만대루는 한국건축의 미학은 상징하고 있다. 우리 한국건축의 미학은 위엄을 과시하는 건축물이 아니라 공간에 있다. 공간 안에 있는 자가 그가 서 있는 곳의 장소성을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인지하게 해준다. 병산서원은 병산서원만 있어서 위대한 것이 아니다. 낙동강이 잔잔하게 굽이치는 하천에, 작은 백사장 위에, 잘생긴 회백색의 절벽과 푸릇한 녹색의 색감 조화를 감상할 수 있는 자연과 어우러져 있기에 그 가치를 띠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한히 펼쳐진 자연 속에서도 병산서원에서 보이는 그 자연의 순간에 우리 고건축이 있음으로 해서 감상자의 미학적, 예술적 의미가 부여된다. 그런 의미에서 병산서원은 있는듯 없는듯 자연 속에서 감취를 숨기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존재감이 강하다. 아니 공간의 존재감을 강화해준다. 이것이 고 최순우 선생님이 말씀하신 우리 조상들은 어디에 우리의 건축을 점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병산서원의 만대루



병산서원을 우리나라 내로라하는 다른 서원과 비교해보면,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하지 못하며, 회재 이언적의 안강 옥산서원은 계류에 앉은 자리는 빼어나나 서원의 터가 좁아 공간운영에 활기가 없고, 남명 조식의 덕천서원은 지리산 덕천강의 깊고 호쾌한 기상이 서렸지만 건물배치 간격이 넓어 허전한 데가 있으며, 한훤당 김굉필의 현풍 도동서원은 공간배치와 스케일은 탁월하나 누마루의 건축적 운용이 병산서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흠이 있다.

이에 비하여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흔연히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것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애 류성룡은 조선의 중후기 '남인'이라는 붕당을 이끌었던 남인의 당수였다. 남인은 주로 영남지방의 출신들로 퇴계 이황의 학풍을 이은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서애 류성룡 역시 퇴계 이황의 제자였으며, 단순한 제자를 넘어 퇴계 이황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다. 류성룡의 출생지도 경상북도 의성이었다. 이후 퇴계를 찾아가 퇴계의 제자가 되었는데, 류성룡이 퇴계의 제자였던 시절 그는 한번 본 것은 절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단순히 기억력이 좋은 수준이 아니라 스쳐지나가는 문장 역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암기력이 대단했다고 하니 퇴계의 총애를 듬뿍 받았던 것이다. 이후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사를 왔는데, 이때 동네 친구로 친해졌던 사람이 이순신 형제였다. 


류성룡이 관직으로 나아갈 때쯤 조선의 조정은 서인과 동인이라는 붕당으로 나뉘었다. 당쟁을 원치 않았던 류성룡이었지만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동인을 이루었기에 류성룡도 동인으로 분류되었다. 조선의 국왕이었던 선조는 그가 신임했던 율곡 이이의 죽음 이후 그나마 율곡 이이만큼 의지했던 사람이 류성룡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 서인의 핵심 인물이었던 정철이 선조의 심기를 건드려 서인이 와해될 뻔 한 적이 있었는데, 동인 내에서 서인에 대해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는 입장과 온건하게 나가야 한다는 입장으로 나뉘었고, 끝내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분류되었다. 이때 류성룡은 서인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하던 세력들을 대표하던 남인의 당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이라는 전운이 한창 감돌던 시절에, 비록 그와 같은 붕당의 대신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주장했지만 류성룡은 선조에게 국방의 게을름을 경계하라 충언하였고, 그의 추천에 따라 이순신이 파격승진을 해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다.


병산서원


임진왜란이 터지고 선조가 백성들을 버린 채 수도 한양을 탈출할 때, 가장 마지막까지 한양에 머무르던 사람도 류성룡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굳게 주장했던 선조였기에 막상 전쟁이 터지니 책임을 떠맡을 사람들이 필요했고, 그 책임을 물어 남인의 당수였던 류성룡은 파직되었다. 하지만 류성룡에 대한 선조의 총애가 남달랐던 만큼 류성룡은 금세 복귀하였으며, 오히려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다. 

류성룡 표준영정

명나라 원군이 조선으로 들어오자 류성룡은 조명연합군 내에서 조선 측의 대표로 있으면서 평양성 전투를 지휘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이 시기를 그냥 보내기 싫었던 류성룡은 선조를 부추겨 군사개혁을 단행했으니, 한국사 최초로 조총부대를 정규군화했던 훈련도감이란 부대가 바로 류성룡의 작품이었다. 비록 류성룡 대에 바로 시행되지 않고, 한참 이후에 다른 사람, 다른 정권에서 시행되었지만 류성룡은 대동법의 전신이 되는 수미법을 주장하기도 했다.


본디 영남지방의 출신들로 보수적인 성리학의 학문적 원칙을 주장했던 동인이었고, 다소 현실적인 감각을 깨우친 서인이었지만 류성룡은 양측의 좋은 기능을 모두 흡수한 인재 중의 인재였다. 류성룡이 없었으면 이순신도 없었고, 조선의 미래는 한층 더 어두워졌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정계에는 신물이 나버린 류성룡은 사퇴 후 안동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류성룡은 임진왜란 7년의 역사를 기록을 남기게 되니 바로 지금까지도 읽히는 불후의 명작이자 임진왜란 연구의 주요한 사료가 되는 <징비록>이었다. 그리고 <징비록>을 완성한 곳이 병산서원이었다.



하회마을, 굽어 휘어돌아가는 위로

병산서원에서 낙동강을 따라 가다보면 아주 가까이에 안동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하회마을이 있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도 지정된 우리 한국의 민속마을 중 가장 전통이 잘 복원되어 이어지는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다. 서애 류성룡도 풍산 류씨로, 어렸을 적 퇴계로부터 수학했을 때도 하회마을에서 지냈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낙향했을 때도 하회마을로 돌아왔다가 <징비록> 저술과 서당을 운영하기 위해 하회마을 옆에 차린 것이 병산서원이었다. 


하회마을 가는 길


하회마을 주차장에서 내리면 표를 끊은 후 하회마을 내부로 들어가는 셔틀버스를 타야 한다. 걸어가도 좋지만 하회마을에서 많이 걸어다닐 걸 생각하면 체력을 아껴두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셔틀버스를 타고 하회마을 입구에 내리면 거대한 지도 표지판이 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돌아다니며 구경해야할지 막막할 것이다. 하회마을의 초보자이든 나름 몇 번 왔던 고수이든 나는 하회마을 관광객에겐 관람소형차를 탈 것을 적극 추천한다. 하회마을에는 주민 몇 분이 몇 푼 안 되는 돈을 받고 관람소형차를 운영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입구에 차량들이 즐비해있고, 없으면 표지판에 적힌 번호로 연락을 드리면 금세 오셔서 구석구석 하회마을을 구경시켜주신다.


하회마을은 단순한 마을이다. 조목조목 살펴보면 그다지 특별함을 예탄할 만한 것들이 없다. 하지만 일상의 편안함이 있다. 안동의 하회마을이나 경주의 양동마을처럼 규모가 큰 상태로 보존되어 전해지는 민속마을들은 안온한 아우라가 있다. 이는 인위적으로 만든 민속촌에서 절대 느낄 수 없다. 그 차이는 바로 실제 사람들의 거주 유무다. 인간이 만든 아름다움은 결국 인간의 손길이 있어야지, 아름다움을 훼손하면 안 된다는 명분으로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거리감을 조성한다면 이는 방치일 뿐이다. 그래서 실제 사람들이 거주하는 민속마을들은 인간적인 체취가 있고, 규모가 크면 클수록 인간적인 체취가 줄어드는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민속마을은 규모가 크면 클수록 더 안온해지고 더 편안해지고 더 인간적인 아우라가 풍긴다. 유서 깊은 사대부 명문가문들이 대대로 살던 마을이라 해도 대저택들도 하나 같이 조용하고 젠체하지 않는다. 적당한 높이의 돌담, 자태를 뽐내는 기와지붕, 그리고 각종 나무와 흙과 꽃과 새와 풀과 강이 있을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만들어주는 스카이라인은 내 모든 긴장들을 이완시켜준다. 여기에 맑은 하늘, 구름들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사람 사는 냄새. 이것이 인간이 만든 예술에 보낼 수 있는 최고의 극찬이 아닐까. 궁궐건축이 아닌 전통한옥 건축으로서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에 안동의 하회마을이 역시 제격이다.



셔틀버스를 타고 다시 주차장 구역으로 돌아오면 인근에 하회세계탈박물관이 있어 세계의 다양한 탈들을 소개하면서 안동이 낳은 또 다른 전통문화인 하회탈을 소개하고 있다. 유구한 내력을 갖춘 하회마을인 만큼 하회마을에서 비롯한 우리의 민속문화들이 있다. 하회마을을 넘어 우리 한국전통의 얼굴을 외국인에게 소개한다면 나는 신라의 얼굴무늬 기와나 안동의 하회탈을 꼽고 싶다. 하회탈은 현존하는 탈 중에서 가장 오래된 탈가면으로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국보 121호에 지정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가장 먼저 떠올리는 하회탈의 얼굴은 하회탈의 종류 중 양반을 상징하는 탈이다. 하회탈은 한 가지 가면이 아니라 안동 하회마을에서 탄생한 가면의 총칭으로 양반 뿐 아니라 각시, 선비, 백정, 중, 할미, 초랭이 등 역할에 따라 얼굴들이 다양하다. 타 지역의 탈가면처럼 익살스럽게 과장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하회탈만의 특징이라면 종이로 만든 타지역의 가면과 달리 안동의 하회탈은 나무로 만들었다. 종이로 제작한 것이 아니라 나무로 조각한 것이다 보니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을 뿐더러 턱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 탈놀이 시 가면이 실제로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 배우들의 생동감을 살렸다. 


이렇게 만든 하회탈은 매년 정월에 안동에서 개최되었던 하회별신굿탈놀이에서 사용되었다. (별신굿이란 별나고 특별한 굿이란 뜻이다.) 우리의 민속놀이들은 지배층을 타게팅한 놀이와 민중을 타게팅한 놀이로 구분되는데,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 양주 편'에서 소개했던 산대놀이가 지배층을 타게팅한 대표적인 민속놀이다. 반면 하회별신굿탈놀이를 포함해 탈춤은 주로 민중지향적인 놀이로, 양반에 대한 비판과 세태에 대한 풍자의 강도가 훨씬 셌다. 그리고 그 탈춤 중에서도 비판과 풍자의 강도가 가장 익살스럽고 과장되었던 놀이가 안동의 하회별신굿탈놀이였다. 양반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에서 양반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가장 높은 탈놀이가 성행했다는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어찌 보면 지배층들 입장에선 연희거리로라도 민중들의 해방감을 보장해주었던 타협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다른 시각에서 해석한다면 하회별신굿탈놀이를 통해서 민중 공동체의 결속력을 더 다질 수 있었고 이것이 양반들이 원했던 안동의 질서 유지에 기여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산대놀이와 달리 탈춤은 '굿'이 있다. 별신'굿'이기 때문에 단순한 마당극을 넘어 무당의 굿판까지 벌어지면서 마을의 액운을 막아주고 공동체의식을 한데 모아주는 제의적 성격도 있었으니 말이다. 탈춤은 선비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파계승들에 대한 비판도 반드시 들어간다. 이는 사회현실을 도외시하고 고상한 정신성만 강조하는 유교와 불교가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민중들의 날카로운 지적으로 해석한다.



오늘날에는 왜 우리네 민속마당놀이, 탈춤이든 산대놀이든 옛날만큼 인기를 얻지 못할까?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라 어리석은 질문 같아 보일 수도 있다. 거대한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과 각종 무대효과를 받는 현대무대예술에 비해 우리의 민속마당놀이는 흥겨울 순 있어도 조악하고 다소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더 근본적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의 민속마당놀이를 해방의 창구였다. 신분제적 억압 속에서 유일하게 억압감을 속 시원하게 해방감을 누릴 수 있었다. 다만 현재 우리는 신분제에서 자유롭고 계급에서 오는 억압감이 조선시대보다는 덜하다. 그리고 우리는 답답한 선비나 타락한 파계승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현재의 우리는 민속마당놀이의 근본적 즐거움에 공감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대신 현대의 무대예술은 현대인들의 다른 이유에서 오는 억압감에 대한 다른 방식의 해방 차원에서 더 발달하고 있다. 위대하고 대중적인 예술은 억압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나 보다. 예술은 참 잔인하다.


하회마을에서 차를 타고 강 건너 돌아간다면 '부용대'라고 하회마을을 굽어볼 수 있는 조망소가 있어서, 하회마을 관람의 구두점을 찍는 필수코스가 되고 있다. 부용대는 태백산맥의 마지막 끝자락이라고 한다. 부용대에서 하회마을을 굽어보면 왜 마을 이름이 '하회'인지 알게 된다. 굽이 도는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감싸고 있기에 '하회'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안동 편을 읽다가 하회마을에 관한 인상적인 정보를 하나 알게 됐다. 여름철 강수량이 유독 많은 대한민국에서 장마철만 됐다 하면 온 곳에서 홍수의 피해에 앓건만, 하회마을은 1925년 대홍수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단 한번도 홍수 피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곧게 뻗은 강에선 언제나 물난리가 나는데, 하회마을을 감싸는 낙동강과 같이 굽어서 휘어돌아가는 강에선 물이 잘 넘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빠르게 직선으로 달리는 것보다 시간은 걸리더라도 우회하고 여러 장애물을 거쳐 꺾이는 것이 더 단단하고 안전하다는 혼자만의 위로를 받아본다.




안동의 맛 ② 숯불갈비

두번째로 소개할 안동의 맛은 첫째날 저녁이 될 안동의 소갈비다. 누군가 나에게 경북 여행을 가서 무엇을 먹고 와야 한다고 묻는다면 두말 없이 소요리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예부터 소백산맥에서 소 목축이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에 경북지역은 소 요리가 발달해 있다. 따라서 경북 지역 여행을 가서 소 요리를 먹고 오지 않는다면 경북을 다녀왔다고 할 수 없다! 안동에는 소 요리로 유명한 가게들이 참 많다. 그중에서도 안동은 숯불로 구운 소갈비로 이름을 알렸다. 안동 시내에는 30여 년 전부터 갈비골목이 만들어져 오늘날에는 안동의 필수코스가 되고 있다. 현재 안동의 갈비골목에는 약 15곳의 갈비집이 늘어서 있지만, 나는 '거창숯불갈비' 식당을 가장 좋아한다. 이미 숯불이 들어오면서 설렘으로 가득하고, 고기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언뜻 봐도 고기의 선명한 색감이 선도가 훌륭한 고기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숯불에 지글지글 구워지는 소리, 향긋한 냄새. 생갈비는 생갈비만의 담백함이, 양념갈비는 양념갈비만의 달짝지근함이 얹어지며 두 고기 모두 적당한 느끼함에 입에서 부드럽게 부서지며 녹아내린다. 안동의 갈비골목 가게들 사이에선 또 독특한 상차림이 있는데, 매운갈비찜이 서비스로 나온다는 거다. 한 점 한 점 고기를 먹다가 자칫 고기의 느끼함이 느껴진다면 그때 매운갈비찜 한 숟가락 뜨면 이만한 궁합이 없다. 이 조합에 대체 어떻게 술을 그냥 빼고 갈쏘냐. 기분탓일진 몰라도 안동 소고기 특유의 기름진 느끼함이 양주와 비슷한 맛을 내는 안동소주와 페어링이 그리도 잘 맞는다. 첫째날 여행의 여독을 푸는 완전한 음식, 안동의 숯불갈비만한 요리가 또 없다.

 



따뜻하고 비극적인 사랑의 현장, 월영교

안동여행 첫날밤의 마무리도 그냥 넘어가기 아쉬운 야경이 있다. 달의 그림자가 비춰주는 다리, 월영교의 야경이다. 안동에는 멋진 달구경할 수 있던 암벽 월영대라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월영대가 안동호 공사 때문에 수몰되고 말았다. 월영대의 명성을 잃기 싫었던 안동시민들은 직접 공모전을 통해 '월영'이라는 이름을 붙인 다리와 정자를 세우기로 하여 월영교가 만들어졌다. 


월영대를 기억하기 위해 월영교를 만든 것은 아니었다. 안동시에서는 일단 낙동강이 흐르고 풍광 좋은 곳에 다리 하나와 정자 하나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어떤 이름을 붙일까 고민하던 중 공모전을 통해 '월영'이라는 이름이 선정된 것이다. 월영교를 만든 배경은 따로 있었으니, 조선시대 아름답고 절절한 한 부부의 사랑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1998년 안동에서 조선시대 여성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인공적인 미라 제조가 아닌 자연적으로 우연히 만들어진 미라였는데 육안만으로 조선시대 여성의 외모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온전한 미라였다고 한다. 이 여성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아이의 이름이 '원이'라 그녀를 '원이엄마'라고 부른다. 미라는 놀랍고 또 이 미라에는 대단히 감동적인 사연이 있었다. 미라가 발견될 때 미투리(조선시대 신발) 한 켤레와 한글 편지까지 나왔는데, 이 미투리는 정상적인 미투리가 아니라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미투리였다. 한글 편지를 읽어 보니 이 여성은 이응태라는 남성의 아내로, 남편 이응태가 병으로 먼저 사망하자 살아생전 멋진 신발 한 켤레 사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원이엄마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미투리(조선시대 신발)를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미라의 발견과 함께 이 가슴 뭉클한 이야기는 당대 큰 화제가 되었다. 단순히 전해지는 전설이 아니라 한 개인이 직접 곡진하게 작성한 편지로 전해지는 만큼 그 곡진함이 여러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였다. 



원이 아버님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중략) 


당신 없이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보시고 내 꿈에 와서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중략)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 적습니다. 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보여주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속에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이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안동시에서는 이응태 씨와 원이엄마의 따뜻하고 슬픈 사랑 이야기를 기념하고자 미투리 모양의 월영교를 만들었다. 두 커플의 절절한 사연 때문인지 저녁에 마신 술기운 때문인지 월영교의 아경은 여운이 많이 남는다.


다음날 날이 밝으면 햇빛이 비추는 월영교의 모습도 꼭 한 번 확인해 보기를 추천한다.


낮의 월영교



전탑의 자존심, 안동법흥사지7층전탑

둘째날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가는 도로 한복판에 우람하고 장중한 탑 하나가 놓여 있고, 운전에 과하게 집중하지만 않으면 그 이형적인 모습에 시선을 뺏길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안동 전탑 양식의 자존심이라 일컬어지는 안동법흥사지7층전탑이다. 도로 한복판 멀뚱히 서 있어서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압도적이고, 무려 국보 16호이며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전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전탑이다. 전탑이란 벽돌로 만든 탑을 말한다. 전탑은 중국에서 유행한 탑의 양식으로, 석탑 위주인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탑의 양식이지만 유난히도 안동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전탑들이 안동에 몰려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잠깐 반짝 전탑이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통일신라의 하대에 해당하는 8세기 말~10세기 초에 안동을 포함한 경북 지역에서 전탑 혹은 하다 못해 돌로 전탑을 모방한 양식의 탑들이 유행하였다. 전탑들은 하나 같이 우람하였으며, 마치 하나의 건축물이었다. 다만 우리나라의 풍토가 우수한 벽돌을 만들기에는 다소 부적합했으며, 석탑의 양식이 가장 주된 양식이었기에 어느샌가 전탑의 유행은 사그라들고 말았다. 벽돌은 흙을 구워서 만들기 때문에 여름철 강수량이 미친듯한 우리나라의 기후상 전탑은 관리하기가 어렵다. 딱 한 군데 안동을 제외하고 말이다. 안동에서는 전탑에 흠집이 나서 무너질 거 같으면 굳이 굳이 고생을 애써가며 보수를 하여 전탑의 유행을 이어나갔다. 국내 현존하는 전탑은 총 5기 뿐이며, 그중 3기가 안동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 3기의 전탑 중에서도 안동 전탑 문화의 자존심인 것이 바로 국보 16호 안동법흥사지7층전탑이다. 법흥사라는 사찰과 전탑이 언제 창건되었는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경북 지역에서 전탑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8세기 말~10세기 초로 여기고 있다.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 때 조선 정부는 안동을 양반 사대부의 고향으로 만들고자 이곳에 있던 절들을 폐사시켜나갔다. 이 과정에서 법흥사가 소실되었지만 이 거대한 전탑만큼은 어쩌지 못 했다고 한다. 높이 17m에 이르는, 대한민국 현존하는 탑들 중 가장 높이가 높은 법흥사지 칠층전탑을 보면 우선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된다. 첫인상에 압도되지만 법흥사지 칠층전탑을 자세히 뜯어다보면 안타까운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로 탑신, 즉 탑의 몸통만 있고 상륜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단부도 일제강점기 당시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시멘트를 부어버려 기단부는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렸다. 일제강점기 대 전탑 옆으로 철길을 두는 바람에 접근성이 훨씬 어려워졌으며, 철길 공사로 인해 전탑은 현재 기울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현재는 도로를 두었기 때문에 차만 있다면 쉽게 전탑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수난의 역사를 겪고도 안동법흥사지7층전탑은 아무렇지 않은 듯 천 년이 넘도록 그 위엄과 위세를 드러냈다. 안동법흥사지7층전탑이 그렇게도 악바리로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무리 안동에 사대부 문화가 뿌리내렸다고 해도 전탑의 양식을 안동 고유의 문화라고 고집하려던 안동 사람들의 완강한 도움이 가장 결정적이었으리라.



안동의 맛 ③ 헛제사밥과 간고등어

둘째날의 아침 겸 점심 메뉴는 오로지 안동에서만 먹을 수 있는 헛제사밥이다. 안동의 맛을 대표해주는 다른 여러 음식들을 들어는 봤어도 '헛제사밥'은 생소할 수도 있겠다. 헛제사밥은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들을 내는 식당이다. 본디 제사의 문화에서는 제사를 다 차린 뒤 영험한 기운을 가진 복을 얻는다며 제사에 올렸던 음식들을 친척들끼리 다 같이 먹는 '음복'이란 순서가 있다. 실제 제사를 차린 뒤 내는 음식은 아니지만 제사에 올라가는 음식들을 식당의 메뉴로 판다고 하여 접두사 '헛'을 붙여 '헛제사밥'이라 하는 것이다. 양반문화가 강력하게 발달된 안동에서는 제사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한국전쟁 이후 사대부가의 여성들이 생계 유지 차원에서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들을 팔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큰 인기를 이끌었다고 한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의 스펙트럼은 지역적 차이가 어느 정도는 존재하겠지만 크지는 않은 편이다. 조선시대 성리학 문화가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보니 신분별 제사상의 규모 차이는 존재할지언정 음식 구성에선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안동의 제사음식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메뉴가 있으니 바로 간고등어다. 따라서 헛제사밥에서도 간고등어는 필수적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간고등어가 '두 유 노우 안동?'의 멤버 중 하나라고 해도 될 정도로 오늘날에는 간고등어가 헛제사밥에만 나오지 않고 안동 시내 어느 백반집을 가도 간고등어를 판다. 지금처럼 냉장 및 보관 시설이 없었던 조선시대 때 안동 같은 내륙 지방에서는 쉽게 부패할 수 있는 해산물을 마음대로 먹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안동에서 해산물을 먹으려면 해안가에서 생선을 잡자 마자 무지막지한 양의 소금으로 절여 부패를 막아야 했다. 안동으로 유통되는 이 소금에 절인 생선이 주로 고등어였다고 하며, 따라서 이런 고등어들은 조리하기 전부터 이미 짠맛으로 가득했다. 이미 간이 되어 있어서 '간고등어'라고 하는 것이다. 고등어가 귀하고, 또 지나치게 짠맛이 강하기에 한 마리씩 먹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안동 사람들은 고등어를 한 뼘 정도 크기로 토막 내어 가족 전체가 먹었다. 이제는 냉장 및 보관 시설이 우수하게 발달해있고 또 아주 쉽게 싱싱한 해산물을 먹을 수 있다고 해도 안동 사람들은 여전히 간고등어라는 식문화를 고수 중이다. 안동 사람들은 백반을 먹을 때 간고등어를 안 먹으면 밥을 먹은 거 같지 않다고 하는데, 안동 사람들 전부가 그렇진 않겠지만 안동의 음식들 가운데 안동 사람들에겐 밥과 함께 항상 딸려오는 가장 친숙한 안동의 맛이 간고등어였다.


헛제사밥과 간고등어



안동의 음식들은 상당수 제사 문화에서 탄생하였다. 제사 또한 우리 한국의 전통문화 중 하나이며 제사 문화를 가장 신성스럽게 보존하고 이어가고 있는 곳으로 안동만한 곳이 없다. 우선 제사와 차례를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다. 설에 지내는 것이 제사, 추석에 지내는 것이 차례라는 낭설이 퍼져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차례는 제사의 한 종류다. 제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죽은 자의 기일에 지내는 제례와 명절에 지내는 차례. 제례와 차례를 통틀어 제사라고 하니, 설과 추석에 지내는 제사가 모두 차례이다. 제사를 지내는 방식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 송나라의 주희가 <주자가례>라는 유교식 예법을 망라한 의례서에서 기인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한중일 한자 문화권에서도 제사를 지내긴 하였으나 주희의 <주자가례>에 이르러 제사의 방식이 일원화되었고 표준화되었다. 시대별 지역별 가문별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제사에는 공통된 원칙이 존재한다. 우선 제사상을 차릴 때는 5열이 가장 기본적인 구성법이다. 신주 기준 신주에서 가장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열이 1열, 가장 멀리 있는 열이 5열로, 5열은 과일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과일을 두는 기준은 왼쪽부터 '조(대추)-율(밤)-이(배)-시(감)-사과' 이며, 과일에 이어 과자를 오른쪽에 두기도 한다. 4열은 맨 왼쪽에 포와 맨 오른쪽에 식혜로 고정하고, 그 사이에는 삼색나물 및 야채를 둔다. 4열에 작은 틈을 만들어 간장을 두기도 한다. 3열은 탕줄이라 하여 탕요리가 배치되며 왼편에서부터 육탕(소고기국)-어탕(해산물국)-소탕(두부국) 순서로 들어간다. 2열은 적줄이라 하여 고기들이나 전들을 둔다. 마지막 1열은 밥, 국, 잔, 떡이 들어가는 열이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모든 음식들은 귀신을 쫓을 수 있는 고춧가루나 팥이 들어가지 않는다. 제사의 순서는 향을 피우며 제사의 시작을 알리는 분향-제사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절을 하는 강신-3번에 걸쳐 잔을 따르는 헌주-조상신이 음식을 먹는 동안 기다리는 유식-제사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다시 절을 하는 사신-제사 종료 후 상을 치우는 철상-제사상에 올라간 음식을 친척들끼리 나눠 먹는 음복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절을 할 때는 손과 발을 반드시 모아야 한다. 손을 포개는 위치는 남녀가 다르긴 하지만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며, 다만 손을 벌리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다. 절을 할 때 손을 벌리는 건 노예가 주인에게 하는 절에만 해당한다. 그리고 산 자에게는 절을 1번, 죽은 자에게는 절을 2번 한다는 원칙도 잘못 퍼진 오해다. 절은 상대방에 대한 나의 공경함을 나타내는 행위로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상대방을 높인다는 의미를 상징한다. 그저 산 자보다는 죽은 자에게 더 공경함과 존중함을 나타내고자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보다 1번이라도 더 많이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임금에게는 절을 9번이나 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제사는 몇 대 위까지 지내는 게 맞을까? 정답은 4대까지다. 제사를 '봉사'라고도 표현하여 이 원칙을 사대봉사라고 부른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했을 때 그의 고조할아버지까지 묘호를 바쳐 왕에 준하는 봉작을 올리고 종묘에 모셨다. 하지만 각 가문 별로 명망 있는 분이 있다면 4대손 이상으로 내려간다고 해도 후손들은 그 신위를 모시며 대대손손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으니, 신위를 치우지 않는다는 뜻에서 이런 분들을 향한 제사를 '불천위 제사'라고 한다. 불천위에 지정되는 분들은 보통 국가로부터 공신에 책봉되었거나 생전에 책봉되지 못했더라도 사후에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아 지정될 수 있었다. 가문에서 자발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 국가의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국가의 공인이 없어도 각 가문들이 자발적으로 원하는 조상들을 무작위로 불천위제사를 모시면서 불천위의 위상이 깎이기도 했지만, 그 원론적 의미 자체만 따지고보면 한 가문에서 불천위제사에 지정된 분과 그 가문의 영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불천위제사를 모시는 가문들이 가장 많이 집결해 있는 곳이 바로 안동이었고, 그 덕에 안동은 양반문화의 온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진성 이씨 가문과 하회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풍산 류씨 가문에서는 각각 퇴계 이황과 서애 류성룡에게 불천위제사를 모시고 있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아~ 우리나라 제사문화가 이토록 정교하구나"라고 감탄하기보다는 "뭐가 이렇게 쓸데없이 지켜야 할 원칙이 많고 복잡하지"라고 아니꼬운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한다. 나도 그 중 하나이다. 제사문화야 중국과 일본에도 있지만 그 규모와 정성 면에서 중국과 일본은 한국의 제사를 따라가지도 못한다. 그만큼 한때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문화 중 하나였던 제사문화였지만 최근에는 부정적인 전통문화의 잔존이라는 인식이 더 팽배하다. 제사문화를 강조하면 꼰대스럽다는 눈치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모 혹은 친척은 명절이 아닌 날에 보고, 명절 연휴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여행을 가는 가정들이 많아지고 있다. 당연하게도 이를 안 좋게 보는 어른들도 있고 말이다. 나는 제사문화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그러나 제사문화가 이렇게도 위상과 가치가 하락한 건 새로운 세대의 개인주의적 성향이라기보다는 제사문화를 아주 이상하리만치 변질시켜온 기성 세대의 탓이 크다. 제사문화를 망친 건 새로운 세대가 아니라 기성 세대의 몫이다. 나에게 제사문화를 무작정 깎아내리는 사람들의 주장과 제사문화를 무작정 신봉하는 사람들의 변은 모두 같은 논리의 원리로 읽힌다. 제사는 친척 간의 결속력을 더 공고히 해주고, 죽은 조상을 우리 후손들이 잊지 않고 있다는 휴머니즘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하지만 조선 후기 때부터 제사상의 규모를 각 가문별로 경쟁하며 어느샌가 제사는 가문의 권위를 과시하고 서열화하는 역할로 변질되었고, 이러한 권위 과시적 목적의 제사는 조선이 망하고도 이어져 내려왔다. 제사를 핑계로 여성들만 대거 주방에 가 노동을 시키고 남성들은 정치 이야기나 하며 탁자 위에서 멍청하게 밥을 기다리는 모습, 나이가 어리거나 사회적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으면 발언의 기회조차 박탈되는 가부장적 사회, 어색함을 타파하고자 안부차 물어본 질문이 잔소리로 확대되는 과정 등 이러한 꼴사나운 모습이 현 우리나라 제사문화의 현주소다. 제사문화는 우리가 가장 잘못 계승한 전통문화 중 하나이다. 그간 제사문화에 문제를 제기하는 건 금기시되어 왔으나, 이제서야 그 문제점들이 문제라고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풍조는 오히려 제사문화가 새롭고 올바르고 건전한 전통문화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라고도 생각한다. 중국과 일본의 제사상 규모는 한국의 그것에 따라가지도 못한다고 이야기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중국과 일본은 그렇게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안 하는 것이다. 과한 제사상과 제사문화는 오히려 산 자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고 이는 오히려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거니와,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조상에 대한 존중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 역시 과도한 제사상 경쟁을 비판하며 조상에 대한 정성이라는 정신적 가치에 더 주목할 것을 강조했다. 나는 제사문화가 사라지길 원치 않는다. 시대에 맞는 문화로 다시 탄생했으면 하길 원할 뿐이다.



도산서원에 담긴 퇴계의 순수한 주리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초야에 숨어사는 어리석은 이의 삶(草野愚生)이 이렇다 하여도 어떠하리
하물며 자연을 극진히 사랑하여 난 병(泉石膏肓)을 고쳐 무엇하리

-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 제1곡


영주의 소수서원, 논산의 돈암서원, 안동의 병산서원에 이어 네 번째로 소개하는 한국의 서원은 안동의 도산서원이다. 영주의 소수서원이 한국 최초의 서원이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안동의 도산서원은 한국의 서원들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서원이라고 평가한다. 도산서원이 한국의 가장 권위 있는 서원이 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도산서원이 퇴계 이황을 모시는 서원이기 때문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내려 표를 끊고 입구로 들어가면 도산서원이 나오기까지 한참을 걸어야 한다. 다만 경사가 있는 거리는 아니니 산책하는 느낌으로 기분좋게 걸어갈 수가 있고, 또 도산서원까지 가는 풍광이 수려해서 지루할 틈이 없다. 입구에서 도산서원까지 감상할 수 있는 호수는 자연 호수가 아니라 '안동호'라는 저수지다. 안동호는 1976년 완공되어 구미, 대구, 창원, 부산, 울산에 이르기까지 경북과 경남의 대도시에 많은 양의 용수를 공급해주고 있다. 즉 도산서원까지 가는 길에 즐길 수 있는 안동호 뷰는 조선시대에는 볼 수 없던, 현재의 시점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풍광이다. 마침내 도산서원에 이르면 도산서원에 들어가기 전 시선을 빼앗기는 곳이 있으니, 넓은 안동호 한 가운데 고고하면서도 앙증맞게 떠 있는 '시사단'이라는 자그마한 섬이다. 대체 저기에 왜 섬이 있지 의아하지만 어쨌든 안동호와 조합이 퍽 어울려 도산서원 가기 전 첫 포토존이 되는 곳이다. 도산서원을 여행한 관광객들이 각자의 SNS에 사진을 올릴 때 첫 메인 사진으로 올리는 사진이 보통은 이 안동호의 시사단이다. 시사단을 자세히 보면 작은 섬 위에 비석과 비석각이 몇 그루 안 되는 나무들에 쌓여 그 자체로도 서정적인 장면을 선사한다. 저 비석은 조선의 22대왕 정조가 세운 비석이다. 정조 치세 이미 몰락해버린 붕당이었지만 유독 정조가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남인'의 유림들에게 정조가 나름의 선물을 주고자, 1792년 과거시험을 특별히 남인에서 대스승으로 떠받치고 있던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에서 치른 적이 있었다. 남인은 비록 몰락한 붕당이었지만 남인 출신의 유학자들은 그들이 퇴계 이황의 직계 제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특별 과거시험 때 무려 3632명이 과거에 응시할 정도로 그 열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자신이 특별히 마련해준 이벤트에 이렇게 뜨겁게 호응해준 영남 지역의 남인 유림들이 고마워 정조는 이때의 과거시험을 기념하고자 비석을 세웠다. 이 비석이 시사단이며, 비문은 정조가 가장 기대고 의지했던 남인 출신의 채제공이 작성하였다. 다만 원래 시사단의 위치는 현재 위치가 아니었다. 안동호 건설로 해당 지대가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영남지역 사람들에겐 대단히 상징적이고 의미가 컸던 시사단을 지키기 위해 수심보다 높은 단을 쌓고 이 비석을 안동호 한 가운데 우뚝 솟게 세운 것이다. 따라서 시사단은 영남 지방 유림들의 자부심과도 같은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시사단


안개와 노을로 집을 삼고 바람과 달을 벗으로 삼아
태평성대에 병으로 늙어 가니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고자

-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 제2곡


이제 본격적으로 도산서원으로 들어갈 차례다. 도산서원 가까이에 주차장과 매표소를 만들어 곧바로 도산서원으로 들어올 수 있게끔 해도 됐을 련만, 왜 이렇게까지 비효율적으로 도산서원으로부터 먼 곳에 주차장과 매표소를 만들었는가 투덜되는 불만은 첫째 안동호의 수려한 경관에 누그러지고, 둘째 도산서원이 위치한 자리를 보면 납득이 간다. 풍수와 건축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던 퇴계 이황은 아무데나 서원을 만들지 않았다. 도산서원이 자리한 위치 자체부터 퇴계 이황의 정신과 사상을 담고 있다. 도산서원이 위치한 곳은 따뜻하고 소박하고 무구하고 적요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합할 듯싶다. 이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선 주차장과 매표소 같은 속세의 영역은 도산서원으로부터 멀면 멀수록 좋은 것이다.


도산서원은 도산서당으로부터 시작했다.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난 뒤 낙향한 퇴계 이황은 본인만의 강학 공간을 만들고자 제자들로부터 길지를 추천을 받아 1561년 도산서당을 차렸다. 따라서 도산서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도산서당 건물을 볼 수 있고, 그 옆으로로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농운정사가 있으며, 농운정사 밑으로 별채 공간인 역락서재가 있다. 이 세 건물이 도산서원의 시작을 알린 도산서당의 세 건물들이었다. 도산서당은 4칸 짜리 건물로 그중 2칸은 마루 공간이다. 마루 덕에 시원시원하면서도 또 따뜻한 온정이 서려 있는 아담한 건물이다. 격식은 차리되 그것이 과하고 드러내려고 과시하지 않는, 딱 퇴계 이황스러운 건물이다. 역사적 의의가 상당한 건물들은 아주 큰 편액을 걸어두곤 하지만, '도산서원'이라고 한자로 적힌 편액조차 소박하게 기둥에 매달려 있다. 산의 한자가 아주 흥미로우니 꼭 확인해보길 바란다. 도산서당 앞에는 연못이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연못이 있고, 또 적당한 크기의 마당이 있다. 꽃과 나무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퇴계 이황은 이 마당을 가꾸는 것이 취미였다고 하며, 그중에서도 퇴계 이황의 최애(?) 꽃 품종은 매화였다. 매화를 향한 퇴계 이황의 사랑은 아주 유명하다. 심지어 퇴계 이황은 매화를 '매형'이라고 장난스레 부르기도 했단다. 그리고 퇴계 이황의 그 수많은 시조들 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꽃 역시 매화다. 매화를 소재로 지은 시가 200수가 넘는단다. 


순박한 풍속이 죽었다고 하는 것이 진실로 거짓이며
인성이 어질다고 하는 것은 진실로 옳은 말이니
천하에 그 많은 영재들을 속여 말씀하실까

-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 제3곡



도산서당
도산서당



나는 항상 오래 병으로 시달려 괴로워했기 때문에 비록 산에서 살더라도 마음을 다해 책을 읽지 못한다. 깊은 시름에 빠졌다가도 숨을 고르게 하여 때로 몸이 가뿐하고 마음이 상쾌해지면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본다. 그러다 느끼는 바가 생기면 책을 덮고 지팡이 짚고 뜰마당에 나가 연못을 구경하고 절우사를 찾기도 하고 밭을 돌면서 약초를 심기도 하고 숲을 헤치며 꽃을 따기도 한다. 또 혹은 돌에 앉아 샘물 구경도 하고  대에 올라 구름을 보며 여울에서 고기를 구경하고 배에서 갈매기와 친하면서 마음대로 시름없이 노닐다가 좋은 경치를 만나면 흥취가 절로 일어 한껏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고요한 방안에 쌓인 책이 가득하다.

- 퇴계 이황 <도산잡영 병기>


그윽한 난초가 골짜기에 가득하니 자연히 듣기 좋고
흰 구름에 산이 있으니 자연히 보기 좋아
이 중에 저 미인 한 사람(彼美一人)을 더욱 잊지 못하여라

-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 제4곡


도산서당의 정원에 서 있건, 도산서당의 마루에 앉아 그 정원을 보는 것만으로 퇴계 이황의 정신과 사상을 머리로 이해할 순 없어도 가슴으로 느낄 수가 있다.


퇴계 이황 사후 퇴계의 제자들이 퇴계의 학풍을 잇고자 1575년 도산서당을 도산서원으로 만들었다. 제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도산서당 뒷편으로 강학공간인 강당과 학생들의 기숙사 공간, 그리고 퇴계 이황을 모시는 사당까지 만들며 마침내 도산서원이 된 것이다. 따라서 도산서원에 가보면 도산서당의 권역과 그 뒷편의 서원 권역이 풍기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조선의 14대왕 선조는 퇴계 이황의 권위를 높이 사 도산서원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으며, 도산서원이 완공되었다는 소식에 선조는 당대 최고의 명필가였던 한석봉을 통해 '도산서원'이라는 편액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현재 강학공간에 가서 확인할 수 있는 '도산서원' 편액은 바로 한석봉의 작품이다.



산 앞에 누대가 있고 누대 아래 물이 있도다
갈메기 떼가 오며가며 하는 차에
어떻게 성현이 타는 희고 고운 망아지(皎皎白駒)는 멀리 뛰어가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 제5곡


이렇게 도산서원을 다 돌고 나면 어딘가 모르게 섭섭한 구석이 남는다. 적당한 포토존이 없다! 물론 도산서원이 만들어질 때 포토존을 고려하면서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포토존은 없었을지언정 좋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들은 없을 수가 없다. 가뜩이나 위치와 터 선정에 그토록 예민했던 퇴계 이황이 말이다. 비록 안동호는 그 당시 없었을지라도 주차장에서 도산서원까지 오는 내내 평화롭고 동화적인 산 속의 따사로운 온정이 있었고, 도산서원의 자리매김이 비탈길의 축선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반드시 도산서원이 풍경과 함께 한 눈에 들어와야만 한다. 도산서원을 한 눈에, 한 화면에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없을 수가 없는데 없다! 왠지 저곳으로 가면 도산서원이 한 눈에 굽어보이지 않을까 하는 곳에 가면 키 큰 나무들이 모든 시야를 방해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시야는 옛 도산서원의 시야가 아니었다. 옛 도산서원에선 시원한 풍경과 어울어진 도산서원 전경을 굽어볼 수 있는 곳들이 많았다고 한다. 1969년 정부 주도로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어 도산서원이 관광지로 개발되는 과정에서 향나무들을 도산서원 곳곳에 빽빽히 심었고, 나름 자연친화적으로 만든다고 심은 향나무들이었지만, 관람자의 시야를 제한하는 장애물로 남아있다. 그래서 안동의 병산서원에서 즐길 수 있는 시선의 시원스러움을 도산서원에선 느낄 수가 없다. 도산서원을 한 눈에 담으면 내가 퇴계 이황 선생을 와락 안는다는 생각에 설레고 있었는데, 도산서원에선 미학적 완성도를 느낄 수가 없으니 그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자 그럼 퇴계 이황은 대체 한국지성사에서 어떤 입지를 가지고 있기에 퇴계 이황이라는 단 한 사람만으로 도산서원은 한국의 서원들 중 가장 권위 있는 서원이 되었을까? 한국지성사에서 정치인이 아닌 학자로서 단 1명의 대학자를 꼽아야 한다면 모두가 퇴계 이황을 꼽는 것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퇴계 이황은 연산군 시절 태어나서 34살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퇴계 이황의 생애에서 참으로 다행인 것이 퇴계 이황이 관직생활을 시작했던 시점이 연산군 치세는 거대한 폭풍이 지나고 난 뒤 중종 재위기였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 갑자사화, 그리고 중종 때의 기묘사화를 모두 피할 수 있었다. 이황의 관직생활에서 특이한 점은 없었다. 그렇게 빠른 승진을 하지도, 그렇다고 주류에서 빗겨나 있지도 않았으며, 주변에 이렇다 할 정적도 없고 전반적으로 무난하고 평탄했다. 이황의 정치인 생활이 그랬다는 거지 조선의 정치가 평온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중종에게는 세자 한 명이 있었는데, 세자의 친모는 세자를 낳자마자 죽었고, 당시 조선의 왕비는 세자의 계모였던 문정왕후였다. 그런데 중종 재위 말년에 문정왕후가 덜커덕 아들 경원대군을 낳아버렸다. 비록 문정왕후가 세자의 양엄마로서 그를 키우긴 했지만 친아들을 낳고 보니 친아들 경원대군을 차기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욕심을 내비추었다. 중종이 경원대군을 노골적으로 편애하자 조선의 조정은 세자를 지지하는 대윤파와, 경원대군을 지지하는 소윤파로 갈렸다. 이때 이황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늦둥이 경원대군을 총애했던 중종이었지만 중종은 생전 후사에 관해 확실한 결정을 하지 않고 죽으면서 세자가 그대로 보위를 이어 12대왕 인종이 되었다. 이로써 인종을 지지하던 대윤파가 승리하는 줄 알았으나, 인종은 개인적인 건강 때문에 9개월만에 사망하고 경원대군이 13대왕 명종으로 등극하였다. 명종은 나이가 어려 어머니 문정왕후가 섭정을 맡았는데, 문정왕후와 소윤파가 대윤파들에게 정치적 보복을 감행하는, 이른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당시 이황의 나이 45살이었고, 을사사화로부터 2년 후 문정왕후가 왕권 강화를 위해 성리학에 매진하던 사림파들까지 숙청하는 과정에서 이황은 정치 자체에 큰 환멸을 느꼈다. 

봄바람에 산에는 꽃이 가득하고 가을밤 누대에는 달빛이 차있다
사계절의 흥취가 사람과 한 가지라
하물며 물고기 뛰고 솔개가 날고(魚躍鳶飛) 구름의 그림자와 하늘빛(雲影天光)은 어찌 끝이 있을꼬

-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 제6곡

이황은 문정왕후가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며 지방의 사또로 부임하는 외관직을 자처했고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를 역임하였다. 지금도 충북 단양이나 경북 영주의 풍기에 가면 이황과 관련된 일화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황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는 최초의 서원이었던 백운동 서원을 더 크게 중창시켰고 조정에 편액을 내려줄 것을 상소문으로 올렸습니다. 명종과 조정은 백운동 서원의 이름을 ‘소수서원’으로 고쳤고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로 왕이 직접 서원의 명칭과 노비, 서적 등을 하사해주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황은 외관직도 얼마 안 하다가 그만두고 정계에서 은퇴하여 낙향하였다. 낙향 후 도산서당을 짓고는 공부에 매진하며 제자들 키우는 일을 했다. 퇴계 이황을 거쳐간 제자만 300여 명이 넘었다. 퇴계 이황의 네임드는 관직생활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내려가면서부터 급상승 하였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공부하는 걸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했던 사람은 퇴계 이황이었다고 단언한다. 최고의 천재였다고 할 순 없지만  퇴계 이황만큼 책 읽고 공부하고 토론하는 걸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덧 중년의 나이에 싫어하는 정치판 등지고 물 좋고 산 좋은 곳에서 학문에 매진하고 제자들을 키우니 예술적 감수성도 풍부해져 퇴계 이황은 아직까지도 걸작이라 칭송받는 시조들을 쏟아냈다. 현재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우는 퇴계 이황의 시조들은 전부 관직생활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서 쓴 시조들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황의 시조에는 순수한 설렘과 신남이 가득하다. 명종은 몇 번이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했으나 적성을 찾은 퇴계 이황은 한사코 거절했다. 몇 번 명종의 등살에 못 이겨 조정으로 복귀하기도 했으나 금세 사직서를 던지고는 곧바로 다시 돌아오는 일들을 반복했다. '퇴계'라는 호를 정한 것도 이 시점이다. '퇴계(退)'의 한자풀이를 해보자면 '시냇물이 있는 곳으로 물러난다'로 해석해볼 수 있는데, 그가 얼마나 현실정치에서 물러난 자신의 선택에 만족해 했는지 알 수 있는 호의 의미다.


천운대 돌아들어 완락재에 바람이 부니
만 권의 책을 쌓아두고 독서하는 즐거움은 끝이 없어라
이 중에 산수를 거니는 풍류를 일러 무엇할꼬

-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 제7곡


퇴계 이황의 이런 욜로라이프는 관직생활을 하고 있는 젊은 정치인들한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또 이황의 후배들, 제자들, 혹은 청년들이 이황을 찾아가면 이황은 언제나 환대해주고, 잘 해주고, 서스럼 없이 같이 놀고, 술을 내주고, 학문의 깊은 가르침을 주었다. 이덕에 이황은 당시 조선의 사상계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황이 환갑을 앞보고 있는 58살이던 시절, 고작 32살밖에 안 된 기대승이란 이름의 청년성리학자가 이황의 성리학 이론에 태클을 걸어왔다. 그냥 무시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을 텐데, 퇴계 이황은 일일이 그의 논리에 때로는 수긍하고 때로는 반박하며 건전한 토론을 무려 8년간이나 이어갔다. 

누가 옳고 틀리고를 떠나서 어리다고 무시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꾸해주는 퇴계 이황을 보고 수많은 사대부들이 찬사를 보냈다. 퇴계 이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특유의 온화하고 고고하고 도덕적인 인품 덕에 모두가 치켜세워주는 그 시대의 진정한 스승이었다. 1568년 조선의 14대왕 선조가 어린 나이에 국왕으로 등극하자, 왕실에서는 퇴계 이황을 모셔와 선조에게 성리학을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이때 퇴계 이황이 방대하고 심오한 성리학을 쉽고 간결하게 설명하고자 집필한 저서가 바로 <성학십도>이다. <성학십도>는 성리학의 철학을 10개의 그림과 도표로 설명한 저서로, 성리학에 대한 퇴계 이황의 학문관이 집대성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아울러 선조 재위 초기에는 기대승에 이어, 기대승보다도 10살이 어린 율곡 이이의 학문적 반박에도 친절히 응해주었다.


벼락이 쳐서 산을 무너뜨려도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고
하얀 해가 하늘 높이 떠올라도 눈이 먼 자는 보지 못하니
우리는 귀와 눈을 모두 맑게 하여 보고듣지 못하지 않으리

-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 제8곡

적어도 학문적으로는 조선 후기 전까진 이황의 성리학 사상이 사상계의 주류였으며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일본이 흡수한 조선의 성리학도 이황의 성리학 학문이었다. 단 퇴계 이황 사후 당신은 원치 않았을 현상이 벌어지니 퇴계 이황에 대한 절대화와 신성화가 이루어져, 그 누구도 퇴계 이황에 반박을 해서는 안 되는 불문율이 굳어지고 만 것이다. 1570년 퇴계 이황은 일흔의 나이로 사망했다. 퇴계 이항의 부고가 전해지자 선조는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애도를 표했다. 퇴계 이황의 마지막 말은 "저 매화나무에 물을 줘라" 였다.


퇴계 이황은 성리학을 어떻게 해석했길래 한국뿐 아니라 한국을 넘어 일본까지 당대 성리학의 주류가 될 수 있었을까? 성리학은 인간 수양의 학문을 넘어서 인간성, 더 나아가 우주의 원리와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성리학에선 만물의 원리를 이(理)와 기(氣)로 나누어 설명한다. 따라서 성리학의 시작은 이와 기를 이해하는 게 시작이다. 이(氣)는 그것이 존재할 수 있게끔 하는 근원고, 기(氣)는 실제로 발현된 유형의 무엇이다. 따라서 이는 보이지 않고, 기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바뀌지 않고, 기는 형태가 바뀔 수가 있다. 학창시절 이와 기에 대한 어려운 개념을 아주 쉽게 설명해주는 학교 선생님의 비유가 있었는데, 에어컨을 예로 들자면 에어컨이란 기계가 '기'이고, 에어컨에서 나오는 바람이 '이'인 것이다. 인간의 존재도 이와 기로 설명될 수 있다. 인간이란 몸이 바로 '기'이고,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이'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이'와 '기'를 각각 '성'과 '정'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개념적으로 이와 기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이기불상잡]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것이 티가 나지 않아 마치 이와 기가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이기불상리] 

따라서 성리학자는 인간의 이와 기를 나누어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인간에 대한 성리학의 기본적인 입장은 맹자의 성선설을 원칙으로 하기에, 인간의 '이', 즉 인간의 '성'은 착하다는 것이 전제이다. 하지만 세상을 둘러봐라. 어디 착한 사람만 있는가. 착한 사람만 있었다면 성리학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성'은 착한데 왜 모든 인간들은 선하기만 하진 않을까? 그것은 인간의 '기', 즉 '정'이 발현되면서 인간은 선한 행동을 보이기도, 악한 행동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는 가현적인 것이니까. 인간의 '기', 즉 '정'은 사단과 칠정이 있다. 사단이란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러 나온 마음씨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네 가지가 있다. 사단은 정상적인 이에서 발현한 기라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칠정이다. 칠정은 인간의 일곱가지 감정을 말하는데, 칠정에는 '기쁨, 분노, 슬픔, 두려움, 사랑, 증오, 욕구'가 있다. 이 칠정에 따라 인간은 인간의 본성답지 못한 행동을 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을 못 뵈어
고인을 못 봐던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쩔꼬

-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 제9곡

그렇다면 애매한 개념이 하나 있다. 인간의 '기', 즉 '정'을 구성하는 것이 사단과 칠정인데, 사단의 개념이 애매하다. 사단은 인간의 '이'에서 발현된 순수무악의 '기'이지만, 개념적으로는 '기'보다는 '이'에 가까운 듯하다. 퇴계 이황은 사단을 '기'가 아니라 '이'로 해석했다. 퇴계 이황은 인간의 본성과 순수성을 가장 중요시 여겼기에 '이'를 강조하며, 사단과 칠정 중 사단은 본디 '이'이지만 '이'가 발현하는 과정에서 '기'가 따라온 것일 뿐이고[이발기수지], 칠정은 '기'가 먼저 앞서 발현하다가 '이'가 올라탄 것[기발이승지]라는 이론을 폈다. 사단과 칠정에 대한 퇴계 이황의 해석에 반발했던 청년의 성리학자가 바로 기대승이었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 모두 인간의 '정', 즉 기에 속한다며 사단과 칠정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개념이라고 해석했다.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이 바로 16세기 조선철학사의 첫 논쟁이 일컫는 '이기논쟁'이다.


당시에 가던 길을 몇 해를 버려 두고
어디 가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온고
이제야 돌아오나니 딴 데 마음 말리

-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 제10곡


퇴계 이황의 복잡한 철학을 모두 이해하기란 나 같은 일반인은 너무 어렵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퇴계 이황은 인간의 순수한 본성, 즉 '이'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퇴계 이황은 마음의 수양, 인간의 인성 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황의 성리학을 '심(心) 철학'이라고도 한다. 이 자체로 퇴계 이황의 주리론(이를 더 강조하는 이론)은 조선 성리학을 뒤흔들었다. 성리학은 학문인 동시에 통치 이데올로기이기도 했다. 성리학을 통치의 이념 도구로 사용한다는 건, 성리학의 이론을 어떻게 정치에 적용할 수 있을지가 가장 중요한 성리학의 담론이었다. 이를 이기론으로 해석해본다면 '이'보다는 '기'를 더 중요시 했다고 볼 수 있다. 퇴계 이황 이후 율곡 이이는 이황과 달리 대표적인 주기론자로, 이이는 성리학을 토대로 현실개혁 정치를 펼치려고 했다. 퇴계 이황은 성리학은 이념이 아닌 학문이자 인간 수양의 방법이라며, 성리학의 근본으로 돌아가 인간의 본성을 강조했기에, 그 순수함에 성리학자들이 열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퇴게 이황 사후 그의 사상이 고여버려 절대화되는 폐해가 일긴 했지만, 그건 퇴계 이황의 탓이 아니며, 다른 건 몰라도 성리학을 가장 순수하게 접근했던 퇴계 이황의 심오한 철학 만큼은 한국 지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적 접근론이었다.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흐르는 강은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않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오랜 세월 언제나 푸르리라(萬古常靑)

-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 제11곡




강인하되 아름다울 수 있는 저항, 시인 이육사

도동서원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삼으로, 그의 고향은 안동,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조상과 후손이 서로 가까이에서 후대인들에 의해 모셔지고 있다. 이육사는 한국인 중에 모르는 이가 없는 대표적인 일제강점기 당시의 저항시인이었다. 저항시인이었던 만큼 이육사는 시련으로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장렬한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였다. 퇴계 이황의 후손이라는 명망가문에서 태어난 이육사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한학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에서는 일본, 중국을 모두 유학하며 근대식 교육을 접하였다. 1927년 독립운동가 장진홍이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켰는데, 이육사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살이를 치렀다. 당시 그의 수인번호가 264였는데, 출소 후 이육사는 본명 '이원삼' 대신 수인번호였던 '이육사'라는 예명으로 활동하였다. 이육사는 이후 기자로 활동하며 필력을 키우다, 만주로 넘어가 의열단에 가입하기도,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운영하던 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이육사는 투사로서 실력을 키우기도 하였는데, 권총사격에 상당한 재능을 선보였다고 한다. 1933년 귀국 후 이육사는 글을 통해 독립운동의 의지를 고취시키고자 펜을 들었다. 왕성한 집필활동을 선보이며 1937년부터 여러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1939년 <청포도>, 1940년 <절정> 등을 발표하며 이육사는 1940년대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40년대 초까지 이육사는 중국과 식민지 조선을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1943년 체포되어 1944년 옥사하였다. 이육사 사후 이육사가 생전 썼던 시 <광야>가 발견되어 해방 후 이육사의 동생 이원조가 1945년 12월 17일 소개하였다. 이듬해 1946년 동생 이원조는 형 이육사의 작품들을 모아 총 20편으로 이루어진 시집 <육사 시집>을 출간하였다. 이육사는 그의 일생 도합 17번의 옥중생활을 하였던, 말그대로 투사였던 시인이었다.


"옛날 학자들은 그들의 청절뇌락한 품위와 높은 윤리로서 학문의 조예와 아울러 훌륭한 시인이기도 하고, 뛰어난 경세가이기도 하였듯, 육사도 일견 가늘고 적고 얌전한 샌님이면서도 매섭고 꼿꼿함을 지열 같이 내장하고 있었음과, 또한 교양과 취미로써 문학에도 친했음은 역시 이조 거유(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서의 높은 지체와 뼈의 피할 수 없는 소치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육사는 시인으로서 남고 말았다. 물론 인간 육사는 무도에의 반항자로서 생애를 무고히 마쳤건만, 마침내 시인으로서 남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육사는 이것을 누명으로서 지하에서 노여워할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참으로 그가 생명의 깊이로써 관여하고 불망하던 것은 그까짓 시 나부랭이가 아니었을 것이었기 때문에." - 유치환


민족적인 저항의식을 강력하게 표방한 이육사 시인이었지만(그리고 스스로 시인이라고 여기지도 않았지만) 광복을 향한 처절함 염원 외에도 그의 작품들은 예술적인 표현력이 도드라지기도 한다. 우선 <청포도>를 보면 유음 중 하나인 'ㄹ'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시의 리듬을 살렸다. 유음 'ㄹ'의 반복이야 여러 시인들이 즐겨 쓰는 자음이지만, <청포도>에서 이육사는 독특하게도 잘 쓰지 않는 파찰음 'ㅊ'와 마찰음 'ㅎ'까지 반복하여 사용하면서 <청포도>만의 개성어린 리듬을 만들어냈다. 마지막 연의 '아이야'와 '하이얀'의 음율적 라임의 반복까지 이육사의 작품은 음악적으로도 아주 훌륭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및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이육사 <청포도> 전문


이육사의 가장 야성미 넘치는 작품 <절정>에서도 이육사의 예술적 표현력이 묻어난다. <절정>에서는 (역시 다른 시인들은 잘 쓰지 않는) 파열음 'ㄱ'과 파찰음 'ㅊ'의 소리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절정> 전문


내가 이육사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음악성뿐 아니라 비유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이육사의 솜씨 때문이다. 작중 화자가 기다리는 원관념을 빗대어 표현할 때, '청포도가 익어 가는 마을 전설에 청포를 입은 이가 찾아오니 그와 함께 포도를 먹겠다'는 보조관념과 '강철로 된 무지개'라는 보조관념을 보자면, 이육사는 서정적인 표현과 야성적인 표현 두 상반된 표현방식을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능력자임을 알 수 있다. 표현적 측면에서 압권은 역시 <광야>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광야>


우리 민족의 태고를 표현하는데 있어 하늘, 닭, 산맥, 바다, 광음, 강물 등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단어들로만 이토록 강인한 정서 기반 위해 풍부한 시문들을 만들어냈다. 광복을 향함 염원을 '가난한 노래의 씨'라고 빗댄 표현법, 그리고 거대한 시어들의 힘이 쌓이다 그것이 마지막 연에 가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과 '광야'로 이어지는 흐름은 독자의 벅차오로는 감정을 단계적으로 누적시킨다. 이육사의 시들을 읽자면 가슴 안에 거대한 공간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이육사만의 작시법이며, 이육사는 한국의 시인들 가운데 가장 빌드업 실력이 뛰어난 시인일고 단언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 안동 봉정사 극락전

안동 여행 중에 도산서원과 이육사문학관 기행은 동선상 곤란한 곳이다. 도산면은 안동시 내에서 다소 치우쳐 있는 곳이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가 쉽지가 않다. 안동여행을 2박 3일로 잡는다면 느긋하게 하루동안 도산에만 있으면서 마치 퇴계 이황처럼 자연을 노닐 수가 있지만, 나처럼 1박 2일로 안동여행을 한다면 아직 다녀올 곳들이 많다 보니 무리하게 여행을 강행해야 한다! 도산면을 나와 내가 갈 곳은 안동의 대표적인 사찰인 봉정사이다. 봉정사는 안동의 북쪽 서후면에 자리하고 있다. 도산면에서 서후면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아도, 서후면에서는 다시 안동 시내로 쉽게 들어올 수가 있으니 나름 동선의 효율성을 고려한 코스다...


봉정사는 통일신라 때 창건된 사찰로, 한국의 수많은 산사(山寺)들 가운데 그 문화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가치를 인정받아 통도사(양산), 부석사(영주), 법주사(보은), 마곡사(공주), 선암사(순천), 대흥사(해남) 등과 함께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는 7개의 산사 중 하나이다. 


실은 내가 봉정사를 찾은 이유는 (아마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봉정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봉정사의 극락전 때문이다. 국보 15호인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시대 때 창건한 사찰로, 현 남한 내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다. 우리 대한민국 땅에는 고려시대의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지 않고 5가지 정도만이 전해지는데 그 중 하나가 봉정사 극락전이다. 다만 봉정사 극락전의 채색이 워낙 선명하여 감상자들은 "남한 땅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인데 왜 이렇게 채색이 선명하게 남아있지?"라며 의아해할 것이다. 봉정사 극락전은 1972년과 2000년에 해체 수립 작업을 거쳤다. 말 그대로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스러움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나름 채색이 조화롭게 적용되었다고 개인적으로 느껴져, 극락전의 아름다움을 해치진 않는다.



봉정사 극락적은 정면 3칸짜리 건물에 정중앙에 문이 있고, 양 옆으로는 창문을 두었다. 지붕의 경우 봉정사 극락전은 경사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또 옆으로 넓직이 퍼져 있어 천진스럽기도 하다. 봉정사 극락적은 맞배지붕에 주심포 양식을 띄고 있다. 맞배지붕이란 지붕 두 면을 옆면 없이 맞대는 지붕양식이고, 주심포란 기둥과 지붕을 이어주는 포가 기둥 위에만 있어 화려하지 않고 정갈한 인상을 준다. 맞배지붕과 주심포양식은 단아하고 깔끔한 멋을 내기 위해 주로 하나의 세트로 묶이는 기법이다. 요약하자면 간결미와 단순미를 자아내기 위한 건축기법인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맞배지붕-주심포 양식의 고건축들은 대부분 채색이 없어서 단순미를 단아하게 보이지만, 봉정사의 경우 공포들과 처마까지 채색이 되어 있어서 적당한 화려함을 더하여 볼거리를 더 만들어준다.



복화반

봉정사 극락전의 킬링포인트는 봉정사에 그려져 있는 복화반이다. 이 복화반은 다른 건축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그림으로, 고구려 벽화에서만 확인된다고 한다. 즉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 초기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던 옛 고구려 양식을 반영했다는 뜻이 된다. 여러 전문가들은 봉정사 극락전의 구조미를 제대로 확인하려면 내부로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내부에서 보이는 목조기둥들의 골조가 빚어내는 건축선은 공업적이면서도 선의 예술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무엇보다 필요한 기둥을 과감하게 생략해서 내부 공간을 더욱 넓직하게 마련하였다.



부처, 자연, 신에 대한 경배-제비원 석불

봉정사에서 나와 안동 시내로 가는 길 중간에 '제비원 석불'이라는 안동의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 제비원 석불의 명성이 자자해서 신이 나서 달리는데, 아니 아직 도로 한복판인데 네비게이션에서는 다 왔단다! 네비의 길을 보니 도로 한복판 한 켠에 작은 공원이 있긴 하였다. 주차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서 차에서 내린 후 대체 석불이 어디 있는지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고개를 들쳐 보니 빼꼼히 쳐다보고 있는 제비원 석불을 볼 수 있었다. 유심히 생각해보니 제비원 석불은 도로 한복판에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운 위치였다. 고려-조선시대에는 도로 중간중간 여행자들이 쉴 수 있는 곳들을 마련하였는데, 이를 역참이라고 하며, 해당 시설들은 '역' 혹은 '원'이라고 불렀다. 마치 휴게소 같은 공간이다. '이태원'의 '원'자가 바로 그러한 역참 중의 하나였다. 제비원은 북쪽에서 안동으로 진입할 때 지나칠 수 있는 휴게소였다. 본디 제비원이 있던 자리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되었던 '연미사'라는 절이 있었다. 제비원 석불은 이 연미사에서 모시던 석불이었다.



석불은 말그대로 돌로 만든 부처상으로, 엄연히 숭배의 대상이기에 석불이 위치하는 전각 내지 비각을 만들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간혹 어떠한 보호각 없이 그 자리 그 위치에 그대로 두는 석불들이 있다. 이러한 석불들을 대개 이동시킬 수 없는 마애불들인데, 마애불이 아닌 평범한 석불임에도 돌산 위에 혹은 바위 위에 그대로 두는 경우가 있고, 제비원 석불이 그 사례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곳이 절이 있던 자리였던 것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사찰의 여부와 상관없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대단히 한국인스러운 발상의 위치다. 그리고 제비원 석불은 정성들여 조각한 것이 맞나는 의문점이 들 정도로 투박하다. 절대 우리 조상들의 석조 솜씨가 모잘라서가 아니다. 제비원 석불은 두상만 조각되어 있고, 몸체는 자연의 바위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약간의 실루엣 처리만 되어 있다. 조각된 두상의 석조 솜씨는 아주 정확하고 모범적이고, 자연 그대로의 몸체는 지극히 예술적이면서도 경건하다. 제비원 석불은 부처에 대한 숭배인 동시에 자연에 대한 경배까지 담아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한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의 전통 무가 중 대표적인 굿인 '성주풀이'에서 성주신의 본향이 바로 제비원 석불이라고 한다. 우리 조상님들이 모시던 여러 민속 신들 중엔 개인의 가정에 복을 전해주고 화를 막아주는 '성주신'이 있는데, 성주신이 바로 이 제비원 석불에서 유래하였다.



안동의 맛 ④ 안동찜닭

이제 안동역에서 안동을 떠나기 전, 안동을 마무리할 음식으로 소개할 안동의 맛은 (빠지면 서운할) 안동찜닭이다. 이제는 전국 어디서든 볼 수 있게 된 찜닭집. 최근의 찜닭집은 다들 저마다 고유의 상호명을 갖지만, 초창기 찜닭집이 전국적으로 퍼질 때 다들 '안동찜닭'이라며 '안동'의 지명을 강조하고 내세웠다. '찜닭'하면 언제나 '안동'이 따라다니니, 찜닭의 본고장에 가면 무언가 다를 거라 생각하고 안동에 가서 찜닭을 먹으면 '내가 알고 있는 그 맛이고, 특별할 게 없네'라며 기대에 못 미친다는 실망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이건 특정 음식을 처음 개발하고 유행을 시작시킨 모든 음식의 본고장들이 억울할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유행하는 모든 음식들은 처음 그것을 퍼뜨린 본고장이 있고, 본고장의 맛이 전국으로 퍼져 익숙해지면, 더 다양하고 맛있는 맛으로 확장하여 이제는 그 본고장이 어디였는가 잊혀지는 순환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근래에는 워낙 맛있는 찜닭집을 쉽게 찾을 수 있으니, 찜닭이 가장 먼저 탄생했을 때의 클래식한 맛을 내는 안동에서 찜닭은 심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찜닭은 한국의 전통적인 음식은 아니었다. 안동 시내 안동 구시장에는 통닭 골목이 있었는데, 1980년대 한 음식점에서 손님들의 요구로 닭을 간장에 조리고 또 여러 재료들을 넣는 과정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렇게 찜닭이 사랑을 받자 안동 구시장의 통닭 골목에 있던 다른 사장님들도 찜닭을 내어나 팔기 시작했다. 찜닭이 단기간에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된 건 그 푸짐함 덕분이 아닐까 한다. 절대 혼자선 먹을 수 없는, 이제 막 중산층 핵가족이 확고하게 자리잡던 1980년대에, 어른도 아이들도 외식으로 아쉬움 없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그 중에서도 안동 구시장에서 먹는 안동찜닭은, 비록 아주 특별할 것은 없지만, 그 현장성과 시장이라는 정겨운 분위기가 있어서, 맛 그 이상의 것을 나에게 전해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의 문화들 가운데 그 고향이 안동인 것들이 많다. <징비록>이 안동에서 집필되었으며, 하회탈은 안동 하회마을에서 탄생했고, 찜닭을 유행시킨 도시도 안동이고, 성주신의 고향도 안동 제비원이다. 또 안동소주, 안동국시, 헛제사밥, 전탑의 관습 등 안동의 워터마크가 강하게 박혀 있는 문화들도 있다. 유서 깊은 하회마을의 양반문화나 성리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퇴계 이황의 흔적이 있는 안동이라는 걸 고려했을 때 강한 자부심을 느끼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전통문화에 대한 안동의 역사적인 '집념'은 그럴 가치가 있고 박수받을 만하다.


하지만 역시 과도한 자부심으로 인해 '집념'이 '집착'으로 변질되는 것은 항시 경계해야 한다. 주변의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로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과 외부와 단절된 채 나만의 것이 무조건 옳다는 것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일지 모른다. 종이 한 장 차이라지만 한쪽은 더 발전하고 한쪽은 쇠퇴하는 길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 중 탄생의 취지 자체가 나쁜 것들은 없다. 성리학도 마찬가지였다. 성리학은 철학의 일종으로 철학이 세상에 유용하지 않고 실용적이지 못하니 나쁘다는 사고의 알고리즘과, 그래서 성리학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도식화는 편협한 사고다. 성리학이 조선 후기로 넘어갈수록 절대화되어 변화에 무뎌져 변질되었기에 역기능이 순기능을 가로질렀을 뿐이다.


우리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형성해주는 많은 갈래들 중 상당한 양의 지분을 갖는 안동만의 문화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단 시대의 변화에 맞는 가치를 탄력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말이다. 그것이 전통을 계승하여 살리는 방법이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이육사 <육사 시집>

퇴계 이황의 14대손 이육사의 유일한 시집인 <육사 시집>입니다. 이육사는 생전 시집을 발간하지 못했고, 사후 그의 남동생 이원조가 형의 작품들을 모아 1946년 시집을 발간하였습니다. <육사 시집>은 이육사의 시 외에도 그가 생전 기자나 평론가 생활을 하면서 집필했던 기사, 평론, 기행문 등의 다양한 글들을 모두 수록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시인이 되기를 거부했지만, 시로써 싸웠던 투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시집에 담겨져 있죠. 남성적이고 야성적이고 거칠면서도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이육사 특유의 문체에 빠져보시길 바랍니다. 시인들의 작품만 읽을 땐 작품 자체만 바라보게 되지만, 그의 개인적인 글들까지 읽노라면 '이육사'라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의 작품세계는, 더 나아가 그의 정신세계는 탁 트였지만 거센 서릿발이 흩날리고 황량한 불모지 한 가운데 놓인 고독함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나 그런 느낌을 줍니다. 청마 유치환이 서문을 작성하였는데, 그의 말마따나 육사의 작품들은 우리 삼천만 겨레 전휴의 자신에 대한 피나는 맹서였습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임권택 감독의 <축제>

언제나 한국적인 영화를 만들어내시는 거장 임권택 감독이 소설가 이청준의 <축제>라는 작품을 영화로 리메이크한, 임권택 감독의 95번째 장편영화입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족문화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도 또 훈훈한 가족애를 다룬 작품이죠. 주연은 안성기 배우님이 맡았습니다. 준섭(안성기 역)의 노모는 치매에 시달리며 이제 곧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는데, 준섭의 어린 딸은 그런 할머니가 신기할 뿐이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딸은 준섭에게 할머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어린아이가 던지는 질문에 준섭이 아이의 시선에 맞추어 대답하는 답변들이 참 따뜻하답니다. 하지만 끝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거대한 문중의 장손이던 준섭은 문중의 관례에 따라 우리 전통식으로 거대한 장례를 치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가깝고 먼 친척들이 발걸음을 찾으며 장례식장에서 서로에 대한 한과 원망을 토로하고, 장례식은 난장판이 되고 투전장이 되어버리죠. 어머니 장례 치르고 집안 어른들에게 인사하기도 바쁜 준섭은 친척들 중재까지 하느라 도통 정신이 없습니다. 진상스러운 상황에 할머니와 어린 딸의 환상적인 만남들이 영화 중간중간 틈입하는데,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지 가족애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며, 아울러 우리 전통장례식을 장황하게 보여줌으로써 전통의 형식과 그 전통 안에 깃든 정신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작금의 전통은 어딘가 거꾸로 된 건 아닌지 다각도로 가족과 전통에 대해 반성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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